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너무 늦었다는 이유로 도전을 머뭇거리거나 시도조차 해보지 않은 적 있는가? 여기 80이 넘은 나이에 글을 배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할머니들의 이야기가 있다.
다큐멘터리 영화 <칠곡 가시나들>을 원작으로 한 뮤지컬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이다. 이 작품은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 작품상, 연출상, 극본상 3관왕을 차지했고, 예매처 평점 9.9점으로, 대중과 평단을 모두 사로잡은 채 1년 만에 국립극장으로 돌아왔다.
직접 마주한 무대는 화려한 조명이나 무대장치가 없어도, 사람 냄새 하나만으로 극장을 꽉 채우고 있었다.
가시나, 가장 시작하기 좋은 나이
80년 평생 '가시나'라는 이유로 학교 문턱조차 밟지 못했던 이들에게 글은 단순한 소통의 도구가 아니다. 평생 가슴속에 묻어둔 속앓이를 툭툭 털어내게 해주는 고마운 친구다.
글을 배우며 할머니들은 각자의 트라우마를 치유한다. 딸만 셋 낳아 분하다며 지어진 이름 '이분한'을 비로소 자랑스럽게 부르게 되고, 글을 몰라 손자가 내민 동화책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웠던 할머니는 그 두려움을 극복한다. 가수가 꿈이었던 할머니는 노래자랑에 나서며 소녀 시절로 돌아간다.
특히 김인순 할머니가 첫사랑에게 배웠던 푸시킨의 시는 극을 관통하는 묵직한 메시지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화내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
"시는 정답이 없어요. 채점도 하지 않아요"라는 가을 선생님의 대사처럼, 할머니들은 일상 속에서 보물찾기하듯 시를 낚아 올린다. 낡은 몽당연필로 삐뚤빼뚤 써 내려간 이들의 시는 어떤 화려한 말보다 깊게 관객의 마음에 닿았다.
여든이 넘도록 글을 모른 채 여성이라는 굴레와 고단한 노동 속에서 살아온 이들에게, 삶은 참 모질었을 것이다. 남들이 학교에 갈 때 밭으로 향해야 했던 설움, 자식과 남편을 뒷바라지하느라 정작 자신은 지워야 했던 세월이 모두 그러했다. 하지만 할머니들은 모진 삶에 분노하는 대신 우직하게 견뎌냈고, 마침내 문해학교에서 인생의 진짜 즐거움을 스스로 되찾았다. 할머니들의 씩씩한 미소 위로 푸시킨의 시 구절은 책장을 넘어, 할머니들의 단단한 인생 그 자체로 증명된다.
"시는 정답이 없어요. 채점도 하지 않아요"라는 가을 선생님의 대사처럼, 할머니들은 일상 속에서 보물찾기하듯 시를 써 내려간다. 낡은 몽당연필로 삐뚤빼뚤 써 내려간 이들의 시는 어떤 화려한 미사여구보다 깊게 관객의 마음에 닿았다.
인생을 코미디처럼, 삶의 지혜
"인생이 별긴가? 이게 행복이지."
극 중 할머니들이 하던 말처럼, 무대 위 할머니들은 글만 늦게 배웠을 뿐 이미 삶의 진정한 행복을 아는 '성공한' 사람들이었다. 힘든 일이 닥쳐도 특유의 위트와 입담으로 툭툭 털어낸다. 흥이 오르면 벌떡 일어나 춤을 추고, 투덜거리면서도 서로를 알뜰히 챙긴다. 언성을 높이는 순간조차 그 기저에는 끈끈한 애정이 깔려 있다.
삶의 풍파를 온몸으로 맞으면서도 "웃으니까 행복해지지"라고 말하는 이들의 코미디는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다. 세월을 버텨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단단한 삶의 지혜다. 이들의 웃음은 억지스러운 긍정이 아니라, 지독한 노동과 현실을 견뎌낸 인간의 가장 강인한 생존 방식임을 보여준다.
팔복리로 떠나는 마음의 소풍
창작진의 의도는 이런 할머니들의 삶을 인위적으로 포장하지 않는 데 있었다.
오경택 연출은 "화려한 스펙터클이 아니라 사람 냄새 나는 소박하고 아기자기한 무대"를, 신선호 안무가는 "음악의 박자에 정확히 맞추기보다 노래의 감정에 충실한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지향했다. 그 결과 관객들은 마치 팔복리 마을에 직접 놀러 간 듯한 편안함을 느낀다.
80이 넘은 나이에도 "엄마가 보고 싶다"며 눈시울을 붉히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우리는 미처 알지 못했던 우리네 엄마, 그리고 할머니의 희생을 겹쳐 본다. 꿈도 공부도 포기한 채 가족을 위해 살아야 했던 세월은 슬프지만, 늦게라도 다시 꿈을 꾸는 그들의 도전은 깊은 존경을 자아낸다.
김하진 작가의 말처럼 "설렘이라는 감정이 노년을 풍요롭게 한다"는 것을 이 작품은 명확히 보여준다.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늦은 나이는 없다. "우리는 가시나, 가장 시작하기 좋은 나이"라고 외치는 이들의 합창이 극장을 나선 후에도 귓가에 맴돈다.
이번 주말, 가족의 손을 잡고 소풍 가듯 이 따뜻한 극장으로 향해보는 것은 어떨까. 신나게 웃고 울다 보면, 어느새 마음 한구석에 묵혀둔 짐 하나를 내려놓고 새로운 용기를 얻어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