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

친절한 금자씨

박찬욱(2005)

    

 

그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을 만큼 뛰어난 미모의 소유자인 '금자'(이영애)는 스무 살에 죄를 짓고 감옥에 가게 된다. 어린 나이, 너무나 아름다운 외모로 인해 검거되는 순간에도 언론에 유명세를 치른다. 13년 동안 교도소에 복역하면서 누구보다 성실하고 모범적인 수감생활을 보내는 금자. '친절한 금자씨'라는 말도 교도소에서마저 유명세를 떨치던 그녀에게 사람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그녀는 자신의 주변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열심히 도와주며 13년간의 복역생활을 무사히 마친다. 출소하는 순간, 금자는 그 동안 자신이 치밀하게 준비해온 복수 계획을 펼쳐 보인다. 그녀가 복수하려는 인물은 자신을 죄인으로 만든 백선생(최민식). 교도소 생활 동안 그녀가 친절을 베풀며 도왔던 동료들은 이제 다양한 방법으로 금자의 복수를 돕는다. 이금자와 백선생. 과연 13년 전 둘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고, 복수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이 복수의 끝은 어떻게 될 것인가.

 

 

 

1. 낯설게 보기



‘낯설게 보기’, 즉 데페이즈망(dépaysement)이라고 불리는 예술 기법이 있습니다. 일상적이고 낯익은 대상을 본래의 자리에서 떼어내어 낯선 자리에 놓는 방법인데요. 보는 사람에게 단순한 신선함을 넘어 무의식의 자리를 잠시 흔들어놓는 효과를 발생시키는 기법입니다. 이렇게 무심코 지나치던 일상적인 대상이 갑자기 낯선 시선의 영역으로 옮겨질 때, 예술은 미와 쾌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줍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기호학 역시 같은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기호학은 우리가 ‘원래 그런 것’이라고 믿어 온 의미들을 한 번 더 의심하게 만들면서, 현실에 또 하나의 차원을 열어 보여줍니다.


생각해보세요. 이 세상의 모든 웨딩드레스가 흰색인 이유는 뭘까요? 빨간 색의 웨딩드레스는 왜 없을까요? 그것은 흰색의 웨딩드레스는 순수하고 고결한 신부를 연출하기 위한, 역사적으로 약속된 일종의 문화 코드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기호학은 평범한 것을 “원래 그런 것”으로 보지 않고, “왜 우리는 이것을 이렇게 읽게 되었을까?”라고 묻게 만드는 방식입니다.


문제는 ‘자연스러움’이라는 감각이 너무나 강력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자연스러움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과정에는 좀처럼 문제의식이 끼어들지 않습니다. 원래 그러하던 것처럼 흘러가게 두어도 당장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을 부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쪽이 모난 시선으로 여겨지고, 모난 것은 늘 정 맞게 되어 있죠.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자연스러우면 안 될 것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상황에서조차,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정확히 무엇이, 왜 부자연스러운지를 끝내 짚어내지 못합니다. 그 결과 우리는 자기 세계를 구성하는 의미와 해석의 주체성을 조용히 빼앗기게 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기호학적 시선의 의의가 생깁니다. 기호학은 ‘문제적 자연스러움’이라고 부를 만한 그 모든 기호와 코드들을 낯선 시선의 영역으로 끌어내어, 그들의 비자연적인 속성을 폭로해줍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을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바꾸어내면서 자기 세계의 주체성을 회복하는 일, 그것이 바로 기호의 기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은 기호라는 메스로 박찬욱의 복수 3부작 중, 마지막 복수 <친절한 금자씨>를 낱낱히 파헤쳐 보려고 합니다.




2.1 예쁘고, 불친절한 영화



평범한 사람들은 살면서 ‘복수’라는 것을 할 기회가 별로 없습니다. 복수는 언제나 고통과 나락에서부터 시작되니까, 그 자체로 매우 극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평범한 사람들은 오히려 복수를 동경하곤 합니다. 막연한 동경은 상상을 낳고, 상상은 이야기를 낳는 법이니까요.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로 셀 수 없이 많은 복수에 관한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만들어진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는 그 수많은 복수 서사 가운데서도 유독 인상적으로 남는 작품입니다. 이 영화가 복수 서사라는 익숙한 장르적 틀을 취하고 있고, 강렬한 미장센과 스타일리시한 연출을 무기로 삼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정작 관객에게는 ‘친절하지 않은’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친절한 금자씨>는, 예쁘고, 불친절한 영화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습니다. ‘예쁘다’라는 표현이 이 영화 안에서는 단순한 인상 평가가 아니라는 점 입니다. '예쁨'은 인물의 외모와 행동, 심지어 살인 도구의 형상에까지 반복적으로 부여되는 일종의 마스터 기호처럼 작동합니다. 금자는 끔찍한 죄로 수감되었지만 ‘예쁜 살인자’로 호명되고, 교도소 안에서도 ‘예쁘게’ 행동하고, 출소 후에는 ‘예쁘게’ 단장한 채 복수에 나섭니다. 심지어 그녀는 백선생을 죽일 총을 주문하면서, 그것이 반드시 ‘예뻐야 한다’고 요구하기까지 합니다.

 

어떤가요?


이제,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여러분이 그동안 봤던 <친절한 금자씨>가 어떤 영화였다는 생각이 드시나요?


 

 

2.2 제1구간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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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오프닝은 손과 칼, 백색의 밀가루를 적시는 새빨간 시럽을 클로즈업한 화면으로 시작합니다. 관객은 이 장면을 보면서 ‘피’를 떠올립니다. 새빨간 시럽이 피가 가진 색과 질감의 속성을 재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빨간 시럽은 피를 가리키는 표상체로서, 영화 곳곳에 등장할 폭력적 혈흔의 자국들과 밀접성을 갖게 됩니다. 또 여인의 눈에 흐르는 눈물로 오프닝이 끝나면서, 피와 같은 시럽·눈물·빨강 등의 계열체가 ‘비극의 암시’라는 통합체로 조직됩니다. 영화는 자신이 다룰 사건이 결코 단정한 사건이 아닐 것임을, 화면의 첫 번째 어휘소들로 미리 알려두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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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시작은 이금자의 출소입니다. 마중 나온 전도사가 두부를 내밀고, 금자는 그 두부를 땅에 떨어뜨립니다. 그런데 정작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것은 두부가 아니라 심벌즈입니다. 여기서 ‘두부’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 출소자에게 건네지는 관습적인 상징기호입니다. 출소할 때의 두부는 “지난 시간을 통해 죄를 속죄하고, 두부처럼 흰 새 인생을 살아가라”는 의미를 압축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도사가 내민 두부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새 출발’이라는 사회적 코드를 직접 가리키는 기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곧 그 코드를 거절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금자가 “너나 잘하세요”라고 말하며 두부를 떨어뜨리는 순간, 그녀는 단순히 종교적 호의를 거절한 것이 아니라, ‘속죄 → 새 인생’이라는 사회가 마련해 둔 회복의 시나리오 그 자체를 거부한 셈입니다.


그런데 이 거절의 무게는 두부 하나의 추락만으로는 충분히 표현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화는 ‘바닥에 떨어진 두부’ 대신 ‘쾅!! 하면서 바닥에 떨어진 심벌즈’를 화면에 배치합니다. 두부 하나만으로는 표현되기 어려웠던 충격의 크기와 성가대의 표정 변화가 한 번에 환기되고, 두 사건이 ‘추락’이라는 동일한 연접 관계로 묶이면서 인과관계 또한 명확해집니다. 영화 후반부에서 ‘아이가 의자에서 추락하는 장면’ 뒤에 곧바로 ‘할머니가 의자에서 추락하는 장면’으로 대체되는 양식 역시 같은 어휘소적 대체의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출소한 금자와의 대면을 계기로, 전도사는 금자와의 만남을 회상합니다. 금자는 아이를 유괴하고 살해한 죄로 수감되었던 인물입니다. 그런데 너무도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을 뿐 아니라, 교도소 안에서는 그 누구보다 종교에 독실했고 모범적인 죄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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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금자는 교도소 동기 ① 김양희(1998~2002 복역)의 도움으로 거처를 얻습니다. 그런데 이 공간은 기호학적으로 상당히 의미심장합니다. ‘집’은 일반적으로 아늑함과 편안함을 의미하는 도상적 기호입니다. 그러나 금자의 집을 구성하는 조형적 요소들은 그 도상적 의미와 정면으로 대립합니다. ‘색’의 차원에서 공간은 절망과 불안을 상징하는 검정 바탕에 거무죽죽한 빨강이 가득하고, ‘형태’의 차원에서는 마치 뿔처럼 기괴하게 꺾인 곡선과 분리된 도형들이 자리하고 있으며, ‘빛’의 차원에서는 실내를 비추는 자연광이 거의 없고 촛불과 등 같은 인공광만이 공간을 지탱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조형적 기호들이 도상적 기호로서의 ‘집’의 의미를 해체하면서, 금자가 그 어디에서도 안식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좌우로 펼쳐진 3단 거울은, 과거 3단 구성 회화들이 제단의 역할을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제단으로 기능하고, 흰옷을 차려입고 머리를 정갈하게 묶은 금자는 마치 목회자처럼 그 앞에 섭니다. 

 

즉, 이 집은 끝나지 않을 절망과 불안의 공간이자, 금자가 자기 영혼의 구원을 빌며 제의를 행하는 상징적인 공간으로 재구성되는 것입니다. 외관상 단정하고 정갈한 ‘예쁜’ 집의 구도 안에, 사실은 구원받지 못한 자의 제단이 차려져 있는 셈입니다. 



(2)

이튿날 금자는 자신이 유괴에 가담했던 아이 원모의 부모를 찾아가 용서를 구하면서, 칼로 자기 손가락을 자릅니다. 이 영화를 구성하는 특징적인 기호 가운데 하나가 바로 폭력에 대한 지표기호입니다. 영화는 직접적인 폭력의 장면을 보여주기보다, 절단된 신체나 혈흔, 멍자국처럼 폭력과 상해의 인과관계를 드러내는 지표기호를 곳곳에 배치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폭력이 자행된 영역은 화면 바깥의 상상 속에서 재구성되고, 관객은 ‘본 적도 없는 폭력’을 자신의 머릿속에서 한 번 더 겪게 됩니다. 그래서 그 충격은 오히려 직접적인 묘사보다 더 깊이 각인됩니다.



(3)

잘린 손가락을 봉합하고 다음 날, 금자는 빵집 ‘나루세’에 첫 출근을 합니다. 그곳에서 근식을 만나지요. 그리고 출소한 교도소 동기들을 차례로 찾아가면서, 금자의 과거 교도소 생활이 하나둘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② 우소영(1990~1996)에게는 신장을 떼어주고, ③ 고선숙(1967~1991)의 치매 간병을 도맡아 하며, ④ 오수희(1993~1994)를 괴롭히던 마녀를 뇌진탕에 걸리게도 합니다. 그리고 현재로 돌아오면, 과거에 금자가 도왔던 사람들은 모두 금자의 복수의 조력자가 되어 있습니다. 우소영에게서는 총기 제작을, 고선숙에게서는 총의 설계도를, 오수희에게서는 총기 장신구를 받은 금자는 백선생을 향한 복수에 한 발 한 발 다가가게 됩니다.


기호는 언제나 체계 속의 ‘차이’에서 의미를 드러냅니다. 이 관점을 적용해 보면, 교도소에는 여러 인물이 등장하고 복잡다단한 관계를 맺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단순한 차이를 통해 명확하게 분리됩니다. 즉, 그들이 함께 존재했던 교도소라는 공간의 외시의미는 모두에게 똑같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의 행위로 인해 교도소의 공시의미가 개인적으로 달라지면서, 행복과 불행이라는 상태가 나뉘게 됩니다. 바로 이 차이로 인해 금자와 다른 교도소 동기들이 대비되는 것입니다.


뒤에서 다시 설명하겠지만, 금자는 교도소에서도 사람을 죽였습니다. 모두가 ‘마녀’라고 부르던 절대적인 악의 존재를 물리쳤지요. 그러나 이것은 결국 금자에게 교도소가 ‘살인이라는 새로운 죄악이 발생한 참혹한 공간’으로 변했다는 의미가 됩니다. 복수를 위한 발걸음에 죄악은 점점 더 커지고, 금자는 여전히 불행한 상태에 머무릅니다. 반면 교도소의 동기들은 각자의 삶에 기틀도 잡히고, 제법 잘 살고 있는 듯 보입니다. 마치 언제 죄를 지었냐는 듯이 행복해 보이는데, 그것은 그들이 감옥에서 말끔히 죄를 씻어내고 나왔기 때문일까요? 


그들은 '속죄'했기 때문에 행복한 걸까요?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습니다. 금자를 제외한 동기들은 사실상 금자의 살인을 ‘방관’했다는 점입니다. 금자가 마녀에게 3년 동안 락스를 먹이는 동안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지켜봤을 뿐입니다. 그런데 매일 조금씩 살인이 일어나는 동안 그 누구도 죄의식을 갖지 않았습니다. 죽어 마땅한 인간이 죽었다고, 또 자신의 손이 직접 더럽혀지지는 않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은 금자가 ‘자신이 원모의 유괴를 돕고 그의 죽음을 방관한 것’을 죄로 여기며 죄책감에 시달리는 모습과는 사뭇 대비됩니다. 즉, 죄의 방관자들 역시 그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이고, 진실로 행복해질 수 있는 존재도 아닌데, 정작 본인들은 그 죄를 의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속죄'한 적 없다는 것입니다.



(4)

나루세에서 과거 자신의 사건을 담당했던 형사와 재회한 금자, 그리고 다시 과거 장면이 등장합니다. 금자의 범죄와 심문 과정을 보여주면서, 형사가 금자의 가짜 자백에 동참했다는 사실을 보여주지요.


그런데 이때 문맥의 동위성을 반복적으로 파괴하는 위트가 등장합니다. 문맥상 형사의 부인은 케이크를 사 가지고 가는 중입니다. 그런데 금자와 아는 체를 하는 남편의 모습에, 그녀에 대해 묻습니다. 근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낯선 남자의 존재에 대해 묻습니다. 이들의 대화는 마치 한 곳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지지만, 사실은 문맥의 동위성이 반복적으로 파괴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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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 캡처 2026-05-14 030853.png

 

 

형사와 부인의 대화에서 등장한 “누구냐”는 질문에, 금자와 근식의 대화가 답으로 배치됩니다. 또 금자와 근식의 대화에서 금자의 범행 사실을 듣게 된 형사의 부인은 기함합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에 금자가 “걱정 마, 먹진 않았으니까”라고 말하자, 형사의 부인은 “어떻게 먹어! 사람 죽인 손으로 만든 거를!”이라고 소리칩니다. 이때 선택된 두 가지 분류소의 핵의소는 ‘먹다’로 같습니다. 그런데 금자의 ‘먹진 않았다’는 말은 ‘인간을 먹다’라는 뜻으로, 매우 비정상적인 상황입니다. 반면 형사 부인의 ‘어떻게 먹느냐’는 ‘케이크를 먹다’라는 뜻으로, 일상적인 상황입니다. 이렇게 비일상적이고 비정상적인 상황과 정상적인 상황이 나란히 배치되면서, 문맥의 동위성이 파괴됩니다. 


관객은 이 말장난에 저항없이 웃다가, 순간 섬뜩함을 느끼게 됩니다.



(5)

입양된 딸 제니의 행방을 찾는 금자. 규정상 세부 정보를 알려줄 수 없다는 입양센터의 답변에, 금자는 저녁까지 기다리다가 창문을 부수고 들어가 제니의 현재 주소를 알아냅니다. 여기서 19살의 금자가 왜 백한상의 범죄에 가담해야 했는지가 드러납니다. 그녀는 미혼모가 되었고, 의지할 곳이 없어지자 교생실습에서 만났던 백한상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입니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금자는 딸 제니에게 편지를 쓰고 그녀를 찾아 호주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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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과정에서 우리는 언어 텍스트의 중계(relay) 기능을 볼 수 있습니다. 금자가 제니에게 편지를 쓰면서 사전을 찾는 장면은, 금자와 제니 사이에 존재하는 언어의 장벽을 여실히 드러냅니다. 이미지(둘은 매개물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의사를 전달할 수 있음)와 언어 텍스트(호주에 입양된 딸 제니가 금자의 아이다)가 교대로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언어적 메시지는 금자가 제니에게 하고 싶은 말을 직접 전달하면서 소통을 시도하고 있음을 알려주고요, 이미지는 금자와 제니의 모국어가 다르다는 점을 부각시키면서 소통을 단절시킵니다. 


즉, 이 영화에서 금자는 자신의 하나뿐인 혈육과 소통하지 못하고, 금자가 놓인 상황의 비극성이 한층 부각됩니다. 



(6)

딱 한 번만 제니를 만나보고 돌아오려고 했던 금자는, 한국에 데려가 달라며 자해를 시도한 제니를 말리지 못하고 결국 함께 한국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부탁했던 총을 건네받은 금자는 본격적인 복수를 시작합니다. 제니와 근식과 함께 강아지를 사서, 복수의 무대가 될 폐교로 갑니다. 그곳에서 총기를 시험하기 위해 강아지에게 총부리를 들이대는 금자, 총소리가 울리는 순간 금자는 나동그라지고, 화면은 백선생의 학원으로 전환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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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금자가 폐교에서 살인을 연습하면서 백선생의 대체물로 ‘개’를 선택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개로 대체된 백선생은 영화 앞부분에서도 한 번 등장합니다. 잠든 금자의 상상 속에서, 백선생은 덫에 묶인 개가 되고, 반항 한 번 못 해본 채 금자의 총에 맞아 죽습니다. 그 속에서 금자는 조금의 고민이나 망설임도 없이 백선생의 얼굴을 한 개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고, 행복한 듯 웃습니다. 또 개의 이미지와 백선생의 이미지가 임의로 전환되는데, 우리는 그것이 결코 임의적이지 않고 의도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개는 금자가 증오하는 백선생을 대상체로 하는 표상체입니다. 수용자는 이것을 해석체로 재구성할 때, 개의 여러 분류소를 백선생에게 대입할 수 있게 됩니다. 예컨대 ‘개’는 동물이라는 핵심의소를 기준으로 ‘개같다’는 비하의 의소나, ‘권력자의 개’로 쓰이는 순종성의 의소까지 떠올리게 하지요. 그러므로 개는 금자가 자기 의식 속에서 백선생과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기호인 셈입니다. 금자는 백선생을 자기 앞에 무릎꿇리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7)

그러나 전환된 화면 속의 백선생은 너무도 잘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복수는 그의 가장 가까운 곳까지 이미 도달해있습니다. 그의 아내 ⑤ 박이정(1998~1999) 역시 ‘마녀’의 죽음을 매개로 금자에게 빚을 지고 있는 인물이고, 복수의 조력자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이 다시 한번 회상을 통해 드러납니다. 이정은 백선생의 밥에 수면제를 타고 외출함으로써, 금자가 그를 잡으러 올 길을 열어 줍니다. 그런데 백선생을 찾아온 전도사가 이정과 금자의 공모 사실을 백선생에게 전달해 버리고, 위기를 직감한 백선생은 해결사들을 부르게 됩니다. 여기까지가 러닝타임 1시간 0분에 이르는 제1구간입니다.


이 제1구간을 ‘예쁨’이라는 키워드로 다시 정리해 보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영화는 ‘예쁜 외모의 살인자’를 화면 한가운데에 호명하고, ‘예쁘게 행동하는 모범수’의 과거를 회상으로 끼워 넣고, ‘예쁘게 단장한 출소자’의 현재를 자연스럽게 배열합니다. 그런데 같은 화면 안에서 폭력은 지표기호로, 죄책감은 떨어진 두부와 잘린 손가락으로, 안식의 공간은 제단의 형태로 변형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1구간은 ‘예쁨’이라는 표면이 가장 완강하게 작동하는 동시에, 그 표면을 조용히 균열시키는 기호들이 가장 촘촘하게 배치된 구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3 제2구간 01:00:00



정확히 러닝타임 1시간이 흐른 뒤, 골목의 조명이 일제히 꺼집니다. 그리고 이 순간을 기점으로 영화의 화면은 서서히 채도를 잃기 시작합니다. 후반부에 이르면 거의 흑백에 가까운 균일한 회색 톤으로 화면이 통일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색이 빠져나가는 것과 동시에, 그동안 일방향으로 진행되던 금자의 복수는 백선생 쪽의 대응이 가세하면서 쌍방향으로 바뀌고, 이야기는 점점 파국으로 치닫습니다. 조형적 기호의 차원에서 보면, 폭력이 격화되는 시점에 오히려 빛과 색의 기호는 최소화됩니다. 화면이 비워질수록 관객은 자신을 옥죄는 듯한 압박감을 받게 되고, 결국 파괴적인 행위에 더 집중하게 됩니다. 또 제1구간에서 빈번하게 등장했던 환상이나 나레이션 같은 ‘제작자의 적극적 개입’의 흔적은 제2구간으로 갈수록 거의 사라지고, 급격하게 리얼리티를 살린 연출이 자리 잡습니다. 



(1)

금자를 찾아온 해결사들은 그녀를 마구잡이로 폭행하고, 박이정은 백선생에게 포박당합니다. 복수가 완전히 실패했다고 생각되던 그때, 백선생은 수면제에 취해 잠이 들고, 금자는 해결사들을 죽이고 제니와 함께 탈출하게 됩니다. 그리고 드디어 재회하게 된 백선생과 금자. 금자는 백선생을 묶어 폐교로 데려갑니다. 그곳에서 금자는 백선생의 통역을 빌려, 제니에게 자신과 헤어져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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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에서 ‘속죄’를 둘러싼 두 개의 코드가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제니의 세계에서 용서와 속죄란, ‘미안하다’라는 진심 어린 말로 가능한 것입니다. 영화 속에서 제니는 금자에게 “미안하다”고 말할 것을 반복적으로 요구하고, 금자가 “나는 아이를 죽인 죄인”이라고 고백할 때조차 “내가 그 애 엄마한테 미안하다고 대신 말해줄까?”라고 대답합니다. 죄가 얕으면 미안하다는 말을 적게, 죄가 깊으면 미안하다는 말을 많이 함으로써 속죄가 가능하다는, 일종의 ‘제니의 코드’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금자에게 속죄는 어떤가요? 그녀에게 속죄는 수십 통의 촛불을 켜고 끄면서 기도해도 결코 닿을 수 없는 것이고, 그녀가 용서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손에 피를 묻혀야만 합니다. 


제니의 ‘예쁜 속죄’와 금자의 ‘피의 속죄’가 한 장면에 나란히 놓일 때, 금자가 속죄에 이르는 길은 더욱 멀어 보입니다.



(2)

제니를 보낸 뒤, 금자는 백선생과 폐교에 남아 복수를 실행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상상 속에서는 그토록 쉽게 죽일 수 있었던 백선생을, 실제로는 좀처럼 죽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던 중 그녀는 백선생의 핸드폰 고리에서 또 다른 희생자들의 흔적을 발견하고, 과거 담당 형사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백선생의 집에서 그의 범죄를 기록한 비디오를 찾아낸 금자는, 피해자 가족들을 한자리에 모아 그 영상을 보여주고, 충격에 휩싸인 그들에게 ‘법의 심판’과 ‘직접적인 복수’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합니다. 가족들은 결국 직접적인 복수를 선택하고, 백선생을 잔인하게 고문하고 살해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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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때 피해자 가족들이 일렬로 앉거나 서서 프레임과 수평을 이루는 장면은, 그 자체로 하나의 기호입니다. 이미지 안의 인물 배치, 자세, 크기, 위치는 모두 함축된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얼굴에서 몸까지 전부 잡는 풀 샷 안에 여러 인물이 균일한 크기로 일렬로 배치된다는 것은, 결국 그들이 같은 성질을 공유하는 ‘같은 패거리’임을 가리킵니다. ‘인물의 위치’ 그 자체가 기표가 되고, 그 기표는 ‘죄의 공모자’라는 기의를 발생시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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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생의 목에 깊숙이 꽂힌 가위 역시 단일한 기호가 아닙니다. 가위는 백선생의 죽음을 가리키는 지표기호이자, 손녀의 이름표와 그녀의 손때가 묻어 있는, 즉 피해자를 상징하는 상징기호이기도 합니다. 피해자를 상징하는 기호가 곧 가해자의 죽음을 가져온다는 점에서, 이 가위는 인과응보의 메시지를 시각적으로 압축한 장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백선생의 사체와 증거를 땅에 묻고 가족들이 흩어지기 전, 금자는 양해를 구하고 눈감은 백선생의 얼굴에 총구멍을 냅니다. 이때 그녀의 표정은 웃는 것도 아니고 우는 것도 아닌 모호한 표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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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반적으로 표정의 공시의미를 통해 상대의 감정을 읽습니다. 웃음은 기쁨을, 눈물은 슬픔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학이나 영상에서는 종종 ‘웃음’이라는 모순적 계열체가 ‘슬픔’이라는 통합체 안에 배치되면서, 비극성과 처절함을 강화하는 역설적 의미효과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너무 슬프고 충격적인 상황이 믿기지 않아 허망한 웃음을 짓는 장면을 한번쯤 떠올려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때의 모순적 계열체는 동위성을 단순히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위성을 더 강화하는 역할을 합니다. 금자의 입이 웃고 있는데도 어딘가 처연하고 기괴하게 느껴지는 이유, 그 ‘미소’가 우리를 가장 불편하게 만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4)

모든 행위가 끝난 뒤, 금자와 유족들은 빵집 나루세에 모여 케이크를 나누어 먹습니다. 누군가의 선창으로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잠시 애도의 시간을 가진 뒤 그들은 흩어집니다. 이 장면 또한 세 겹의 기호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① 공동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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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음식을 한자리에 모여 나누어 먹는 행위, 즉 공동 식사의 공시의미를 떠올려 보면, 이 장면은 결코 단순한 케이크 커팅이 아닙니다. 식사는 본래 개체의 생존 본능에 기반한 배타적인 행위였습니다. 그런 배타적인 개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같은 것을 먹고 마신다는 것은, 그 행위를 통해 배타성이 일시적으로 제거되고 새로운 사회적 관계가 성립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종교 의식에서 밀가루 빵을 예수의 몸으로 여겨 나누어 먹는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나누어 먹는 것’이 기표가 되고, 실제로 생성되는 기의는 ‘밀접한 관계의 성립’이 됩니다. 그러므로 나루세의 원탁에 모여 케이크를 나누어 먹는 행위는, 그들이 이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공모 관계로 묶였다는 의미가 됩니다. 같은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같은 음식을 나누어 먹는 의식을 통해, 평생 서로를 연결할 죄의 고리에 암묵적으로 합의하고 있는 셈입니다.



② 생일 축하 노래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 생일 축하합니다.」 이 짧은 노래의 사회적 공시의미는 일반적으로 탄생에 대한 축하와 기쁨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피해자 가족들은 살해당한 자신들의 아이를 떠올리며, 슬프게 그 노래를 부릅니다. 케이크라는 ‘기념일’의 기호가 이미 죽음의 맥락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생일 축하 노래의 공시의미가 ‘죽음에 대한 애도와 슬픔’이라는 개인적 공시의미로 변주되는 것입니다. 가장 ‘예쁜’ 노래가 가장 처참한 자리에서 울려 퍼지는 이 장면이야말로, 영화가 ‘예쁨’이라는 코드를 가장 정직하게 사용하는 동시에 가장 강하게 흔드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③ 계좌번호


계좌번호는 퍼스의 분류에 따르면 사회적 법칙에 의해 자의적으로 구성된 상징기호입니다. 그런데 위의 맥락에서 계좌번호는 단순한 거래의 코드가 아니라, 유가족들에게 분배될 ‘백선생의 돈’을 가리키는 기호로 작동합니다. 더 깊은 차원에서 보면, 이 돈은 백선생의 소유였던 것을 폭력적이고 강제적인 방식으로 획득한 것입니다. 즉, 계좌번호를 적어 낸 그 쪽지는 단순한 송금 정보가 아니라, 그들이 함께 저지른 죄, 그리고 죄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또 다른 죄를 상징하는 공시기호가 됩니다.



(5)

화장을 지우던 금자는 원모의 환영을 만납니다. 원모는 입에 담배를 물고 있습니다. 금자는 원모에게 용서를 빌려고 하지만, 죽지 않았다면 꼭 그만큼의 어른이 되었을 얼굴로 원모는 금자의 입을 막아 버립니다. 케이크를 만들어 집으로 향하던 금자는, 맨발로 눈을 밟으며 나온 제니에게 달려가 안깁니다. 두부 모양의 흰 케이크를 제니에게 내밀고, “하얗게 살자”고 말합니다. 그리고 금자는 끝내 케이크에 얼굴을 파묻고 맙니다.


이 장면은 영화 첫머리의 두부 거절 장면과 정확한 수미상관을 이룹니다. 출소 직후, 금자는 전도사가 내민 두부를 떨어뜨리며 ‘속죄 → 새 인생’이라는 사회적 코드를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영화의 마지막에서 금자는 두부 모양의 케이크를, 그것도 자신의 어린 딸이자 또 다른 피해자인 제니의 손에서 받아 듭니다. 같은 ‘두부’라는 기호가 거절되었다가 수용되는 이 구조는,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거절된 코드가 새로운 발신자를 통해 다시 제시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두부라는 기호는 전도사가 건넸을 때는 ‘바깥에서 주어지는 속죄의 약속’이었지만, 제니가 건넸을 때는 ‘피해자 측에서 건네지는 용서의 형식’으로, 그 발신 주체와 공시의미가 바뀌어 있는 것입니다.



① 원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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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자의 환영 속에서, 아이 원모가 어른 원모로 변하는 장면입니다. 물론 어른 원모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도 없고, 본 적도 없는 대상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의상과 자세, 담배라는 소품의 유사성을 통해 그 남자가 원모라는 사실을 유추해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른 원모라는 기호는 ‘존재할 수 없는 미래’를 가시화함으로써, 금자의 죄가 시간 안에서도 결코 종결되지 않는다는 의미를 환기합니다.



② ‘구원’의 계열체적 선택


계열체(paradigm)란, 한 자리에 들어올 수 있는 ‘대체 가능한 기호들의 집합’을 말합니다. 통합체(syntagm)는 선택된 기호들이 시간과 공간 안에서 결합되어 만들어내는 연속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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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색의 눈, 흰옷을 입은 맨발의 어린 소녀, 흰색 두부 모양의 케이크. 이 모두는 순결·속죄·회개·정화 등을 공시의미로 갖는 계열체들입니다. 그리고 이 계열체들이 한 화면 안에서 결합되어 ‘영혼의 구원’이라는 통합체적 의미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원의 약속’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사실 또한, 영화는 같은 장면 안에 분명히 새겨 두고 있습니다. 그 직전에 마주한 어른 원모가 금자의 입을 막아 버리기 때문입니다. 죽은 아이가 어른의 얼굴로 돌아와 금자의 사죄의 말을 차단하는 이 장면은, 금자가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부여하는 일을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또 하나의 기호적 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영화는 한쪽에서는 ‘피해자 제니로부터 건네지는 용서’를, 다른 한쪽에서는 ‘피해자 원모로부터 거절되는 사죄’를 동시에 보여줌으로써, 금자가 도달할 수 있는 ‘구원’과 도달할 수 없는 ‘구원’ 사이의 균열을 정확하게 시각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③ 언어의 정박


그리고 이 균열은, 화면 위로 흐르는 나레이션에 의해 한 방향으로 정박됩니다.  

“이금자는 어려서 큰 실수를 했고 자기 목적을 위해 남의 마음을 이용하기도 했지만, 그토록 원하던 영혼의 구원을 끝내 얻지 못했다. 그래도, 그렇기 때문에 나는 금자씨를 좋아했다. 안녕 금자씨.”


흰 눈과 흰 케이크가 약속하는 다의적인 가능성 가운데, 언어적 메시지는 ‘구원의 실패’라는 단 하나의 의미를 고정합니다. 이미지가 약속한 것과 언어가 확정한 것이 어긋나는 바로 그 자리에서, 관객들은 금자씨의 복수가 성공한 것인지 실패한 것인지 알 수 없게 됩니다.



④ 제니


그런데 이 장면에서 우리가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동안 줄곧 들려오던 익명의 보이스가, 특정 인물의 보이스, 즉 제니의 보이스로 옮겨간다는 점입니다.


이전까지 나레이션의 발신자는 장면과 인물에 대해 일정한 거리감을 두는 화법을 사용하면서, 일체의 정보를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누가 말하는지 알 수 없던 나레이션이, 마지막 순간 ‘나’라는 인칭으로 전환되고, 금자씨를 좋아했다는 고백이 이어지면서 그 발신자가 제니였음이 드러납니다. 이로써 영화 전체의 서술 시점이 회상적 1인칭으로 재정의됩니다.


또 맨 마지막에는 “안녕”(익명의 어른 목소리) “금자씨”(제니의 아이 목소리)로 음색이 변하면서, 발신자에 대한 정보를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 영화는 줄곧 제니의 이야기였고, 먼 훗날 제니가 어른이 되었을 때 금자를 돌아보며 회상한 것이었음을 마지막에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마지막 장면은 해석이 갈립니다. 누군가는 제니가 건넨 두부 모양의 케이크를 ‘피해자에 의한 용서’로 읽으면서, 금자가 비로소 과거의 죄책감을 내려놓고 두부처럼 흰 새 인생으로 진입한다고 봅니다. 백선생 때문에 어머니와 떨어져 살아야 했던 또 한 명의 피해자인 제니가, 자신을 버린 어머니를 다시 받아 안고 그녀에게 용서를 건네는 장면이라는 점에서, 이 해석은 충분히 설득력을 갖습니다.


그런데 다른 해석도 가능합니다. 영화 내내 금자는 원모에 대한 죄책감을 반복적으로 드러내 왔습니다. 끊임없이 떠오르는 원모의 환영, 원모의 수배 전단 앞에서의 멈칫거림, 출소 직후 원모의 부모를 찾아가 손가락을 잘라내는 자해적인 사죄. 이 모든 장면이 가리키는 것은, 금자에게 원모는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라 자기 죄책감의 인격화된 기호라는 점입니다. 그런 원모가, 복수가 모두 끝난 뒤에도 어른의 얼굴로 돌아와 금자의 입을 막아 버린 사실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그것은 금자가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부여하려는 어떤 시도도 영화 안에서는 끝내 허용되지 않는다는 선언에 가깝습니다. 그렇게 보면 마지막의 흰 케이크는 ‘구원의 약속’이라기보다는, 순수한 어린 딸 앞에서 좌절하는 어른의 자기 인식에 더 가깝다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해석은 영화의 복수 서사 전체에 대해 무거운 질문을 던집니다. 금자는 직접 백선생을 단죄했고, 다른 피해자 가족들에게도 복수의 기회를 양보했으며, 잃어버린 딸과 재회하기까지 했습니다. 표면적으로 그녀는 원하던 것을 거의 다 이룬 듯 보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녀가 가장 원했던 ‘원모로부터의 용서’만은 끝내 받지 못합니다. 사적인 복수의 모든 절차가 다 끝난 뒤에도 그녀가 여전히 환영을 보고, 화장을 지우다가 흐느끼고, 케이크에 얼굴을 파묻는다면


그 복수는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요. 

 

속죄란 무엇일까요.

 

구원이란 가능한 것일까요. 

 

우리는 누구의 용서를 통해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일까요.

 

 


3. 낯설게 하기



‘낯설게 보기’는 이 영화의 카메라 바깥에서도 또 한 번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정정훈 촬영감독은 <친절한 금자씨>를 “<올드보이>와 달리 좀 더 관조적이고 냉정하게 바라보는 영화”라고 규정하면서, 후반부로 갈수록 채도를 점차 낮추어 결국 흑백에 가까운 화면으로 수렴되도록 만들었다고 밝힌 적이 있습니다.


박찬욱 감독 역시 “복수 끝에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 깨끗한 상태로 돌아가려고 하는 드라마이기 때문에, 점점 순수해지고 정화되는 듯한 이미지를 표현하고자 했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즉, 빛과 색이라는 가장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영화적 요소조차, 이 작품에서는 의도적으로 ‘낯설어지도록’ 설계되어 있었던 셈입니다. 관객은 자신이 보는 화면이 점점 색을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 채, 어느새 흑백에 가까운 세계 속에서 금자의 복수와 마주하게 됩니다. 인생과 인물에 대한 감각, 진실과 거짓에 대한 감각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서서히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영화는 화면의 채도를 통해 체험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더 재밌는 것은 이영애도 같은 방식으로 연기했다는 것입니다. 이영애 배우는 <친절한 금자씨>에 출연하기 이전, 석사 학위 논문으로 「스타니슬랍스키와 브레히트의 연기론에 관한 비교연구」를 작성한 적이 있습니다. 이 논문은 관객을 극에 몰입시키는 스타니슬랍스키의 ‘사실적 연기’와, 관객의 동일시를 의도적으로 차단하여 비판적 거리를 확보하게 하는 브레히트의 ‘낯설게 하기(Verfremdungseffekt)’를 대비적으로 분석한 글입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연기론은 <친절한 금자씨> 속 금자라는 인물 안에서 그대로 구현되고 있습니다. 

 

교도소 안의 금자는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성실하며,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배우 이영애’의 결과도 자연스럽게 겹쳐지는 사실적 연기의 영역에 놓여 있습니다. 반면 출소 이후의 금자는 짙은 화장과 차가운 표정, 단호한 몸짓을 통해 관객이 인물과 동일시하기 어려운 거리감을 형성하면서 브레히트적인 ‘낯설게 하기’의 영역으로 옮겨 갑니다. 이로써 관객은 금자의 복수에 단순히 감정적으로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의 어느 모습이 진짜인가’를 끊임없이 되묻게 됩니다. 하지만 영화는 이 두 가지 금자 가운데 어느 쪽이 ‘본래의 금자’인지를 영화는 끝내 확정해 주지 않습니다. 친절한 금자도, 마녀 같은 금자도, 모두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복수를 완성하기 위해 그녀가 살아낸 얼굴들이기 때문입니다. 즉, 이영애의 연기는 금자라는 한 인물이 살아남기 위해 이중적인 삶을 살아내야 했다는 비극적인 사실 자체를, 연기의 두 가지 양식을 통해 기호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박찬욱과 이영애의 작업은 서로 다른 층위에서 동일한 명제를 향해 수렴합니다. 박찬욱은 화면의 채도와 기호의 배치를 통해, 관객이 인생과 인물, 진실과 거짓에 대한 감각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서서히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체험적으로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이영애는 한 인물의 안과 밖을 사실적 연기와 낯설게 하기로 분리시킴으로써, 인물이 살아남기 위해 이중의 삶을 살아내야 했다는 비극 그 자체를 연기의 형식으로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어느새 회색으로 변해버린 화면과, 어느 순간부터인가 낯설어진 한 사람의 얼굴 앞에 동시에 놓이게 됩니다. 

 

이렇게 <친절한 금자씨>는 감독의 ‘낯설게 하기’와 배우의 ‘낯설게 하기’가 점과 선, 면으로 만나는 영화입니다. 관객을 이토록 낯설게 하기로 작정한 영화라니, 참 불친절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 불친절함이 불편함이 될 때, 우리의 ‘낯설게 보기’는 비로소 완성되고, <친절한 금자씨>는 비로소 조금 친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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