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봐, 벽에 틈이 있어 [공연]

뮤지컬 하데스타운으로 본 우리를 위한 우리의 행동
글 입력 2022.03.24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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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데스타운, 한국에서의 완벽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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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월 7일, 하데스타운은 브로드웨이에서의 흥행이라는 기대와 부담을 싣고 시작했다. 2019 토니어워즈 8개 부문의 수상작의 세계 최초 라이선스가 한국이라는 것은 관객들에게는 기대이고, 관계자들에게는 부담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공연 시작과 동시에 호평이 쏟아지기 시작한 하데스타운은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 조연상, 주연상, 대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뤘다. 또한, 서울에서 시작한 공연을 마치고 대구와 부산에서의 지방 공연을 차례로 이어 나가고 있다.


하데스타운이 초연부터 호평이 쏟아지고, 꾸준히 팬들을 모으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중 하나는 분명 초등학생 때부터 자발적으로 시작한 조기 교육일 것이다. 바로 '만화로 보는 그리스로마신화'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리스로마 신화를 각색해서 만든 하데스타운을 낯설게 느낄 리 없다. 이 뮤지컬이 처음 우리나라에서 시작한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하데스타운은 처음 들어봤어도 하데스는 모르는 사람이 없던 것처럼 말이다.


하데스타운이 한국에서 흥행하고 있는 두 번째 이유는 인간 보편적인 감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주인공인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가 하는 사랑은 신화나 뮤지컬이라고 해서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것이 아니다. 또한, 또 다른 주인공인 하데스와 페르세포네의 사랑도 그렇다. 오히려 이해를 넘어서 공감을 할 수 있는 수준이다. 스토리 전반에 깔려있는 사랑이라는 인간 보편적인 감성은 브로드웨이에서 시작한 공연이라 할지라도, 한국 관객들이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이 뮤지컬은 다른 나라도 아닌 '한국인'이 공감하며, 감동하기에 충분한 극 중 상황을 가지고 있다. 사랑 이야기라는 큰 틀에서 조금만 더 안으로 들여다보면 우리를 위한 우리의 행동, 투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이야기를 뮤지컬 넘버를 통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

뮤지컬 하데스타운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Why We Build the W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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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벽을 세우나?

우리는, 우리는 왜 벽을 세우는가?"


 

하데스타운은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신화 속 이야기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바에서 일하며, 봄을 불러오기 위한 노래를 쓰고 있는 오르페우스와 추위와 배고픔에 겨우 살아가고 있는 페르세포네. 그들은 단숨에 사랑에 빠졌지만, 에우리디케는 추위와 배고픔에 하데스타운으로 떠나게 된다. 뒤늦게 에우리디케가 떠난 것을 알게 된 오르페우스가 그녀를 구하기 위해 하데스타운으로 가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하데스타운은 하데스가 있는 장소 즉, 지하세계이다. 이 하데스타운은 사람들의 영혼을 부수고, 쉼 없이 일해야 하는 지하광산이 있는 곳이다. 바로 이 지하광산의 주인이 하데스이며, 쉼 없이 일하게 하는 장본인이다.


하데스는 지하세계로 돌아와 일꾼들을 향해 일장 연설을 시작한다. 지금 지하세계에 있는 사람들은 추위와 배고픔, 가난에 허덕이다 온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하데스타운의 장벽을 세우는 이유를 추위와 배고픔,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가난이 우리의 적이기 때문에 가난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장벽을 세워야 한다는 것.


하데스의 말만 들어보면 결국 하데스타운의 장벽은 일꾼들의 자유를 위해서이다. 그러나 이 장벽은 일꾼들을 위한 것도 아니며, 일꾼들이 자유로운 것도 아니다. 그들은 하루종일 일 하다가 아무 곳에서나 쓰러져 잠들기 일쑤이다. 또한, 일에 시달려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잊어간다.


하데스가 일꾼들에게 하는 것은 연설이 아닌 '선전'에 가깝다. 자신이 이로운 쪽으로 사람들을 세뇌시키기 위한 것이다. 하데스의 대사를 따라 하는 일꾼들은 이미 하데스의 선전에 넘어간 상태인 걸 알 수 있다.

 

 


Our Lady Of The Undergr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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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 속에 젖어 너의 눈이 멀어도

좀 더 가까이 와 모든 게 드러날 거야

좀 더 가까이 봐 봐 벽에 틈이 있어"


 

이런 하데스의 폭정에 염증을 느끼며, 일꾼들에게 연민과 죄책감을 느끼는 인물이 바로 페르세포네이다. 하데스와는 권태기에 있는 듯 보이면서 술과 약을 달고 살지만, 그녀의 가사 속에는 일꾼들의 눈을 뜨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 그러나 하데스가 일꾼들을 무자비하게 굴리는 이유 중 하나가 페르세포네인 만큼 직접적으로 말하기 쉽지 않으며, 자신의 남편을 방해하는 건 더더욱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술김에 하는 이야기가 바로 좀 더 가까이 보라는 이야기이다. 직접적으로 무엇이 잘못된 건지 알려줄 수 없는 이상, 페르세포네가 일꾼들에게 할 수 있는 것은 작은 힌트를 주는 것뿐이다. 가난에 힘이 들어서 하데스타운을 선택했을지라도 지금 이 상황은 옳지 않다고. 그러니 좀 더 가까이서 이 상황을 보고 무엇이 잘못됐는지 깨달으라며 말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페르세포네의 말은 이미 세뇌당해버린 일꾼들에게 닿지 않는다.


 

 

Way Down Hadestown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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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선 이름 따윈 없어

하데스의 자비로 쓰러지도록 일하고

맘껏 죽을 때까지 작업장에서 창고에서

고함소리와 착취당하면 돼"


 

하데스타운이 실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넘버가 바로 이것이다. 하데스와 일하기로 계약을 마친 에우리디케는 일꾼들과 인사를 하려고 하지만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일을 할 뿐이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당황한 에우리디케에게 운명의 여신들은 곧 너 또한 이렇게 될 것이라고 말할 뿐이었다.


사람들을 옥죄던 가난에서 벗어나 자유를 준다는 하데스는 더 이상 너그러운 고용주의 모습이 아니었다. 일꾼들 또한 자유를 위해 일한다며 외운 듯 이야기하지만, 실상은 머리를 잃지 않기 위해 허리를 펴지 않고 일하는 것이다. 이러한 착취를 하데스의 자비로 인해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일꾼들은 계속해서 헛된 자유와 하데스에 대한 공포심에 쓰러지도록 일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들의 이름을 잊어버릴 만큼 시달리면서도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말이다.

 

 


If It's Tr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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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진실인지 묻겠어

나와 당신, 당신, 당신에게

저들의 말보다 우리 대답이 중요하지"


 

자신의 이름조차 잊고 하데스에게 착취당하는 일꾼들을 깨울 한 명이 나타나게 되는데 바로 오르페우스이다. 하데스타운으로 가버린 에우리디케를 찾기 위해 왔던 오르페우스는 하데스의 말대로 움직이는 일꾼들에 의해 제지당한다. 맞고 쓰러져 모든 걸 포기하려던 찰나, 오르페우스의 노래를 듣고 있던 일꾼들은 자신들의 신세를 깨닫고 하데스가 한 말과 자신들이 하는 일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된다.


자신의 말을 듣기 시작한 일꾼들에 오르페우스는 다시 한번 일어나 하데스의 폭정에 대해 진실을 이야기한다. 벽에 틈이 있다며 간접적으로 이야기해주던 페르세포네와 다르게 오르페우스는 옳지 않은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것이 진실이라면 자신이 돌아가겠다고 한다. 그 때문에 일꾼들은 현실을 깨닫고, 이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다.


오르페우스는 이것이 진실이다! 라는 식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저 현실에 대한 의문을 표하는 것이다. 그 의문에서 시작한 깨달음은 이내 믿고 있던 모든 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걸 스스로 깨닫게 한다.

 

 


Epic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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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데스는 오르페우스와 일꾼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 대신 죽기 전에 노래 하나를 불러보라고 이야기하게 되고, 오르페우스는 봄을 불러오기 위해 쓰던 노래를 그의 앞에서 부르게 된다. 결국 하데스는 이 노래를 듣고 마음을 돌리게 된다.


이 뮤지컬을 보면서 계속 머리를 맴돌던 기시감이 이 넘버에서 해결되는 듯했다. 서로를 위해서라면 기어코 뭉치는 사람들. 우리로서는 전혀 낯선 것이 아니다. 더욱이 그 매개가 노래라면 말이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과거의 일도 그렇고, 지금도 여전히 이런 상황은 우리 곁에 존재한다. 서로를 위해 노래 부르며, 마음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일꾼과 오르페우스가 지금 이 순간에도 있는 것이다.

 

 


봐, 벽에 틈이 있어



이 뮤지컬을 보면서 한 가지 기억에 남는 것은 오르페우스가 일꾼들의 눈을 뜨게 하는 방식이었다. 과연 우리가 믿고 있는 진실이 맞는 것일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맞는 것일까 하고 이야기하는 것 말이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유지되는 걸 원한다고 한다. 계속 유지되는 세상에서 살다 보면 거기에 익숙해져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무엇이 진실인지 알지 못하게 된다. 마치 하데스타운에서 자신들의 이름을 잃었는데도 일하던 일꾼들처럼 말이다. 거기에 필요한 것이 바로 근본적인 질문이다. 이게 진실인가? 물었던 오르페우스처럼 말이다. 이 작은 질문이 사람들의 의문을 깨우기에 충분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항상 서로에게 오르페우스가 되어야 한다. 항상 서로에게 그것이 진실이야? 하는 질문을 던져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면 우리는 항상 뭉칠 것이고, 항상 함께 노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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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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