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첫 문장에 매료되어 단숨에 완독했던 책이 있다.
그해 봄 나는 약간 정신이 나가 있었다.
- 김사과, 『풀이 눕는다』, p9
이전에도 김사과 작가의 책을 몇 번 시도한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특유의 독특함에 밀려 끝까지 가지 못했는데, 『풀이 눕는다』만은 이 한 문장의 힘에 이끌려 곧장 마지막 장까지 갈 수 있었다. 앞으로 무슨 이야기가 펼쳐질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이미 화자가 약간 정신이 나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채로 책을 펼친 셈이니까. 받아들이고 시작하는 이야기는 빠르다.
그리고 그러한 감정을 두 번째로 느끼게 해 준 작품, 연극 <플리백>이었다.
슬픔에 빠져 허우적대며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람
극은 면접 장면에서 시작한다. 주인공은 면접에 늦고, 뛰어오느라 더워진 채로 앉아 있다가, 급기야 상의를 벗어버릴 뻔한다. 심지어 본인이 잘못했으면서 면접관과 말다툼까지 한다. 말도 안 되는 상황. 나는 이 첫 장면에서 이미 <플리백>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 앞으로 인터미션 없는 80분 동안 내가 따라갈 인생이 이런 사람의 것이라는 걸, 굳이 설득당하지 않고 그냥 피부로 인정하기. 그래서 곧장 극 속으로 빠져드는 것.
그리고 역시나, 이 극도 주인공을 나처럼 대한다. 주인공은 이름조차 부여받지 못한다. 이 극에서 그녀는 그저 플리백일 뿐이다. 플리백(Fleabag)은 영어권에서 오래 쓰여온 표현으로, 직역하면 지저분한 사람, 문제투성이, 누추한 곳. 맞다. 실제로 그러하다. 파산 직전의 카페를 간신히 굴리면서, 관계에 중독된 것처럼 남자를 쫓고, 일상도 제대로 영위하지 못한다. 한심한 인간이라고 누군가는 손가락질할 수도 있을 정도의 삶.
그런데 의외로 나는 초반부터 슬픔을 느껴서 그녀에게 이입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 극의 극초반, 면접 장면 직후에 그녀는 다른 남자를 만나기 위해 예쁘게 꾸미고 나오고, 버스 정류장의 한 남성이 자기를 바라보고 있다고 착각한다. 그러고는 그 남자에 대한 서사를 마구 풀어내는데, 그때 자전거 한 대가 쌩 지나간다. 그 벨소리 하나에 그녀는 다른 생각으로 바로 전환된다. 바로 가장 친한 친구였던 부의 죽음.
자살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완전 사고도 아니었던 거야.
부는 작고 귀여웠으나 질투가 많은 아이였다. 그래서 남자친구가 다른 여자와 잤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에게 관심을 끌 겸 죄책감도 줄 겸 조금 다치기 위해 달리는 자전거에 뛰어드는 무모한 서택을 했는데, 그렇게 그녀는 자전거와 자동차에 세 번을 치여 목숨을 잃게 되었다. 자의나 타의 그 하나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그녀는 사라졌다. 그 애매함을 평생 홀로 감당하며 이제는 자전거 소리만 나도 그 죽음을 떠올리며 살아가는 삶을 사는 주인공.
그때부터 그녀는 나에게 슬픔에 빠져 사는 사람으로 보였다. 슬픔에 빠져 허우적대며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람. 그리고 점점 극을 볼수록, 그건 슬픔뿐만이 아님을 느끼게 된다. 슬픔과 고독과 그리움과 무능함과 사랑받고 싶음과 자책과 괴로움에 빠져... 그렇게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악하는 한 사람이 영원히 혼자, 혼자 있는 이야기.
사랑받고 싶어의 캐릭터화
이 극은 그녀가 자해하듯 살아가는 것을 1인칭 시점에서 아무 포장 없이 보여준다. 가족에게도 세상에게도,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에게도 버려지기만 하는 삶. 왜 이렇게 사는가 싶으면 그녀는 본인 입으로 원래 자신은 그런 사람이라고 목놓아 외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녀는 제3의 벽을 깨고 자조적이고 쓰라린 농담을 관객인 우리에게 간절하게 던진다.
나 정말 웃자고 하는 얘기야.
정말 가볍게 웃어줄 수 있어?
웃어줄 수도 없고, 안 웃어줄 수도 없다. 사랑받고 싶다고 온몸으로 말하는 사람에게 한 줌의 웃음쯤은 주고 싶은데, 같이 웃어버리면 나는 그녀가 자기를 망가뜨리는 방식에 동의해버리는 사람이 되어버리고. 그 웃음 하나 받기를 간절히 원하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짠한 감정과 가까운 여러 감정이 동시에 드는데, 이 방백의 방식마저 그녀의 캐릭터와 너무 잘 어울린다.
본인이 선택한 삶이니 어쩔 수 없다 쳐도, 그렇다면 그녀가 괴로움을 느끼지 못하느냐하면 그건 또 아니다. 상처를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 이 사람은 남을 찌르지 못하고 자기를 찌른다. 마치 그것만이 살아 있는 자신의 유일한 책무인 양, 거기에는 아주 성실하다. 그렇게만 살아가야 한다는 듯이. 사람답게 못 사는 것만이 최소한의 사람다움이라는 듯이.
극을 다 보고 나면, 이름조차 부여받지 못한 플리백의 서사를 전부 알게 된 우리는 비로소 깨닫는다. 왜 그녀가 이토록 자기파괴적으로, 더 자신을 찌르고 해치며 삶을 살 수밖에 없는지를. 그리고 그다음에 이런 생각이 따라온다. 이런 그녀가 앞으로 잘 살기를 응원해야 하나? 어쩌면 사실은 이렇게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 아닐까? 어쩌면 누군가에겐 죽어 마땅한 사람이 아닐까?
그리고 지금 여기, 당신.
지금까지 원도의 기억을 쫓아온 당신도 한 번쯤은 이렇게 생각했을 수 있다.
이런 인물이라면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은가?
- 최진영, 『원도』, p239
하지만 나는 『원도』에서나 플리백에서나. ‘아니’라는 대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 독자이자 관객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세 명의 배우, 세 개의 무대
<플리백>은 2013년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시작해 그해 프린지 신작상(Fringe First Award)과 더 스테이지 베스트 1인 공연상을 받았고, 이듬해 런던 소호 시어터 앙코르 공연으로 영국 비평가협회 최우수 유망 극작가상, 오프 웨스트엔드 최우수 여자 연기상과 최우수 신인 극작가상까지 가져갔다. 2016년 BBC와 아마존에서 TV 시리즈로 만들어져 에미상 3관왕, 골든 글로브 2관왕을 기록했다고. 그런 극의 무려 한국 초연작이다.
그런데 이번 초연에서 내가 제일 흥미롭게 본 건 수상 이력이 아니라 캐스팅 설계 쪽이었다. 김히어라, 김주연, 김규남 세 배우가 한 인물을 나눠 맡는데, 그냥 배역만 나눈 게 아니라 무대 구성과 LED 화면, 조명, 음향까지 배우별로 다르게 디자인했다는 것. 관객과의 소통에 능한 김히어라의 회차는 원작의 스탠딩 코미디 형식에 가장 가깝게 짜였고, 무대 경험이 오래된 김주연의 회차는 소품을 여럿 두고 드라마성을 높였으며, 김규남의 회차는 그 둘 사이에서 여러 개의 의자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푼다고 한다.
이 설계는 꽤 영리하다고 느껴졌다. 1인극은 애초에 배우 한 사람의 몸과 목소리에 전부를 거는 장르인데, 그 사적인 성격을 무대 디자인 층위까지 끌고 올라가 아예 공연의 조건으로 못 박아버린 셈이다. 관객에게는 재관람의 이유가 자연스럽게 생기고, 배우에게는 '누구의 플리백인가'를 스스로 정의할 여지가 생긴다. 이길준 프로듀서가 "배우들의 생각을 최대한 반영해서 한 사람, 한 사람의 무대가 되기를 바랐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일 테다. 캐스팅 홍보가 아니라 프로덕션 구조 자체가 만들어낸 차이라는 점에서, 1인극이라는 장르의 진입장벽을 낮추는 방식으로도 퍽 괜찮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남겨진 것 자체로 삶이 속죄인 사람에게
"사람들은 왜 실수를 할까요? 그게 바로 연필에 지우개가 달린 이유래요."
"하, 그거 농담이에요?"
"(하늘을 보며) 모르겠어요⋯"
결말은 방향 다소 급진적이라고 볼 수 있지만, '결국 살아라'라는 작가의 직접적 메시지로 느껴졌다. 한 번 실수를 한 사람도 재고와 갱생의 여지가 있지 않은가? 그러나 평생 속죄를 해도 용서받지 못하는 실수가 있지⋯⋯ 난 이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여전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플리백은 모두가 그녀를 다정하게 대해도 평생 자기혐오에 빠져 괴로움에 살 것 또한 알기에.
류주연 연출은 이 극을 두고 관객이 자신의 결핍을 마주하고 나아가 그것을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나는 그냥, 그녀가 건강하게 괴로워하길 바란다. 괴롭지 말라고는 끝까지 말하지 못하는 내가 너무 박한가? 그런데 어떡해. 혼자 남겨진 것 자체만으로 이미 삶이 속죄인 플리백에게, 그리고 그 누구보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경멸하는 우리에게.
잠시만 울고, 자책은 짧게. 대신 오래오래 잊지는 말고.
- 드라마 <당신이 잠든 사이에>
그래도, 살자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