최근에 경주와 부산으로 출장을 다녀왔다. 사실 처음으로 서울을 벗어난 곳, 그것도 상당히 먼 지방까지 출장을 다녀오게 되어 내심 들뜨기도 했다. 게다가 경주는 내 기억 속에서 점차 잊혀 가는 하나의 관광 명소이고 부산은 다녀온 지 5년도 넘었기에 오랜만에 추억을 되살리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관심을 사로잡았던 것은 불국사 템플스테이였다. 말로만 들었던 템플스테이를 처음 해보는구나 싶어 도착하기 전부터 발우 공양, 절밥, 승복 등을 상상하며 어떤 체험을 하게 될까 궁금해 했다.
하지만 1박 2일의 템플스테이가 종료된 후 내 기억 속에 자리하게 된 것은 사찰의 경내나 아름다운 건축물, 생활 방식 등이 아니라 오히려 순간마다의 내 감정과 생각이었다. 이번 출장의 성격상 다음날 바로 부산으로 이동해야 하는 일정이었기에 다소 시간이 촉박했던 것은 사실이나,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생각보다 내 눈에 들어오는 정경 자체가 크게 인상적이지는 않았던 것이다.
"오너라, 나는 이러저러한 기쁨을 준비해놓았다" 하고 너희들이 말하는 것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우연히 마주치는 기쁨, 그리고 나의 목소리가 바위에서 솟게 하는 기쁨밖에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 기쁨들은 압착기에서 넘치는 새 포도주처럼 우리들을 위해 새롭고 힘차게 흐를 것이다. 나의 기쁨이 꾸며지는 것을 나는 좋아하지 않으며, 슐라미트가 여러 방을 거치는 것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 나타나엘이여, 어떠한 기쁨도 미리 준비하지 말라.
-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 p.45
나는 근래 점점 생각을 잃어간다고 글을 쓴 적이 있다. 특히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내게 그다지 생각이라는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담아서. 당연하게도,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다. 다만 공간이 바뀌면 보다 수월하게 타인을 향한 생각이 나 자신에게로 옮겨갈 뿐이다. 내가 사찰과 템플스테이관의 고즈넉한 정취를 기대하며 숨을 고르고자 한 것은 어쩌면 내가 미리 준비해놓은 기쁨이라는 생각. 나는 오히려 늦은 밤 홀로 바깥공기를 마시며 언제가 될지 모를 여행을 상상하는 기쁨을 보았다.
이미 확연하게 달라진 공간 속에서 또다른 공간을 상상하거나 그리워하는 기쁨.

나는 여행을 떠나고 싶어하는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행 자체를 원하는 것은 아닌 듯하다. 지드는 1893년 아프리카 여행을 통해 새로운 삶의 의미와 방향성을 발견하고 4년 뒤 <지상의 양식>을 발표했다. 만약 아프리카가 아닌 다른 곳이었다면 혹은 아예 여행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지드는 결코 <지상의 양식>과 같은 책을 쓸 수 없었을까?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지드는 새로운 공간이 주는 기쁨과 감동을 온전하게 가질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던 듯하다.
무슨 일이냐! 나타나엘이여, 그대는 신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신을 소유한다는 것은 신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신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어느 산길 모퉁이에서, 발라암이여, 그대는 그대의 나귀가 멎어선 곳에서 눈앞에 신을 보지 않았던가? 그대가 신을 남과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나타나엘이여, 기다리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신뿐이다. 신을 기다린다는 것은, 나타나엘이여, 그대가 이미 신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을 행복과 구별하지 말라. 그리고 그대의 온 행복을 순간 속에서 찾으라.
-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 p.31
속세에 지어진 불국정토를 거닐며 지드의 말을 떠올린 것은 참 엉뚱하고 재밌는 일이다. 특히 석굴암에 올랐을 때 지드의 말이 싯다르타의 설법처럼 느껴졌다. 특별한 기회를 제공받아 석굴 안까지 들어가, 나로서는 처음으로 석가모니 본존불과 이를 둘러싼 여러 부조들을 가까이서 살펴볼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 단체로 들어간 것임에도 마치 석굴 안을 나 홀로 참배하는 것만 같은 기분 속에서, 나는 본존불 바로 뒤에 위치해 있어 유리문 바깥에서는 볼 수 없는 십일면관음보살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는 그곳에서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석굴 내부 관람을 마치고 나가는 길에 몇 사람이 합장을 통해 예불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모두 외국인이기에 사실 가이드가 알려준 방식을 따라한 것이었지만 내게는 그 모습이 특별하게 남았다. 나 역시 그들의 뒤를 이어 본존불 앞에서 합장을 했다.
얼굴에 미소를 띤 채 싯다르타는 그의 모습이 멀리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바라다보았다. 그는 아직도 그를, 그 충직한 친구, 그 고지식한 친구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 자기가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을 가리지 않고 사랑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경이로운 잠에서 깨어난 뒤의 이 찬란한 시간, 온몸이 온통 옴으로 충만한 이 순간에,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자기의 눈에 보인 모든 것을 다 사랑하는 것, 자기의 눈에 보인 모든 것을 다 기쁨이 넘치는 사랑의 감정으로 대하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잠을 자는 동안 옴의 작용을 통하여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났던 매혹적인 현상의 본질인 것이다.
-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p.170
오래전 부모님과 함께 석굴암에 올랐을 때 보았던 석굴과는 확연히 다른 공간이었다. 기억조차 나지 않았던 석가모니 본존불의 표정과 미소까지도. 공간이 달라짐에 따라 나의 생각 역시 달라진다는 것을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어느 새로운 공간 가더라도 여전히 나는 또다른 공간을 희구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불안이 떠오른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싯다르타를 바라본 것이 아니라 싯다르타가 나를 바라본 것임을.
지드는 <지상의 양식>의 1927년판에 붙이는 저자 서문에서 이 책을 '도망과 해방의 안내서'라고 썼다. 이번에 다녀온 출장은 당연히 도망도 아니고 해방도 아니다. 그러나 미리 준비해놓지 않았던 사색이다. 생각에 더 잠기고 싶다. 여행이라는 이름까지 붙이지 않더라도, 이곳에서의 계약이 종료되고 나면 어디로든 잠시 떠나고 싶다. 다른 어딘가에서 그저 그 공간에 담긴 모든 것을 보는 것.
무거운 졸음에 빠져 아무리 잠을 자도 깨어날 수 없었다. 식사를 마치면 눕곤 하였다. 잠을 자고 나면 더 피로를 느끼며 눈을 뜨는 것이었다. 어떤 변모를 앞둔 것처럼 정신은 마비된 채. 생명체의 은밀한 작업, 내면의 태동, 미지의 생명 창조, 난산. 몽롱한 의식, 기대. 번데기처럼, 님프처럼 나는 잤다. 내 속에서 새로운 존재가 형성되어가는 대로 나는 맡겨두고 있었다. 내가 앞으로 될 그 존재는 이미 나와는 다른 것이었다.
-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 p.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