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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영화의 결말을 포함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심연의 공포, 낙인, 혐오를 마주하는 바디 호러
영화 〈알파〉는 〈티탄〉을 만든 줄리아 뒤쿠르노 감독의 바디 호러 신작이다. 영화는 신체에 그로테스크한 변형과 파괴를 가하는 특유의 질감 표현과 파괴적 묘사로 인간 심연의 공포와 마주한다. 이 문법은 영화 전체의 주제를 관통하는 것처럼 보인다. 육체가 돌처럼 굳어 가고 갈라지며 무너져 내리는 모습은 단지 감염성 질병의 여파로만 읽히지 않았다. 그것은 몸이라는, 인간 실존에 가장 가까운 매체를 가감 없이 파괴하고 뒤틀어 이질감을 만들어 냄으로써, 우리가 일상에서 방관해 온 깊은 곳의 낙인과 혐오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장치로 느껴졌다. 이는 전작 〈티탄〉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가장 통제할 수 있다고 믿어 온 몸이 변형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그 어디에서도 안전함을 느끼지 못한다. 〈티탄〉의 날선 금속의 서늘함은 〈알파〉에 이르러 텁텁한 붉은 모래의 버석함으로 옮겨 와 바디 호러의 계보를 잇는다. 다만 〈티탄〉이 변형된 몸 그 자체의 공포에 머물렀다면, 〈알파〉는 그 몸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으로까지 공포의 범위를 넓히는 듯하다.
영화는 오프닝부터 '몸', 특히 피부 위의 흔적에 집중한다. 팔 위의 흉터 자국과 그 흉터를 마커로 잇는 소녀의 손길에서, 우리는 신체 표피의 질감 그 자체에 모든 호흡을 집중하게 된다. 더없이 두렵고 괴로운 것은 소녀의 팔에 새겨진 A가 다른 어느 곳도 아닌 그녀의 '몸' 위에 남았다는 사실이다. 바늘로 피부를 뚫고 스며든 안료가 만들어낸 일상의 전복은, 그녀가 몸을 쓰며 살아가는 내내 사라지지 않고 지속되리라는 것을 우리는 은연중에 알고 있다.
우리는 '질병'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영화에서 질병은 단순히 의학적, 병리적 현상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사회는 환자를 신체적으로 '아픈' 사람이 아니라 '위험 요소'로 인식한다. 아직 질병에 노출되지 않은 이들에게 감염자는 위협일 수밖에 없고, 이는 특정 대상을 향한 공포와 혐오의 근원이 되어 뿌리 깊게 자리 잡는다. 그렇게 나타나는 기형적인 사회 현상이 바로, 감염 여부에 대한 추측을 기준으로 '우리'와 '그들'을 가르는 타자화일 것이다. 내집단과 외집단이 나뉘는 순간, 질병에 노출된 이는 다수가 정상성의 범주로 정의한 사회로부터 언제든 버림받는다. 사회라는 어머니에게서 내쳐진 'motherless'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이다.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아민 같은 인물은 사회가 규정한 질병의 이데올로기 안에 속박된다. 이는 영화의 시각적 요소를 통해 이해해 볼 수 있다. '붉음'이라는 색채는 영상 안에서 위험 요소로 간주되며, 사회적 낙인을 대표하는 표상으로 등장한다. 모든 것이 '붉은 바람' 탓이라며 아민의 몸에 물을 붓는 그의 어머니(알파의 할머니), 알파가 흘린 피로 붉게 물든 수영장에서 황급히 뛰쳐나가는 군중이 그러하다. 이 장면들은 질병에 대한 사회의 뿌리 깊은 오인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병을 규명하는 방식이 더 이상 이성적이고 과학적으로만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물을 붓는' 행위는 종교적 관점에서 '성수를 뿌리는', 관념적으로 성스럽게 여겨지는 행위와 닮아 있다. 결국 우리는 사실보다 미신에 가까운 오류가 터무니없는 주술적 행위로 이어지는 것을 목격한다. 그리고 이 오인은 바로잡히지 못한 채 개인의 미신을 넘어 사회 전체의 이데올로기로 굳어 간다.
바디 호러의 측면에서 보면 환자들의 몸이 지닌 질감에 주목해 볼 수 있다. 생명의 상징이 물이라면, 버석하고 수분감 없어 보이는 몸들은 곧 생명을 잃을 듯 위태롭다. 아민의 무너져 내리는 등과 그 사이로 쏟아지는 적토는 지층이 붕괴하는 듯한 재앙처럼 보이기도 한다. 대리석처럼 굳어 가는 몸은 미술관에 놓인 조각상을 닮았다. 쉽게 움직일 수 없고 신체적 자율성마저 잃은 채 병상에 누운 이들의 모습에서, 나는 사회 안에서 주체성을 잃고 구경거리가 된 '타자', 오직 '보이는' 것으로 재단되는 존재를 떠올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프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어떻게 '보이는가'이다. 흥미롭게도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대리석을 택한 이유를, 사회에서 천대받은 이들의 삶과 죽음을 성스럽게 기리는 영원한 기념비를 만들고 싶어서라고 밝혔다. 그러나 영화 속 사회는 이 몸들을 기리기는커녕 하나의 전시물처럼 바라볼 뿐이다. 감독이 부여한 성스러움과 사회가 가하는 대상화 사이의 간극이 이들을 더욱 아프게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Alpha, 그리고 Amin
알파는 13세 소녀로, 어느 날 팔에 커다란 A 문신을 새기게 되는 인물이다.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 사이 떠안게 된 A라는 글자는 그녀의 일상을 온통 헤집어 놓으며 변화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아민은 알파의 외삼촌으로, 어딘가 아픈지 손을 잔뜩 떨고 팔에는 주삿자국 같은 흉터가 가득하다. 두 사람이 상징하는 바는 유사하지만 조금은 다르다. 두 인물 모두 도시에 창궐한 감염성 질병과 깊이 얽혀 있으나, 알파는 감염 여부를 확실히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불확실성'을, 아민은 이미 오랜 기간 병과 싸워 왔다는 점에서 '확실성'을 지닌 환자다. 나는 이 대비가, 질병에 대한 사회적 이데올로기가 실제 감염 여부를 근거로 형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고 읽었다. 사회가 대상을 색출하고 선별하는 기준은 다수의 대중이 '질병이라 간주하기로 한 조건'이며, 그 조건에 일정 부분 들어맞기만 하면 누구든 그 범위 안으로 끌려 들어오기 때문이다.
또한 알파는 13세의 어린 소녀로, 아직 청소년기를 지나고 있는 인물이다. '알파'라는 명칭은 말 그대로 '시작'을 뜻하며, 혐오의 시대 속 상처를 대물림받는 새로운 세대이자 질병이 낳은 서사의 모든 파장이 퍼져 나가는 시발점이다. 그녀는 무지 속에서 사회적 낙인을 온몸으로 떠안으며, 무책임한 멸시를 드러내는 타인들과 잘못된 통념에 맞서는 존재다. 한편 아민은 알파가 겪어 온 일련의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른 존재로, 오랜 배제와 차별의 전사(前史) 속에서 이미 사회 시스템으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어 있으며 '질병과 중독'이라는 비극적 굴레에 묶여 있다. 알파와 아민은 서로 다른 존재이지만 유사한 사회적 시선과 인식의 먹잇감이 된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가 남긴 피해를 증언하는 이들의 '과거–현재'를 대변하는 것 같다.
아민과 알파가 한 방에 머물며 같은 자세로 고통스러워하는 장면, 그리고 괴로워하는 아민을 알파가 진정시키다 두 사람이 서로 얽혀 안고 절규하듯 우는 장면은, 두 인물이 공유하는 내재된 고통과 억압된 아픔이 터져 나오는 순간으로 비친다. 카메라는 감정에 과하게 개입하지 않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두 사람을 지켜보는데, 그 절제가 오히려 고통을 더 선명하게 만든다고 느꼈다. 여기에 배우들의 연기가 더해져, 말로 다 하지 못한 아픔이 몸짓과 표정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몸이라는 육체적 매개를 통해, 낙인 또한 몸에서 몸으로 이어진다.
주홍글씨 'A'
그렇다면 영화 내내 알파를 괴롭힌 'A'라는 낙인에 대해 이야기해 볼 필요가 있다. 서사 내에서 질병에 노출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큰 세 사람, ‘알파’와 ‘아드리앵’, ‘아민’의 이름의 첫 글자이기도 한 A는 이들의 병리적, 사회적 연관성을 드러낸다. 질병 때문에 사회로부터 배척될 수밖에 없던 존재들이, 서로를 '같은 처지'로서만 느낄 수 있는 연대감과 안정감을 영화는 이름의 첫 글자로 엮어낸다.
또한 A는 시각적으로 낙인이 명백히 드러나는 상징적 요소다. 알파의 피부 깊숙이 새겨진 A는 파격적인 사건이 전개되는 원인이 된다. 이 새겨진 A를 보며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 글씨》를 떠올렸다. 주인공 헤스터 프린은 간통(adultery)을 저지른 죄로 평생 가슴에 '간통한 여자'를 뜻하는 'Adulteress'의 머리글자 A를 달고 살아가야 했고, 그 낙인은 딸 펄에게까지 드리워져 또 다른 비극의 전조가 된다. 두 사람에게 새겨진 낙인과 그들이 견뎌 온 시선의 무게, 그리고 윗세대에서 아랫세대로 그대로 이어지는 구조는 아민과 알파의 관계와 닮아 있다. 다만 낙인이 무엇에서 비롯되는가에는 차이가 있다. 헤스터의 A가 '간통'이라는 도덕적 죄에서 비롯되었다면, 알파의 A는 '에이즈(AIDS)'라는 질병을 강하게 환기한다.
영화가 시대를 분명히 밝히지는 않지만, 이 배경에서 1990년대의 '에이즈 위기'를 떠올렸다. 치료법 없는 낯선 질병이 낳은 공포는 그 원인을 찾아 고개를 돌렸고, 당시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된 것이 성소수자에 대한 낙인이었다. 실제로 에이즈는 1982년 지금의 이름이 붙기 전까지 '동성애자 관련 면역결핍(GRID, Gay-Related Immune Deficiency)'으로 불렸다. 영화 안에서도 성소수자에게 유독 배타적인 상황이 여러 차례 그려진다. 학생들이 수업 도중 담임 선생님 앞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반감과 혐오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장면은, 특정 대상을 겨냥한 혐오가 질병이라는 요인으로 얼마나 극심해졌는지를 보여 준다. 그리고 이 공포의 문화는 곧 '언제든 사회로부터 버림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되어 모두에게 되돌아온다.
또한 알파벳 A의 형상은 프랑스 파리의 '에펠탑'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다소 주관적인 연상이지만, 에펠탑이 프랑스를 대표하는 상징적 랜드마크임을 감안하면 이 A는 프랑스라는 국가가 공유하는 정체성과 자부심과도 연결지어 볼 수 있다. 그런데 알파의 경우 북아프리카계로 읽히는 이민 가정에서 자라났다는 단서가 곳곳에서 보이며, 이러한 민족적 특징과 차이가 이민 사회 안에서 또 다른 낙인으로 기능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그래서인지 "프랑스 문화에 적응하기 싫어?", "노력이라도 하든가."라는 남성의 인종차별적 농담이 유독 뼈아프게 들린다.
질병은 어떻게 죄악이 되는가
〈알파〉가 포착하는 현상은 사회적 낙인과 이데올로기의 존재에 그치지 않는다. 낙인은 혐오를 낳고, 혐오는 다시 낙인을 낳으며 끝없는 굴레를 만든다. 그 과정에서 질병에 대한 낙인은 '죄악'처럼 여겨지고, 사회는 그 죄에 은밀한 벌을 가한다. 죄에는 자연스레 벌이 따른다는 듯 차별과 배제를 당연하고 합리적인 처우로 받아들이며 집단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것이다. 결국 영화는 낙인과 오해가 사회와 제도 속에서 어떻게 굴러가며 사람을 또 한 번 아프게 하는지를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 뿌리에는 대중의 무지, 그리고 정확한 정보와 교육을 회피하는 사회의 방임이 있다. 질병의 정확한 원인을 알지 못한 채 알파처럼 의심스러운 대상을 지목해 마녀사냥을 벌이는 현상이 나타나고, 이 오류는 사회 전체로 쉽게 번져 거대 기관과 제도 전반에 무책임함과 부조리를 퍼뜨린다. 모두 병원을 떠나 버린 의료진, 병원 앞에서 들여보내 달라고 소리치는 환자와 가족들, 학부모들의 원성 속에 학교로부터 압박받는 알파. "알려 줄, 교육할 생각은 없는 건가요?"라는 알파 엄마의 물음에 교장은 제대로 답하지 못한다. 환자와 약자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할 제도적 기반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잃고 이데올로기에 지배당하는, 진정한 비극이 도래한 것이다.
이로 인한 낙인 대상의 심리적 압박은 상징물을 파괴하고 소실시키는 문법으로 극적으로 표현된다. 안전하다고 느꼈던 집이 흔들리고, 높이 있던 천장이 몸을 짓누를 기세로 코앞까지 내려앉는 연출은, '아프다'는 것이 곧 '나쁘다'는 것이 되어 그들을 사회적으로 압박하는 과정을 시청각적 충격으로 은유하는 듯하다. 여기서 오는 압박감과 상실감은 이들이 느끼는 심리적 공포를 대변하기도 한다. 희망과 쾌유를 상징하는 무당벌레 포스터는 내려앉는 천장과 함께 망가진다. 무당벌레는 흔히 행운의 상징으로, 심리적 관점에서 더 많은 행복과 사랑을 바란다는 의미를 내포하기도 한다. 그리고 아민이 어린 알파에게 '뭔가를 잡았다'며 보여 주던 것이기도 한데, 이 대사는 무언가를 '잡는'(catch) 일과 병에 '걸리는' 일을 겹쳐 놓는다. 그런 무당벌레가 아민의 손아귀에서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장면은 으스러진 희망처럼 다가왔다. 결국 희망마저 빼앗긴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죽음을 소원하는 것뿐이었다.
놓아야 하지만, 놓을 수 없는 딜레마 속에서
생을 이어 가고 싶지 않아 하는 아민과, 그를 살려 내려는 그의 누나이자 알파의 엄마. 두 사람의 심리적 대조는 서사 내내 이어진다. 영화 후반부, 아민은 알파에게 '깨우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남긴다. 두 사람이 함께 올라탄 버스는 과거와 현재의 교차점으로, 두 사람의 운명이 서로 닮아 가면서 동시에 엇갈리는 지점을 보여 주며 현재의 사건과 대응되는 가족의 전사를 드러낸다. 과거의 알파는 쓰러진 아민을 보고 우는 데 그쳤지만, 현재의 알파는 엄마에게 아민을 제발 깨우지 말라고 연신 울부짖는다. 이 연출은 더 이상 질병의 방관자가 아니라 그 당사자가 된 알파가 스스로에게 건네는 말처럼 들린다. 사회의 낙인은 아민에게서 알파로 이어졌고, 그 고통을 일상 속에서 몸소 체현한 알파는 아민의 고통을 끝내 매듭짓지 못한 것에 '미안해'라는 말을 내뱉는다.
여기서 의뭉스러운 점이 하나 떠오른다. 그간 알파 곁에 있던 아민은 실존하는 인물인가, 그저 허상일 뿐인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해석이지만, 그 '아민'이 그의 누나이자 알파의 엄마로서 가족을 병과 사회로부터 지키고자 했던 그녀의 집념이 만들어낸 허상에 가깝다고 본다. 아민이 알파의 가족과 함께 살기를 스스로 원했을 때, 알파의 엄마는 이를 한 차례 거절했다. 아민에 대한 낙인이 알파의 평범한 일상을 해칠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알파의 집에서 함께 지내게 되는 서사는 마치 꿈처럼 느껴졌고, 실제로도 꿈에 가깝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8년 간격의 두 시간대가 서로 어긋나고 겹쳐지며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흐리는 영화의 구조도 이 해석에 힘을 실어 주는 듯하다. 알파와 함께 축구장을 뛰노는 아민과, 병상 위에서 붕대를 감은 채 죽어 가는 아민 중 실존하는, 혹은 실존했던 현실의 '아민'을 가려낸다면 나는 후자에 더 가까울 것이라 생각한다.
알파의 엄마는 아민을 마음속 깊이 품고 살아가며, 그의 모습을 딸 알파에게도 겹쳐 본다. 그녀가 알파를 놓지 못하는 마음은 과거 아민을 놓지 못했던 마음과 같다. 결국 알파와 엄마, 그리고 아민은 함께 차를 타고 붉은 모래바람을 헤치며 어디론가 향한다. 이때 알파가 엄마에게 건네는 대사가 마음에 오래 남는다. "엄마, 계속 같이 있을 순 없어.", "이제 끝났어. 다 지난 일이야. 엄마는 할 만큼 했어."
모래바람을 뚫고 어딘가에 다다른 그들은 차에서 내린다. 붉은 모래바람 사이로 걸음을 내딛는 아민과 엄마,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는 알파. 아민을 진정으로 떠나보내는 애도의 과정일 것이다. 아민은 모래가 되어 부서져 내리고, 거센 바람 속에 흩어져 사라진다. 화면은 알 수 없는 표정의 알파의 얼굴로 서서히 페이드인하며 막을 내린다.
우리는 과연 알파의 표정을 읽어낼 수 있을까. 혹은 그 고통을 이해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