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Opinion] 한 사람만을 위해 쓰인 편지 [공연]

2026 서울변방연극제 ⟪그러나 내겐 아직 마음이 남아 있는 것 같아⟫를 보고

by 유예현 에디터
2026.10.06 14:38
이 브라우저에서 최근 읽은 글입니다.
      이전에 읽던 글입니다.

      어느 토요일, 서울변방연극제 프로그램 중 ⟪그러나 내겐 아직 마음이 남아 있는 것 같아⟫를 보러 영등포구의 문래역으로 향했다. 이 공연은 ‘안티무민클럽(AMC)’의 우지안, 현호정과 팔레스타인 예술가 누아르 살렘(Nowwar Salem)이 선보이는 ‘과정공유회’ 프로그램이다. 찾아보니 ‘과정공유회(Process-Sharing Showcase)’란 예술가들이 어떤 고민을 했고 누구를 만났는지, 작업의 진행 과정 자체를 무대로 가져오는 형태의 공연이라고 한다. 물론 이 모든 걸 알고 예매한 것은 아니었다. 순전히 제목이 마음에 든다는 이유만으로 공연을 보러 가기로 결정했지만.

       

      공연을 보는 약 1시간 동안 나는 전반의 30분을 미친 듯이 웃었다. 후반의 30분엔 내 뒤의 누군가가 미친 듯이 울었다. 마음이 움직였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그 이유를 ‘팔레스타인’, ‘연대’, ‘가자지구’, ‘소외된 존재들’, ‘물리적 단절을 넘는 하늘의 무대’ 같은 단어들로 풀어 설명하고 싶지 않다. 물론 그 단어들 없이는 이 공연을 완전히 설명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 단어들이 이 공연의 전부는 아니기 때문에.

       

      공연이 끝난 후 عيب 과 حرام, 이 두 단어가 계속 떠올랐다.

       

      ‘아입’와 ‘하람’으로 불리는 이 두 단어는 공연 속에서 각각 ‘부적절한’과 ‘불경한’으로 번역된다. 연출가 우지안은 벽면에 띄워진 줌(Zoom) 화면 속 누아르 살렘과 마주 보며 질문한다. “사람들 앞에서 한 사람만을 위해 쓰인 이야기를 말하는 건 부적절한 걸까, 불경한 걸까.” 그러곤 품에서 편지 하나를 꺼내 읽기 시작한다. 그건 오직 누아르를 위해 쓰인 편지지만, 듣고 있는 사람은 누아르뿐이 아니다. 우지안은 누아르와 자신의 관계를 공연으로 만드는 것이 마치 누아르와 그의 아픔을 ‘파는 일’ 같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평소 누아르와 온갖 ‘부적절한’ 농담을 주고받으면서도, 진심이 담긴 이 편지를 읽는 일은 ‘불경하게’ 느껴진다고.

       

       

      SaveClip.App_810118277_18172998241453095_1105378588495931308_n.jpg

       

       

      부적절함은 때로 불편한 것들을 마주하지 않기 위한 연대의 언어가 되기도 한다. 부적절하다는 것은 결국 어떤 기준을 전제로 하며, 대부분 그 기준은 내가 아닌 타인이 정한다. 기준선 안의 ‘다수’와 기준선 밖의 ‘소수’는 누가 어떻게 기준을 정하느냐에 따라 언제든 달라질 수 있지만, 그 사실은 쉽게 잊히는 듯하다.

       

      ‘부적절한 농담’은 그 선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자신의 소수자성을 드러내는 농담은 그 사람이 기준선 밖에 있음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면서도, 바로 그 사실을 자신의 힘으로 삼게 할 수 있다. 타인의 기준에서 부끄러워해야 할 것을 스스로 웃음의 소재로 삼고, 그 웃음을 다른 이와 나누는 것이다. 기준선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지 몰라도, 그 선이 자신을 규정하는 힘은 처음과 같지 않다.

       

      우지안은 누아르와 ‘부적절한 농담을 주고받았다’고,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직감적으로 우리가 친해질 것을 알았다’고 말한다. 아마도 서로의 소수자성을 알아보고, 각자의 모난 부분을 서로 더욱 뾰족하게 벼려줄 수 있으리라 느꼈다는 말인 것 같다.

       

      하지만 이 공연에서 내가 받아들인 ‘불경함’은 부적절함과 다르다. 불경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나누는 선을 타인이 아닌 내가 긋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신을 믿지 않기 때문에 이런 해석을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불경함은 남이 내게 부여하기보다 스스로 느끼는 감각에 가까운 것 같다. 무언가 어긋난 기분, 무언가 찝찝한 기분. 하늘에서 누군가 내가 하는 이 짓을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을 것만 같은 기분. 그런 기분을 ‘불경하다’는 말로 표현하는 것 같다.

       

      그러니 참 모순적인 것은, 이야기는 개인적일수록 매력적이지만 그만큼 죄책감도 든다는 것이다. 나 역시 가까운 이야기를 글로 쓸 때면 그것을 파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우리의 관계를 표현하려 썼던 말들이 그 의도와는 상관없이 관객이나 독자의 흥미를 끄는 홍보 문구가 되어 공유된다는 것. ‘보여주기’를 위한 틀에 넣음으로써 어떤 신성한 것을 타락시킨다는 감각. 그러나 결국 나에게 유효한 이야기를 하려면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로 돌아온다. 아니, 그 이야기 말고는 다른 이야기를 상상할 수 없다.

       

      연극을 본 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이사벨라 함마드의 《낯선 이를 알아보기: 팔레스타인과 서사에 관하여》를 읽게 되었다. 그리고 한 부분에서 자연스레 이 연극을 떠올렸다.

       


      “남자들에게 말을 거는 일의 효율성을 고민하기보다, 우리가 서로에게 말을 걸 때 생겨나는 부산물을 통해 그들의 의식에 침투한다고 생각할 수 없을까? 우리 자신의 네트워크에, 함께 생각하고 저항하고 서로를 지지하며 공개적으로 실천하는 일에 더욱 집중할 수는 없을까?” 팔레스타인에 관해 영어로 글을 쓰면서, 나는 종종 나의 목적이 “서구인”을 교육하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나는 이 질문의 함의가 언제나 환원주의적이고 품위 없다고 느낀다. 그러나 우리끼리 솔직히 이야기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의식에 침투할 수 있다는 이 생각은 마음에 든다. (46)
       

       

      팔레스타인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나는 어쩐지 항상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오히려 더 아프고 더 끔찍한 이야기일수록, 그것이 나로부터 한참 떨어진 일이란 감각은 더욱 컸다. 그러니까, ‘그들’의 이야기 같았다. 이 고백을 부적절한 이야기와 불경한 이야기 중에서 고르라면, 부적절한 쪽일 것 같다. 그런 이야기들은 ‘그들’에게 벌어지고 있는 폭력과 내가 속한 안전하고 깨끗한 삶 사이에 선을 그어주는 듯했다. 그러나 안티무민클럽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관객인 나에게 보여주는 형식을 취하면서도, 딱히 나를 위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끔찍하고 이렇게 아프죠? 죄책감이 들죠? 하고 묻지 않았다. 팔레스타인에 관한 이야기를 애써 피하지도, 억지로 꺼내지도 않았다. 그저 누아르의 친구인 우지안과 현호정이 그와 나눌 법한 대화를 나눴다.

       

      솔직히 말하면, 이 공연에서 좋았던 것은 누아르 살렘, 우지안, 현호정이라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누아르가 이 공연을 위해 이곳에 와 있지 않다는 것도 좋았다. 줌 화면 속 그의 모습을 보며, 관객에게 그를 ‘보여주기’ 위해 이곳으로 데려온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이 이어지는 와중에 이 공연이 벌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랍어와 영어, 한국어를 오가는 대화를 따라가다 보면 조금 정신이 없었고, 우지안과 현호정을 거쳐 말이 번역되는 과정이 피로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이들이 서로의 말을 이해하는 일도 늘 편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공연을 보는 나 역시 그 수고를 조금 함께하고 있는 듯했다.

       

       

      IMG_0668.jpg

       

       

      뜻을 이해하지 못해도 좋았던 순간도 있었다. 우지안이 누아르에게 배운 춤을 추며 아랍어로 무언가를 말할 때, 나는 그 말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내게 낯선 아랍어는 그 글자처럼 말소리도 서로 이어져 있는 듯했다.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서 끝나는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그에 비하면 내게 익숙한 한국어는 소리가 또렷하게 끊기고, 높낮이도 분명하게 들렸다. 비유하자면, 아랍어는 누군가 입에 꿀을 한가득 머금고 말하는 느낌이었달까. 마지막에는 다 같이 막춤을 췄다. 방 안에 있던 누아르는 노트북을 들고 옥상처럼 보이는 곳으로 나가, 하늘 아래에서 춤을 췄다. 문래의 공연장에 앉아 화면 너머 그 모습을 바라보는 일이 참 좋았다.

       

      이사벨라 함마드의 말을 빌리자면, 그들이 서로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동안 그 말들이 내 의식에도 침투한 것 같다. 가까운 사람의 이야기를 공연으로 만드는 데 따르는 불경함을 의식하면서도, 자신들이 해야 할 이야기를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왜 그것을 꺼내기가 망설여지는지, 그런데도 왜 말해야 하는지를 곱씹다, 어쩌면 우리가 이 공연을 통해 만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이 공연은 어떤 일의 후속행위나 재연이 아니라, 말 그대로 세 사람, 그리고 관객인 우리가 만나는 자리라는 생각이. 공연 도중, 누아르는 묻는다. "밥은 먹었니?" 그 말은 우지안과 현호정을 통해 관객 한 사람에게 전해지고, 그 사람의 대답은 다시 현호정과 우지안을 거쳐 누아르에게 돌아간다. 세 사람의 이야기 속 목격자인 관객이 돌연 이야기 속으로 끌려들어간다.

       

      아마도 그날 그 자리에 모였던 사람들이 다시 모여 함께 웃고, 울 일은 없겠지. 그러나, 잠깐이나마 불경한 이야기의 목격자가 되기도, 누아르의 질문에 속으로 조용히 답하기도 했던, 서울의 한 극장에서 화면 너머의 카이로까지 뻗어 있던 그곳에서의 시간을 잊을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니까, 내겐 어떤 마음이 남아 있을 것 같다.

       

       

      이 이야기는 어떠셨나요?

      유예현 에디터의 인기글

      많이 읽힌 글 3편
      1. 01 [Opinion] 사자, 마녀, 그리고 극장 [공간]
      2. 02 [Opinion] 빨간 수화기 너머로 [사람]
      3. 03 [Opinion] 한여름의 시소러스, '서늘함'의 다른 말 찾기 [문화 전반]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