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인간의 추악한 밑바닥과 인간의 빛나는 상상력을 동시에 볼 수 있어서다. 범죄라는 극단적 상황은 인간의 본성을 핍진하게 드러내는 장치가 된다. 그 상황의 개연성을 설계하고, 드러난 본성을 끝까지 추적하는 과정에서 작가의 상상력은 가장 치열하게 빛난다.
초여름의 길목에서 내가 고심 끝에 고른 세 권의 소설은 요란한 기교 대신 인간과 사회의 가장 깊고 검푸른 심연을 정직하게 낚아채는 작품들이다. 인류가 쌓아온 지식 전반을 관통하며 인간 종족 특성인 '잔학성'을 해부하는 소설부터, 평화롭고 잔잔한 나날들 아래 숨겨진 '애매한 악의와 정신적 학대'를 폭로하는 이야기, 그리고 막다른 골목에 갇힌 평범한 주부들이 '파멸의 거미줄'로 엮여 들어가는 지독한 역학 관계까지.
빛을 지워낸 눅눅하고 습한 장마철에, 장마가 끝난 다음 지루하게 이어지는 열대야에 읽기를 권한다.
어차피 잠들 수 없는 밤이라면, 잠들 수 없는 책과 보내는 편이 낫다.
다만 한 가지만 일러두겠다. 다음 날 중요한 일정이 있다면 첫 장을 넘기지 않는 것이 좋다. 마지막 장을 덮을 때는 이미 아침이 되어 있을 테니까.

1. 제노사이드 - 다카노 가즈아키
급사한 아버지가 남긴 한 통의 편지를 본 약학 대학원생 고가 겐토는 아버지가 몰래 연구를 하던 실험실에 대해 알게 된다. 그곳에 찾아간 겐토는 폐포 상피 세포 경화증이란 불치병의 치료제를 개발하는 어떤 프로그램을 발견하고 아버지가 편지에 남긴 내용에 따라 약을 개발하려 하지만 의문의 여성과 경찰이 겐토를 쫓기 시작한다.
한편 용병인 조너선 예거는 불치병 때문에 수명이 수개월밖에 남지 않은 아들 저스틴의 치료비를 위해 어떤 임무를 받아들인다. 내전 중인 콩고의 정글 지대로 가서 피그미족의 한 부족과 나이젤 피어스라는 인류학자를 없애라는 임무였다. 그러나 그 명령과 함께 이제까지 본 적이 없는 새로운 생물과 조우할 경우 그것 역시 제거하라고 하자 예거는 혼란스러워 하는데…….
"모든 생물 중에서 인간만 같은 종끼리 제노 사이드를 행하는 유일한 동물이기 때문이네. 이것이 사람이라는 생물의 정의야. 인간성이란 잔학성이란 말일세. 일찍이 지구상에 있던 다른 종류의 인류 원인이나 네안데르탈 인도, 현생인류에 의해 멸망되었다고 나는보고 있네."
"우리만 살아남게 된 것은 지성이 아니라 잔학성이 이겼기 때문이라는 말씀인가요?"
"그래, 뇌의 용적은 우리보다 네안데르탈인이 컸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현생인류가 다른 인류와의 공존을 바라지 않았다는 점 일세."
[제노사이드 472p]
여기 불손한 상상이 있다. 역사상 유래없는 최고의 지적 존재인 인간을 한낱 침팬지에 비유하는 그런 불편한 상상력이 있다.
그가 묻는다. 당신은 어떤 인간인가? 인문학적인 수수께끼에 다가가기 위한 준비는 아직 덜 되었다. 당혹스러울 뿐이다.
그가 다시 좀 더 쉽게 묻는다.
당신은 '진화적' 인간인가?
생소한 과학 전문용어들, 그리고 보다 더 생경한 전쟁의 민낯을 그려내는 처절한 묘사가 이어지면서 독자들은 전투력을 잃는다. 이 소설이 보여주기로 작정한 '미지의 것'에 군말 없이 따라가기로 결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조우하게 된 것은 무엇인가.
21세기 문명의 한가운데 에셜론으로 대표되는 빅브라더가 실현된 초고도 네트워크 사회에서 지구를 대표한다는 권력자들과 지성인들의 '예견된' 실패뿐이다. 이 시점에서 독자가 알 수 있는 것은 탁월한 지성, 위협적인 권력, 압도적인 경제력, 인간 사회에서 소위 '권위'나 '힘'으로 여겨졌던 것들을 무력화시키는 미지의 '움직임'이 있다는 것뿐이다.
나는 무력하다. 우리는 무력하다.
그저 이 낱개의 단어들, 이 상황의 파편들을 목격할 수 있을 뿐.
그러나 화자는 여기서 새롭게 피어나는 것들을 눈여겨본다. 독자들의 마음에 생겨나는 무수한 파문을 지켜본다. 그리고는 다시 악독하게 극한의 상황을 투척한다. 갓 열 번째 생일을 맞이한 소년병의 개죽음, 자본주의의 사생아인 민사군수시설 용병의 희생, 태어나자마자 죽어가야 하는 10만 희귀병 환자들의 고통,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을 비웃는 정신병에 걸린 지도자까지!
솔직히 이 책은 엄청나다. 내 인생책을 꼽으라고 한다면 이 책을 제일 먼저 떠올릴 정도이다.
인문학에 기반을 둔 일반도덕이나 철학, 언어학, 민족학, 사학 등에 대한 깊은 고찰은 물론이고 정치학, 프로파간다, 여론 선점에 관한 홍보학, 동시에 이야기의 핵인 약학과 의학, 진화론을 아우르는 과학사를 통찰력 있게 관통하는 등 인류가 쌓아온 지식 전반이 담겨 있다. 지독하리만큼 철저한 가즈아키의 자료 조사가 빛난다. 이 책은 '책'이 가져야 하는 미덕을 골고루 갖추고 있다. 게다가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인간됨'에 대한 성찰과 고뇌를 끊임없이 던짐으로써 활자의 세상에서 단지 '책'이 하기 어려운 일을 하려고 한다.
책을 덮으면서 나는 아키리와 엠마의 행복을 빌었다. 그렇게 해서 언젠가 생겨날 초인류의 'history'에 내가, 우리가, 쉼표 하나라도 남길 수 있기를 바라본다.
2. 언덕 중간의 집 - 가쿠타 미츠요
세 살배기 딸의 엄마이자 평범한 전업주부인 리사코는 우연히 어느 형사재판의 보충 재판원으로 선정된다. 리사코에게 배정된 사건은, 친모가 젖먹이 딸을 욕조에 빠뜨려 살해한 사건으로 재판이 진행될수록 리사코는 자신과 비슷한 환경에 놓인 그 여성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잊고 있었던 과거를 떠올리게 된다. 남편, 시어머니, 친정부모 등 그들이 왜 자신에게 그런 언행을 했는지 그 의미를 곱씹어 생각한 끝에 깨달음을 얻고 경악한다.
요 며칠간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필사적으로 맥주 캔을 숨기는 모습.
남편이 농담이라도 키친드링커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숨겨놓고 마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까 무쓰미가 했던 말과 비슷하다. 맥주를 마시는 극히 평범한 일이 부풀려져서 의미가 바뀌고 말았다.
어젯밤 캔을 싱크대 밑에 숨기던 자신을 떠올리자 두려워졌다. 아니 정확히는 그런 자신이 두려운 게 아니라 그런 행동을 하는 장면을 남편에게 들킬까 봐 두렵다. 아야카의 일과 마찬가지로 무슨 오해를 살지 모른다. 아야카는 시댁에 맡겨질 테고, 자신은 알코올 의존증 치료 센터에 끌려 갈지도 모른다.
관점을 조금 바꿨을 뿐인데 극히 평범했던 현상이 비틀리고 왜곡되어 다가온다. 그 두려움이 오늘 심리에서 느낀 감정과 비슷하게 여겨졌다.
[언덕 중간의 집 401p]
최근 읽었던 어느 스릴러, 어느 추리소설보다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책이었다.
평범하리만큼 담백한 문체와 단순한 플롯 안의 통찰력이 대단히 탁월해서 무심코 읽다가 소름이 끼치는 경우가 몇 번이나 있었다. 그리고 이런 감정은 아마도 이 책을 읽는 여성 독자라면 모두가 공감할 것임을 확신한다.
작가는 영리하다. 영리할 뿐만 아니라 집중력과 관찰력이 좋다. 표면적으로 한 가지 주제를 부각시키는 것을 자제하면서도 여러 가지 사건과 인물들을 자유자재로 부려 핵심 메시지를 차근차근 풀어간다. 여성이 커리어와 결혼을 양립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 학습된 모성애, 육아로 인한 여성의 경력단절, 독박육아와 산후우울증, 가정에서 벌어지는 정신적 폭력 — 가스라이팅 — 등 현대의 여성들이 직면하고 있는 주요한 문제들을 두루두루 짚어내면서 주제의식을 한 겹 한 겹 쌓아가는 동시에 미묘한 심리 변화를 남김없이 포착하여 입체적으로 그려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본인이 되지 않고서야 알 수 없는 '미묘한 불안감', '애매한 악의', '은근한 불편함'이 존재하는 '리사코'의 세계가 결코 먼나라 이야기가 아님을 우리는 알게 된다. 미즈호를 통해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는 리사코처럼 우리 역시 리사코를 통해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발견한다.
스스로 자기검열에 빠지게 만드는 누군가의 어떤 말들, 무언가 딱 잘라 말하기 힘든 불편감이 찝찝했던 상황들, 불쾌함의 원인을 찾을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던 날들, 사랑과 이해, 인내와 포용이라는 이름으로 억지로 삼켜야 했던 그 남자의 수많은 비상식들.
문제의식을 떠올리기에는 너무도 평화롭고 잔잔했던 나날.
그 단정하고 고요한 날들에 미즈호가 있었고, 리사코가 있었고, 내가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나는 머리를 얻어맞은 듯했다. 나 혼자서는 결코 이 위화감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이 소설은 어느 공포소설보다 실은 훨씬 더 공포스럽다. 일상에서, 연인 사이에서, 부부 사이에서, 더 나아가 이 사회에서 번번이 일어나고 있는 정신적 학대와 폭력을 무심하게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독자의 성별이나 나이에 따라 소설의 호불호가 많이 갈릴 듯하다. 아마 결혼과 출산을 모두 겪은 여성이라면 이 책을 덮고 나서 기립박수를 치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3. 아웃 - 기리노 나쓰오
도시락 공장에서 야간근무를 하는 네 여자가 있다. 구조조정으로 오래 다닌 직장에서 해고된 후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마사코, 없는 형편에도 빚을 내어 과소비를 하는 탐욕스러운 성정의 쿠니코, 자리보전한 시어머니와 딸, 손녀까지 부양해야 하는 고달픈 과부 요시에, 도박과 술집 여자에 미쳐 불성실해진 남편때문에 고민이 많은 야요이. 네 여자 모두 각자 힘겨운 삶을 견디고 있다.
그러던 어느날, 더이상 남편을 참아내지 못하게 된 야요이가 우발적 살인을 저지른다. 그녀는 늘 침착해 보이는 마사코에게 도움을 청하고, 마사코는 그녀를 돕기로 약속한다. 그러나 현 사회에서 살인을 완벽하게 은폐하고 한 남자의 시체를 처리하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 요시에와 쿠니코마저 이 일에 말려들고, 평범한 주부에 불과했던 네 여자는 잔혹하고 위험한 범죄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얘, 인간 땅에 떨어지는 거 금방이구나.” 요시에가 중얼거리자 마사코는 가엾다는 듯이 요시에를 봤다.
“그래, 다음은 브레이크 망가진 자전거가 비탈길 굴러가는 것 같은 거지.”
“아무도 멈출 수 없다는 말이니?”
“부딪치면 멈춰.”
자신들은 무엇에 부딪치는 걸까. 앞으로, 모퉁이 너머에 뭐가 기다리고 있는걸까. 요시에는 공포에 전율했다.
[아웃 232p]
저녁 늦게 알코올과 섞인 카페인 때문일까. 아니면 이 책 때문이었을까. 밤은 나에게 잠을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춥지 않은 방에서 웅크리고 앉아서 가끔 목덜미를 지나는 한기에 몸서리를 치면서 이 책을 삼켜나갔다. 그래 이것은 읽는다기보다 삼킨다. 혹은 삼켜진다. 라는 설명이 적당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아침이었다.
이 책은 미쳤다. 미친 사람들이 나오고 미친 일들이 벌어진다. 그리고 작가는 진짜 미쳤다!
나는 너무나 두려웠다. 이 작가는 살인자가 아닐까 하는 망상에 사로잡혔다. 어떻게 이렇게 쓸 수 있는 걸까? 이것은 사랑에 빠져본 사람만이 사랑에 대해서 가장 잘 서술할 수 있다는 그런 아주 당연한 얘기다.
그만큼 이 책은 무시무시했다. 너무나 깊고 검푸르고 찐득거리는 인간의 심리를 낚아채 살육하여 남김없이 해체해놓은 느낌이었다.
작가는 주요 인물들의 주변 인물, 장소 및 상황, 그들이 얽혀 있는 역학 관계, 심리와 인격, 행동거지와 외모, 심지어는 평판까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입체적으로 묘사하면서 글을 시작한다. 일면 불필요해 보이는 이것들은 글이 진행됨에 따라 서서히 하나의 퍼즐로 맞춰진다. 파멸이라는 퍼즐이다.
인물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가진 역학 관계에 의해 알게 모르게 영향받고 다시 영향을 되돌려주는 것이다. 여기에 바로 '아웃'의 무서움이 있다.
평범한 사람의 악의가 없는 최초의 우연적 범죄에 의해서 인간의 자기 파괴가 시작한다는 점과 공범이 있다는 점에서 '심플 플랜'과 비슷하긴 하다. 그러나 '심플 플랜'에서 등장했던 주요한 인물들이 다소 평면적이었으며 그 역학 관계에 대한 치밀한 구조 없이 산발적이었다는 점에서 '아웃'은 '심플 플랜'보다 열 배는 더 무섭다. 왜냐면 '아웃'의 세계에서는 보다 더 엉망으로 엉기어진 너와 나의 관계가 남김없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것은 상당한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이들은 단지 공범이 아니다. 너는 공범이라기보다 '인생'이라는 막다른 골목에 갇힌 또 다른 나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무섭다. 무섭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