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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는 망한 사랑이 최고!”
 
 
로맨스를 많이 써보지 않아 어색했던 배명은 작가가 지인들에게 원하는 로맨스를 물어보고 들은 대답이다. 그 말을 중심으로 배명은 작가가 로맨스를 써 내려갔다. ‘망한 사랑’이라는 단어가 너무도 포괄적이라 과연 이것이 망한 사랑이 맞는지도 모르겠고, 그러다 보니 자책도 하며 써 내려간 사랑 이야기. 그것이 바로 <계화의 여름>이다.
 
망한 사랑의 정의는 뭘까. 단편적으로 새드 엔딩이 망한 사랑이겠지.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사랑이 망한 것이겠다. 그렇다면 서로 마음으로는 영원히 사랑하지만, 평생 만나지 못하는 사랑은 망한 사랑인가? 사랑은 이루어졌으나 상황이 뒷받침되지 못하는 그 사랑을 보고 누군가는 망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망한 사랑에는 정답이 없다. 추상적인 단어 ‘사랑'에 입체적인 단어 ‘망하다'가 붙었으니, 절대적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요즘 망한 사랑이 뜨는 이유는 사랑이 망하기까지 가는 그 깊고도 진한 서사에 몰입하는 사람이 많아진 것이다. 그 사랑 자체의 성공과 실패를 논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빠져들 수 있는 사랑 이야기를 선호한다는 것. 그렇다면 <계화의 여름>도 그러할까? 첫사랑 소설로 영업 당했는데 작가는 망한 사랑을 염두에 두고 썼다니. 홀라당 낚여버렸다.
 
 
 
모든 첫사랑은 망한 사랑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홀라당 낚인 게 아니다. 모든 첫사랑은 망한 사랑이다. 왜?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물론 첫사랑과 사랑의 결실까지 본 무수히 많은 아름답고도 따뜻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을 우리가 더욱 낭만적으로 보는 이유는 그 ‘첫사랑'에 실패하고 상처받은 경험을 많이 해보았기 때문에 오히려 그 가치를 인지할 수 있을 것이다. 첫사랑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 겪어보았으니 생판 남의 사랑에도 그 희소성과 책임감에 호의를 표하는 것이다.
 
첫사랑을 끝까지 지켜낸 각별한 사례를 제외하고는 모두 첫사랑에 실패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비단 첫사랑뿐만 아니라 사랑을 지켜내는 것 자체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사랑하는 그 마음 때문에 다들 사랑에 매달리는데, 우습게도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지킬 수 없는 것이 사랑이다. 핍박과 고난의 환경뿐만 아니라 하물며 사랑을 가득 담고 있음에도 지킬 요령이 없는 미숙한 나조차 사랑의 걸림돌이 된다.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도 모두 첫사랑을 한다. 각자의 첫사랑은 마치 천재지변처럼, 한순간의 우연처럼, 아주 작은 민들레 홀씨처럼 찾아온다. 어떤 천재지변은 누군가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고, 한순간의 우연은 평생 잊지 못할 인연이 되고, 작은 민들레 홀씨 같던 시작은 무성한 꽃을 피운다. 처음에는 저렇게까지 인생이 뿌리째 흔들리게 하다니, 너무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사랑이 다 그런 것 아닌가? 민들레 홀씨처럼 작은 우연이 다가와 인생을 뿌리째 뽑는 것, 그게 사랑이니까.
 
 
 
과거에 사는 사람과, 심지어 사람도 아닌 것

 

<계화의 여름>은 인외물이다. 인간 이외의 존재가 소설 속 등장인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계화는 사람이다. 피부가 물고기 비늘 같은 비늘로 덮이고 벗겨지는 피부 질환을 앓지만, 굳세게 버티는 소녀이다. 여름은 구렁이다. 여름이 계절이 아니라니. 그러나 구렁이 ‘여름'이 등장한 순간부터, 계화에게 여름은 그를 떠올리며 그 속에서 살아가는 여름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개인적으로 과거에 사는 인물을 미워하지 못한다. 뒤를 돌아보고 사는 사람들. 과거의 아픔에, 사랑에, 기억에 갇혀 사는 사람들. 미련하다는 걸 알지만. 순간으로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는 걸 믿기에, 그런 캐릭터는 망태기에 고이고이 쌓아둔다. 어딘가에서도 또 자신의 과거에서 살아갈 것만 같으니까. 내가 닫은 책 속, 내가 넘긴 드라마, 내가 멈춘 영화 속에서 그 캐릭터가 살아 숨 쉴 것 같아서.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계화의 여름>은 통째로 망태기에 넣어둬야 할 판이다. 심지어 여기는 인물 캐릭터만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이 아닌 캐릭터까지 있으니. 공연에서나 도서에서나 인외 존재에 그다지 크게 몰입하지 못했던 나로서는 굉장히 신선한 경험이다. 책이 단편 시리즈다 보니 생략된 부분이 많고, 공백의 부분에 상상을 덧칠하고. 그러다 보면 ‘계화의', 계화가 소유한 한 폭의 ‘여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기다림의 삶

 

 
돌아오고는 있는지, 금방이라면 얼마나 금방인지, 너무도 모르겠어서.
 
p 138
 
 
배명은 작가는 비록 최고는 아니더라도 그 어떠한 형태의 사랑이든 ‘사랑이었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좋다고 생각하며 글을 썼다고 한다. 독자인 나는 이 작품을 다 읽은 뒤 ‘기다리며 사는 삶’에 대해 떠올리며 책을 덮었다. 기다리다, 기다리다, 기다림의 일부로 삶을 살아가는 존재들을. ‘사랑이었다'고 마침표 찍을 수 있는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다리는 삶은 사랑의 유예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니까.
 
어릴 적 아주 좋아했던 영화 <늑대소년> 생각도 났고, 이무기라는 소재와 망한 사랑이라는 약간의 첨가물에서 드라마 <구미호뎐>도 떠올랐다. 계화라는 이름에 대해서도 계수나무 꽃을 뜻하는 계화(桂花)가 아닐지 생각해 보았다. 구렁이가 이무기가 되기 위해 달디단 향기를 내뿜는 계수나무 아래에서 수련했을까. 정류장 옆 계수나무 위에서 꽃이 핀 계화를 바라보던 여름의 심정은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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