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여름 <뉴욕 타임스>에 한국의 두 여성 작가이자 팟캐스터들의 이야기가 대서특필되었다. 결혼도 혈연도 아닌 동거 형태로 ‘조립식 가족(DIY FAMILY)’을 이루어 살아가며 목소리를 내는 김하나, 황선우 작가가 그 주인공이다. 이들은 한국 가족구조의 지각변동을 상징하는 인물로서, 또 전통이나 구습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새로운 삶의 형식을 개척하며, 동시대 여성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하는 작가로 보도되었다.
이들은 조립식 가족을 혈연도, 혼인도 아닌 방식으로 가족을 이루는 형태라고 말했다. 둘은 이렇게 이룬 자신의 ‘여둘’ 동거 라이프를 책으로 썼고,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를 2019년에 발간했다. 당시 이러한 조립식 가족 형태에 대해 생소했던 사람들에게, 둘의 발자취는 동시대 여성들에게 새로운 길의 지평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5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조립식 가족의 역사를 건축하는 둘의 이야기가 개정판으로 발간되었다. 초판에는 실리지 않았던 둘의 일상과 생활공간의 사진들이 추가되었다. 특히 고양이를 소개하거나, 각종 사건 당시의 사진은 현실감과 생동감을 불어넣어 줬다. 새로운 형태의 주거와 동거를 모색하고 고민하는 이들에게 ‘동거의 바이블’이 되었고, 앞으로도 더 나아갈 김하나와 황선우 작가의 이야기를 통해 발랄함과 유쾌함을 느낄 수 있었다.
조립식 가족, 분자 가족
2024년 대한민국 1인 가구 비율이 40%가 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가구 형태는 혼자 사는 가구라는 것이다. 혼자의 삶을 선택한 이들은 저마다 각자의 이유가 있겠지만, 1인 가구로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다. 경제적 부담 때문에 거주지의 환경이 협소해질 가능성이 농후하고, 간단한 음식 배달을 시키려고 해도 최소 주문 금액이 2만 원을 웃돈다. 특히 여성 1인 가구라면 안전, 보안, 건강 등 현실적 문제를 고려하게 된다.
다인 가구가 보편적이었던 가구 형태의 변화를 통해 조립식 가족이 등장했다. 새로운 가족을 꾸리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인 혼인 제도가 아니더라도 가족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혹자는 집을 공유하는 셰어하우스와 무엇이 다르냐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셰어하우스는 단순히 공간을 공유하는 개념이다. 우리가 기숙사에서 룸메이트와 함께 산다고 그와 가족을 이룬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앞으로의 여생을 함께 늙어가기로 마음먹은 것, 그렇기에 기꺼이 다른 점을 맞추어가고 조율하겠다는 의지. 그 이상의 다짐과 결합의 유기물이 가족을 이룬다.
난 호더 할머니로 물건에 둘러싸여 혼자 늙어 죽기보다 동거인과 사이좋게 늙어가고 싶다.
미니멀리스트와 같이 살게 된 맥시멀리스트의 인간 개조 과정은 길고 지난하다.
p94, 황선우
가족의 두 명 중 한 명인 김하나 작가는 ‘자취’와 ‘독신’이란 말의 뉘앙스가 엄연히 다르다고 말했다. 자취는 임시적이고, 결혼이나 독신 같은 결정을 내리기 전 지나가는 과도기 같은 느낌이다. 반면, 독신은 반영구적이고 반듯하며 자기 절제와 여유가 느껴지는 느낌이라고. 그런 김하나 작가의 자취 생활이 독신 생활로 접어들었을 때는 책장을 들여놓았을 때였다. 제대로 된 물건을 마련하자 집에 들여놓는 다른 것에 신중해지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마음가짐을 재배열하는 무게감이 생긴 것이다.
이제 내 집의 가구와 물건들은 이후의 어떤 시점에 이르기 전까지 한시적으로 쓰는 것들이 아니었다.
‘제대로 된 물건’을 마련할 그날 같은 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제대로 된 물건이 얼결에 들어서버리자 생활이 가지런해졌다.
p85, 김하나
이제 그녀의 반듯하던 독신 생활은 동거 생활로 바뀌었다. 자취를 독신 생활로 바꾸어주었던 아름다운 가구를 동거인과 반을 나누어 쓰게 되며 동거 생활의 새로운 시작도 함께 열게 되었다. 제대로 된 물건이 얼떨결에 들어와 생활을 안정시켜준 것처럼, 동거 생활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조립식 가족을 선택할 자격이 있을 만한 대단한 어떤 나이나 미래는 없다고 생각한다. 혼자보다는 같이 사는 게 더 좋을 것 같아 그렇게 살게 되었을 때, 그때부터 맞춰가고 나아가며 견고한 분자를 형성해 나갈 것이다.
더 큰 가족
이런 데 자부심을 느껴도 좋다는 사실을 나는 동거인에게서 배워간다.
김하나라는 신대륙을 발견하고서 열린 새 세계다.
p24-25, 황선우
이 책은 문장이 좋다. 19년 패션잡지 에디터와 카피라이터의 책이라 그런지, 글솜씨에 빨려 들어간다. 쉽게 읽히고 훌훌 넘어가는데, 유쾌하고 재치 있으며 표현이 품격 있다. 또한, 두 글쟁이가 같은 상황을 다르게 표현하는 것도 너무 재미있다. 처음 둘이 친해지게 된 표현에서, 김하나 작가는 둘의 공통점과 일치했던 취향을 세세하고 낱낱이 말해준다. 반면 황선우 작가는 공통점 중에서도 본인에게 없었으나 김하나 작가로부터 발견한 것들을 아름답게 묘사한다. ‘타인이라는 외국’만큼 설레지만 다름을 여실히 전달하는 표현이 또 있을까.
여성 두 명이 새로운 가족 형태를 이루는 책들은 생겨나고 있다. 2021년 『여성 2인 가구 생활』 책에서 지속 가능한 여성 경제 공동체를 이야기했고, 작년 발간된 『친구를 입양했습니다』에서는 친구와 법적 가족을 이루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했다. 선구자들의 기록은 후발주자에게 큰 도움이 된다. 실제로 어떤 절차와 합의 방법을 거쳤으며, 그 과정에서 어떤 어려움과 갈등을 겪을 수 있는지. 살아있는 역사이자 발자취다.
이런 책 중에서도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는 특히 통통 튀는 표현과, 솔직한 이야기로 입문하기 좋은 책이다. ‘조립식 가족’이라는 가족 형태를 잘 몰랐던 사람들 누구나 와닿을 수 있는 부분이 많다. 내밀한 사건 사고를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는 화자들의 문장도 어렵지 않고 친근하다. 동거하며 느끼게 되는 감정을 풍부하게 전달받을 수 있어 좋다.
…역시 동거인은 단순하고 튼튼하고 밝은 사람이 최고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실, 동거인의 동거인은 나니까, 나부터 단순하고 튼튼하고 밝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p178, 김하나
내가 원하는 동거인의 상에 맞추어 나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힘. 이러한 선순환이 동거의 가장 큰 장점일 것이다. 특히 집안에 혼자 있다는 것 자체가 책임감을 가중시키기에 불안함과 피로를 느끼게 한다는 것은 큰 공감이 되었다. 무의식적 책임감에 불필요한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은 줄어들고, 다른 사람이라는 환기 요인으로 인해 지나치게 골똘해지거나 불안에 잠식당할 확률이 줄어든다는 것. 이상적인 동거 그 자체이다.
더불어 이들의 글에는 수많은 주위 사람이 나온다. 같이 사는 아파트를 결정하게 된 것도 지인 부부의 아파트가 무척 마음에 들어 그 아파트를 선택하게 되었고, 집안의 큰 기둥을 담당하는 가구인 책장도 친구가 만들어주었으며, 또 함께 아는 다른 부부도 술친구이다. 혼자에서 둘인 조립식 가족이 되었는데, 다른 가족과도 원할 때 결합하여 ‘더 큰 가족’을 이루며 산다. 조립해서 더 큰 가족을 이루기도, 분해해서 둘만의 가족을 이루기도 하며 산다는 것은 더욱 풍요로운 가족 형태를 띠어 보이기도 한다.
바야흐로, 새로운 가족의 시대
앞으로 무수히 다양한 형태의 ‘분자 가족’이 태어날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 가족의 분자식은 W2C4쯤 되려나. 여자 둘 고양이 넷.
지금의 분자구조는 매우 안정적이다.
p10, 김하나
다양한 분자 가족이 많아질 것이라는 작가의 생각에 동의한다. 최근 매체에서도 조립식 가족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2022년 tvN 예능 <조립식 가족>에서는 여성 댄서 둘, 남성 배우 셋, 결혼이 아닌 동거를 택한 커플 등 다양한 조립식 가족을 보여줬다. 공교롭게도 같은 이름인 JTBC 드라마 <조립식 가족>이 현재 방영 중이며, 혈연이 아니어도 가족으로 함께 자란 세 사람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프랑스에는 시민연대계약(Pacte civil de solidarit , PACS)인 팍스가 있다. 두 사람의 성별과 관계없이 사회적 보호 자격을 얻을 수 있도록 한 제도이다. 1999년 도입되었고, 2022년에는 20만 쌍이 넘는 커플이 팍스를 맺으며 역대 최대치를 기록하기도 했다. 오히려 동성 간 팍스 체결 비율은 5% 이하이며, 이성 간 팍스 체결 비율이 압도적이다. 독일 역시 이와 유사한 생활동반자법이 있으며, 이 외에도 혼인에 준하는 동성 간의 시민결합이나 파트너십을 인정하는 국가는 스무 개가 넘는다.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조립식 가족은 사실 가족이라는 명칭에 맞는 제도적 보호를 받을 수는 없다. 출산율이 심각한 우리나라에서 이런 방향성을 우려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나라 출산율의 2배인 프랑스의 출산율에 팍스 제도가 기여했다는 분석이 많다. 오히려 동거를 제도화했을 때 출산율이 증가했다는 것이다. 혈연, 결혼, 입양을 기반으로 한 전통적인 가족의 개념에서 벗어나 사회적 신뢰를 기반으로 한 사회적 가족인 대안적 가족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나라의 새로운 방향성을 생각해 볼 때이다.
김하나와 나의 가슴속에는 같은 모양의 구멍이 뚫려 있다. 아주 멋지고 잘생기고 커다란 고양이, 고로 모양의 구멍이.
그 구멍은 우리 공통의 상실이기도, 추억이기도 하다. 우리가 사랑했던 자리다.
p304, 황선우
황선우 작가가 키웠던 고양이 중 한 명인 고로를 잃고 황선우 작가는 많이 힘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고, 가족이 있었다. 같은 사랑의 기억을 간직하고, 상실의 아픔을 공유할 수 있는 것이 가족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 책을 읽으며 ‘가족’은 꼭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친구들은 사회적 정서적 안전망이다”는 김하나 작가의 말처럼, 정서를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이 가득하다면, 그런 삶의 방식 역시 혼인 제도 못지않게 사회적 연대와 책임을 다하는 방식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