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95%의 J다. 아니, 그 정도의 J였다.
하루치의 계획을 짜놓으면 그 사이에 1분 단위의 이격만 생겨도 스트레스가 몰려와 머리가 아플 정도의 계획형, 아니 통제형의 인간이었다. 만들어 놓은 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오류와 불편함으로 치부했고 융통성이나 관용 따위는 사치였다.
인생은 어차피 내가 짜놓은 판 위에서 돌아가지 않는다는 걸 배우고서야 그 나쁜 버릇을 고쳤다. 그 뒤로 꽤 유한 성격으로 살아가다 문득 생각했다. 정교함, 혹은 정밀함이라는 건 어쩌면 보이지 않는 폭력의 별명이 아닐까? 굳이 폭력이라고 부를 필요도 없다. 억압, 통제, 혹은 획일화 등등 다르게 붙일 이름이야 얼마든지 널려있으니까.
요는, 모든 걸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맞춰 모든 것이 일말의 오류도 남기지 않고 돌아가게 만들려는 시도가 눈에 보이지 않는 폭력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한스는 감수성이 참 풍부한 아이다. 한스가 사는 마을은 대체로 저마다의 역할이 정해져 있다. 신학교에 가는 게 아니라면 기계공을 하거나 농사를 짓는다. 한스의 아버지는 그렇게 만들어진 시스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사람이다. 마을 전체가 그렇다.
하지만 한스는 다르다. 자기 마음이 이끄는 대로 세상을 바라보며 제 뜻대로 살고 싶어 하며 다음을 고민한다. 이질적인 한스로 인해 마을과 주변 사람들은 불편함을 느낀다. 아무런 문제 없이 정해진 대로 이를 맞물리며 돌아가던 기계가 갑자기 삐걱거리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잘 굴러가는 수레바퀴를 끄는 사람은 앞만 보고 나아가면 되지만 이음쇠가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들은 순간부터는 바퀴가 빠지지는 않을까, 물건이 떨어지지는 않을까, 어쩌면 이 수레바퀴가 부서지는 건 아닐까라고 고민하니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된다.
10분이면 갈 거리가 머뭇거리는 덕분에 20분이 걸릴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을 달갑게 받아들일 사람은 아마 어디에도 없다.
한스가 정말로 미소 지을 수 있었던 때는 얄궂게도 강물에 빠진 혼이 떠난 몸만 마을로 돌아온 날이다. 자신을 부품 사이에 끼워 맞추려던 세상이라는 거대한 수레바퀴 아래에서 튕겨 나온 뒤에서야 자유를 누리며 행복을 만끽한다. 오류나 문제가 생기면 같은 이유로 수고롭기 싫으니 더 나아질 방법을 연구하며 발전한 게 인간 사회인데 참 이상하게도 지금 사회는 한스가 살던 시절보다 같은 문제가 더 심해진 것 같다.
다양성을 존중하고 흥미와 적성에 맞는 일을 하며 보람차게 사는 인생이 가치 있다고들 말하는데 어째 사회는 그걸 허락하지 않는다. 좀 더 상세하고, 좀 더 체계적이고, 보다 더 매끄럽게, 일말의 잡음도 없이 언제까지고 매끄럽게 굴러갈 수레바퀴를 만들려고 애를 쓴다. 바퀴 설계도는 점점 더 많은 수치와 그림을 보여주고, 혹여나 부서질까 더 튼튼한 재료를 찾으며, 한 번만 굴러도 많은 거리를 움직일 수 있게끔 크기를 키워간다.
정교함이 폭력이라는 이유다. 나는 내 나름의 길을 한번 찾아보고 싶다. 정해진 루트를 벗어나야지만 가능한 일인데 여긴 그 작은 어긋남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소수점 몇십 번째 자리까지 표기하며 정밀한 수치를 제공하는 설계도에 따라 만들어진 수레바퀴의 부품 사이에 이격이 있을 리가 없다. 그 설계도를 최대한 똑같이 구현할 수 있는 기계도 만들었고 언제 어디서라도 필요한 자재를 가져올 수 있는 인프라가 마련된 최첨단 공장이 이 사회다. 반대로 말하자면 어지간히 큰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일상이 흔들리지 않는 안정적인 사회기도 하다.
인간이라는 게 참 욕심이 많아서 안정되면 스릴을 찾고 스릴이 너무 지나쳐 위험이 되면 다시 또 안정을 찾는다. 만족이라는 걸 모르고 사는 우리를 계속 생산하는 이 공장과 그 부품들로 만들어 굴러가는 수레바퀴가 굴러가는 길에는 아마 또 다른 공장이 있겠지만, 그 바퀴에 짓눌려 부서진다고 해도 그건 결국 더 큰 수레바퀴를 위한 부품이 될 뿐이라는 걸 부정할 수가 없다.
이제는 그만 정밀해질 때다. 오히려 고장 나면 쉽게 분해할 수 있는 약간의 느슨함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