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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뢰한 The Shameless (2014)
감독: 오승욱
출연: 김남길 (정재곤), 전도연 (김혜경), 박성웅 (박준길)
1. 동기
어디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까. 아니지, 어디까지 이야기를 해야 할까. '어디까지'에 대해서는 뒷부분을 쓰게 될 나에게 맡기고, 지금은 '어디부터'에 집중하겠다. 편안한 마음으로 글을 읽고 있을 여러분에게 다짜고짜 본론부터 들이밀면, 여러분은 혀를 내두르며 도망갈지도 모르니까. 그러다가 으슥하게 늦은 밤, 아직은 차가운 밤기운에 창문을 닫다 말고 읽다 만 이 글이 생각나서, 심호흡을 한번 하고 못 다 읽은 부분을 읽어 내리겠지. 그 다음 몇 번이고 곱씹게 될 것이다.
이 영화가 그렇다. 처음 보면 폭력적인 장면과 무례하게 쏟아지는 감정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 너무 버거워서 도망가고 싶은데, 입이 버석버석 말라가는 건조한 하루 끝에 불현듯 생각나고, 감정에 목이 말라 갈급한 날에 찾게 되다가, 영원히 곱씹게 되는 영화이다.
이 글은 영화 《무뢰한》에 대한 소개(영업)글이면서, 지난했던 내 연애사에 대한 에세이 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계획 밖의 사랑을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사람이, 이 영화 앞에서만 '취한다'"는 자전적 고백이다.
먼저는 그냥, 일반적이고 평범한 리뷰를 말쑥하게 썼었다.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무뢰한》에 대한 리뷰는 절대로 말쑥해서는 안된다. 아주 찐득하고, 비릿해서 고개를 돌리고 싶게 만들다가, 영원히 기억나게 해야 한다. 그렇게 술을 한잔 하고 와서 이 글을 고친다.
영화의 무엇이 그렇게 마음을 잡아끌었는가는 차차 말하겠지만, 짧게는 이렇다. 《무뢰한》은 홀연히 나타나서, 영원히 좋다. 몇 번을 다시 봐도 볼때마다 아름답고, 재미있고, 감동적인 영화는 많다. 하지만 《무뢰한》은 그런 영화들과 약간 다르다. 경험했던 감정이 아니라 살면서 단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감정, 앞으로도 경험하기 힘들 것 같던 감정이 단숨에 뼈속까지 파고드는 체험을 하게 한다.
체험을.
2. 본능
취하고 싶다는 말은 사실은 본능대로 굴고 싶다는 뜻이다. 슬플 때도 술을 찾고, 기쁠 때도 술을 찾는 이유는 이성이 보조하는 모든 행태를 거부하고, 감정이 부추기는 본능을 적확히 들여다보기를 원한다는, 본능이 추동하는 행태에 충실하고 싶다는 뜻이다.
그래서 《무뢰한》은 취하고 싶을 때, 또는 취했을 때 생각나는 영화다. 술에 취하면 본능에 솔직해진다. 솟구치는 것을 무시하지 않고 기꺼이 손을 잡게 된다. 이성과 본능을 횡단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술에 취하는 것이고, 《무뢰한》은 이성을 저버리고 본능으로 달려가는 영화다.
이성에는 두 가지가 있다. '타인에 의한 관찰'과 '자신이 수립한 원칙'.
타인이 나를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식, 그리고 과거의 경험과 미래의 계획이 오늘 나에게 부과하는 규율. 이 두 가지가 작동하는 동안 사람은 매끈하게, 분별 있게, 예의 바르게 산다. 술에 취하고 싶다는 말은, 이 두 가지를 무시하겠다는 말이다.
본능은 '타인에 의한 관찰'을 지우고 '타인에 대한 반응'만 남긴다. 본능은 ‘자신이 수립한 원칙’을 깔아뭉개고 ‘자신의 내밀한 충동’에 적극적으로 협력한다. 술에 취하고 싶다는 것은 그래서 사실은 타인에게 오롯이 반응하고 싶다는 선언이고, 껄끄러운 원칙을 매끄러운 충동으로 찢어발기고 싶다는 선전포고다.
이게 내가 《무뢰한》을 좋아하는 이유다. 나는 영특하게 태어났고 분별 있게 성장했다. 눈치를 너무 많이 보는 인간이 되었고, 원칙주의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술 취한 듯 사랑하고 싶었지만, 늘 맨정신으로 연애했다. 모두가 얼큰하게 취한 술자리에서, 달아오르는 정념에 휩쓸리지 못하고 우두커니 앉아 있던,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분위기를 맞추려고 애를 썼던, 그게 나다.
이 글의 후반부에서 다시 말하겠지만, 이 고백은 지금 슬쩍 흘려두는 편이 좋겠다. 영화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하니까. 그리고, 그래야 당신이 이 글을 다시 읽을 테니까.
3. 애인
"피해자 애인이 반듯하게 눕히고 이불을 덮어 줬습니다."
어느 하류인생, 반듯하다는 말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삶, 아까울 것도 없어 보이는 목숨이 거둬질 때 그 옆에 '애인'이 있었다. 피해자 '애인'은 상하의에 두서가 없는 복장을 하고, 산발을 한 채 시체 곁에 주저앉아 자기 애인의 죽음을 애도한다. 더러운 뒷골목에 신발도 신지 못하고 맨발로 드러누운 어떤 비참한 죽음은, '애인'의 눈물 끝에서 고귀해진다.
"미안하다, 혜경아. 황충남을 죽였다."
살인자는 '애인'을 만나러 갈 때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다듬는다. 살인자의 '애인' 혜경은 자기 애인이 살인을 고백하자, 한껏 절정에 다다라 숨이 가쁜 자기의 턱 끝을 그의 어깨에 묻는다. 말없이 머리칼을 쥔 손아귀를 바투 쥔다. 애절하게 사랑을 나누는 순간에 내뱉어지는 어떤 비정한 살인은, '애인'의 젖가슴 위에서 서정이 된다.
그리고 여기, '애인'이 없는 사람이 사건 현장으로 걸어가고 있다. 자신만만하고 의기양양한 뒷모습. 조금의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는 발걸음이 알려준다. 그가 '무뢰한'이라는 것을.
무뢰한이라는 단어는 거칠 것도, 두려울 것도 없는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무뢰한(無賴漢)이라는 단어에서 '뢰(賴)'는 의뢰(依賴)할 때의 그 '뢰'인데, 부탁한다는 뜻 외에도 의지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요즘은 '의뢰'를 부탁의 뜻으로만 쓰지만, 원래는 의지의 뜻이 먼저였다. 그러니까 무뢰한이란 부탁할 사람도 부탁받을 사람도 없어서 거칠 것 없는 사람이고, 의지할 사람도 자기를 의지하는 사람도 없어서 두려울 것 없는 사람이다.
부탁도 의지도 할 수 없는 사람은 죽일 수는 있어도 이길 수는 없다.
약점이 없으니까.
4. 약점
재곤: "일하다가 범죄자와 구분할 수 없게 되면 그걸로 형사는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선배: "너 착각하지 마. 내가 왜 너 사고 칠 때마다 빼내 주고 스폰서 해 주는 줄 알아? 내 새끼라서 그런 거야."
재곤은 형사로서 직업윤리가 투철한 사람이다. 자신의 과업을 충실하게 이행하기 위해서 불필요한 관계를 맺지 않는 인간이다. 비리를 저지르고 퇴직한 선배의 '내 새끼' 타령을 쓰게 주워삼키고, 이혼한 전처에게 쉽게 전화해서 어떤 감정도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입금 내역을 확인받는다. 모든 종류의 폭력에 익숙하고, 모든 관계에 얕은 것 같은 인간이 재곤이다. 한마디로 약점이 없는 인간이다.
영화는 박준길이 황충남을 왜 죽였는지 이유를 친절하게 설명한다. 박준길이 황충남을 죽인 이유는, 황충남이 박준길의 애인 김혜경을 협박했기 때문이다. 재곤은 이 사실을 듣는다. 관객도 듣는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알게 된다. 박준길이 살인이라는 범죄를 저지른 이유는 애인의 안녕 때문이라는 것을.
그때 나는 깨달았다. 모든 약점 있는 사람이 범죄자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범죄자에게는 반드시 약점이 있다. 약점은 범죄자의 필요조건이다. 그리고 재곤에게는 약점이 없다. 범인을 잡겠다는 직업윤리 아래에서 모든 가치와 염치는 짓밟힌다. 재곤은 편의점 도시락을 먹으면서 옆방의 교성을 아무렇지 않게 들을 만큼 비위 좋은 인간이고, 범죄자를 잡기 위해 여자의 음부에 발정제를 바르는 파렴치한이다. 모든 질서와 윤리 위에 '범인을 잡는다'는 목적이 있고, 그 과정에서 재곤을 붙드는 사람도, 원칙도, 망설임도 없다.
그 점에서 재곤이 자기 선배에게 쏘아 붙인 말이 떠오른다. 범죄자와 구분할 수 없게 되면 형사는 끝이다. 그런데 재곤은 자기 인생에, 자기가 형사라는 것 말고 다른 것은 없다. 다른 가치? 다른 관계? 다른 정체성? 없다.
그러니까 논리적으로, 재곤은 자기가 범죄자와 구분할 수 없어질 때, 자기 존재가 끝장난다는 것이다. 그러면 범죄란 무엇인가? 범죄를 법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형법 등 법률이 금지한 반사회적·부도덕한 행위 중 법적 처벌이 따르는 행위이다. 형식적으로는 구성요건에 해당성, 위법성, 책임성이 조각되지 아니한 행위로서 위법하여 유책한 행위를 의미하며, 실질적으로는 법익을 침해하여 사회 안전을 해치고, 반사회적이며 부도덕한 행위이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 모두가 안다. 이 모든 어려운 단어를 멀리 치워놓자. 사실 범죄자는 그냥 나쁜 사람이고, 나쁜 사람은 누군가를 아프게 한 사람이다.
혜경: "나, 영준씨 약점 알았어요. 이혼한 와이프죠?"
재곤: "내 약점이 한두 개여야 말이지."
혜경: "왜 영준씨가 그 돈을 줘요?"
재곤: "혜경씨가 내 약점이니까."
혜경: "영준씨, 나 좋아하는구나."
재곤: “준길이하고 같이 갈꺼야? 준길이 돈 줘서 보내 버리고 나랑 같이 살면 안될까?”
혜경: “진심이야?”
재곤: “그걸 믿냐?”
처음으로, 재곤이 망설인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언어로 표현된 사랑 고백은 거짓과 진실, 배신과 배신 사이에서 짓이겨져 쓰디쓴 맛을 낸다. 사랑하는 이의 존재가 유일한 약점이 되는 세계. 그런 세계에서 금방이라도 사랑에 빠질 것 같은 위태로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위태로움이 자아내는, 다른 어떤 종류의 사랑도 이르지 못한 아름다움.
이때 모두가 깨닫는다. 약점, 범죄, 사랑.
약점이 생긴 사람과 범죄를 저지른 사람과 그때 거기서 피어난 사랑을. 너무 피폐해서 알은체 하고 싶지도 않은 너무나 적나라한 감정을 무자비하게 목격하게 한다. 술을 마시지 않고서는 받아내기도 힘든.
5. 붕괴
이렇게, 영화는 가만하게 살아가던 나와 당신이 전락하도록 돕는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인생과 바닥을 절절하게 체험하도록 돕는다. 그게 누아르라는 장르의 문법이기도 하다. 누아르는 사랑을 극단으로 밀어붙여야만 보이는 어떤 진실을 다루는 장르니까. 그렇다고 실제 삶에서 사랑이 매번 그렇게 극적인 붕괴여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이 영화가 보여주는 건, 의지할 곳이 생긴다는 것 자체가 이미 작은 붕괴를 포함한다는 사실이다. 賴라는 글자가 의지와 부탁을 동시에 품듯이. 누군가에게 의지한다는 건 이미 자기 일부를 내어주는 일이고, 그 내어줌이 작든 크든 어떤 형태의 무너짐이다.
그러니까 사랑이 꼭 '모든 것의 파괴'여야만 사랑인 건 아니다. 다만 사랑은 어떤 격이든 한 번은 흔들어 놓는다. 흔들리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한 문장으로 말하면 이렇다.
붕괴할 가능성을 허용하지 않는 관계는 사랑이 아니다.
6. 회피
이 명제를 뒤집으면 결론이 나온다. 요즘 유행하는 사랑의 유형, 관계의 유형 중에서 '회피'라고 불리는 그 유형이, 사실은 사랑에 가장 취약한 유형이라는 결론. 회피형은 사랑을 안 하는 사람이 아니다. 사랑이 오면 가장 크게 무너지는 사람이다.
재곤을 다시 보면 그렇다. 그는 관계를 안 맺는 사람이 아니라, 관계를 맺을 수 없도록 자기를 설계해 놓은 사람이다. 선배의 "내 새끼" 소리에도 끝내 마음을 주지 않고, 옆방의 교성을 들으면서 도시락을 비우는 사람. 그렇게 살아온 사람의 방어막은 두꺼워 보이지만, 사실은 한 번도 시험받은 적이 없어서 두꺼워 보이는 것이다. 시험받은 적 없는 단단함은 진짜 단단함이 아니다. 그래서 혜경 한 사람이 들어왔을 때, 그 방어막은 단계적으로 무너지지 않고 통째로 무너진다. 칼에 찔리고도 실실 웃을 정도로.
회피의 역설이 여기 있다. 흔히 회피형을 '사랑을 못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영화가 보여주는 건 그 반대다. 회피는 사랑에 대한 면역이 아니라, 사랑에 대한 무방비다.평소에 작은 의지(賴)들 - 친구에게 약한 소리 하기, 가족에게 기대기, 동료에게 부탁하기 - 을 연습해 온 사람은 사랑이 와도 그것이 자기 인생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는다. 이미 의지하는 근육이 있으니까. 그런데 회피형은 그 근육을 한 번도 안 써본 사람이라, 사랑이 오면 그것 하나에 인생 전체의 무게가 실린다. 의지할 곳이 단 하나뿐이면, 그 하나가 곧 약점의 전부가 된다. 혜경이 재곤의 유일한 약점이 되어버린 것처럼.
그러니까 회피는 사랑으로부터 자기를 지키는 전략이 아니라, 사랑이 왔을 때 가장 비싸게 치르는 방식이다. 평소에 賴를 연습하지 않은 사람이 한 번에 모든 賴를 한 사람에게 거는 일이니까.
여기서 흘려둔 고백을 다시 꺼내야겠다. 나는 술 취한 듯 사랑하고 싶었지만 늘 맨정신으로 연애했다고 썼다. 그건 다른 말로 하면, 나는 거의 무뢰한이나 마찬가지로 예의 바른 사랑을 해왔다는 뜻이다. 약점을 내어주지 않았고, 의지할 곳을 만들지 않았고, 붕괴의 가능성을 허용하지 않았다. 분별 있게, 매끄럽게, 원칙적으로.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알았다. 그건 사랑을 잘하는 방식이 아니라, 사랑을 가장 비싸게 치르는 방식을 예약해 두는 일이었다는 걸. 평생 賴를 연습하지 않은 사람의 첫 賴가 어떤 모습인지, 이 영화가 너무 잘 보여주니까.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술을 마시지 않고서는 도저히 볼 수 없다.
7. 배신
재곤이 박준길을 죽였을 때, 혜경이 무너지듯 범죄자의 시체에 몸을 포갰을 때, 그때 재곤은 자신의 사랑을 한 번 더 확인한다. 범죄자와 구분할 수 없는 자기가 되었으니까. 공적인 죽음이 아니라 사적인 죽음이었다. 재곤은 그날, 자기의 정체성이 죽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재곤은 끝까지 자기 직업으로 돌아가기를 원한다. 그래야 살 수 있다. "내 이름은 정재곤입니다. 지금 이 남자는 향정신성 약품 위반 관리 혐의로 체포되는 겁니다." 사실(fact)의 세계, 법령과 절차의 세계로 자기를 다시 소개한다.
나는 형사고, 너는 범죄자 애인이고, 나는 내 일을 한 거지, 너를 배신한 게 아니다.
재곤은 거의 주문이라도 외우듯이 혜경에게 모든 사실(fact)을 전달한다. 객관적인 세계의 원칙에 의탁하는 것은 혜경에게 오히려 가장 잔인한 배신이다.
"나쁜 새끼."
결국 혜경은 재곤에게 안기듯, 배에 칼을 찔러 넣는다. 모든 것을 잃고 삶의 하수구에 처박혀 자존심밖에 남지 않은 여자가, 죽여버리고 싶을 만큼 사랑하는 남자에게 안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싫은 것, 두려운 것, 아픈 것을 한꺼번에 없애버리는 방법.
그런데 칼을 맞은 재곤은 쓰러지지 않는다. 홀로 도심을 계속 계속 걸어간다. 실실 웃으면서. 미친놈처럼. 혜경에게 칼을 맞았다는 것 자체가, 그리고 그것을 음미하면서 걸어가는 것 자체가, 감독이 사랑에 대해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이다. 평생 처음으로 의지한 사람이 자기에게 박은 칼날. 그 칼끝이 무뢰한이 처음으로 무뢰(無賴)에서 벗어나는 순간이다. 약점이 없던 자가 마침내 약점을 가졌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 웃는지 우는지 모르는 표정으로 한참이나 칼을 부둥켜안고 재곤은 칼의 감각을 오롯이 즐긴다. 그러다 내뱉는다.
"새해에는 복 많이 받아라, 씨발년아."
8. 무제
이 영화의 영어 포스터에는 한 줄이 적혀 있다. Love was not in the plan.
사랑은 계획에 없었다. 재곤의 계획에 사랑은 없었다. 그의 계획은 박준길을 잡는 것이었고, 김혜경은 거기에 이르는 도구였다. 약점 없는 사람으로 자기를 설계해 온 평생의 계획에 사랑이 들어올 자리는 없었다. 그런데 사랑은 계획에 없는 자리에서 온다. 원래 그렇다. 계획 안에 자리를 만들어 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일정이다. 계획을 망가뜨리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거래다. 사랑은 늘 계획에 없는 곳으로 와서, 계획을 부순다.
그래서 술이 필요한 것이다. 맨정신의 계획표 위에서는 사랑이 들어올 틈이 없으니까. 술은 계획을 잠시 지운다. 술은 賴를 연습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잠시 賴의 자리를 내어준다. 이 글의 처음에 나는 《무뢰한》이 술 취해서 보고 싶은 영화라고 썼다. 이제 그 이유를 정확히 말할 수 있다. 이 영화는 계획 바깥에서 오는 사랑에 대한 영화이고, 우리는 계획 바깥의 것을 맨정신으로는 잘 못 보기 때문이다. 무서우니까.
그리고 조금 더 얼큰히 취한 내가 고백하자면, 나는 아주 여러번의 배신을 경험했다. 배신의 범주를 어디까지로 해야할지는 모르겠으나, 도무지 내 인생에 의지 할 곳이 있기나 한 것일까. 내 인생에 연애는 회한과 회의와 회고를 오가는 작업이었다. 이렇게 배신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여러가지 서사를 제공한다. 그 점에서 내 연인들에게 감사하고 있다.
그러나 술 한 잔이, 영화 한 편이, 우리가 평생 회피해 온 賴의 자리를 잠깐 열어 보여준다. 거기 무엇이 있는지. 거기서 무엇이 시작되고 무엇이 끝나는지. 그러니 오늘 밤, 술이 한 잔 들어가거든 이 영화를 다시 틀어 보길 권한다.
그리고 자기 인생의 계획표를 한 번쯤 들여다보길. 거기에 사랑이 들어올 자리가 남아 있는지. 아니면 너무 빈틈없이 채워져서, 사랑이 와도 들어오지 못하고 문 앞에서 발길을 돌리고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