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와 미국 남자는 마드리드 행 열차를 기다리고 있다.
그들이 존재하는 공간의 계절은 여름이다. 덥고 조금 지친 스페인 어느 마을에서, 그들은 역 안에 있는 바에 들어가 맥주를 시킨다. 주문한 맥주가 그들 앞에 놓이고 소녀는 에브로 계곡 건너의 하얗고 긴 언덕을 바라본다.
언덕이 햇볕을 받고 있었기에 소녀의 눈에는 그것이 흰 코끼리로 보인다. 언덕은 코끼리의 모양처럼 둥글고 커다랬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색이 언뜻 보기에는 하얬기 때문에 어디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언덕일 테다. 하지만 미국 남자의 눈에는 흰 코끼리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그들은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모를 싸움을 진행한다.
소녀의 눈에 비치는 흰 코끼리 언덕을, 미국 남자는 볼 수 없다. 짧은 언쟁으로 끝나는 듯한 ‘흰 코끼리 같은 언덕’에 관한 대화는 소녀가 라틴 아메리카의 독한 술, ‘아니스 델 토로’를 시키면서 그것이 끝나지 않고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독한 술을 시키려 하는 소녀 앞에 그것을 부인에게 주문하는 미국 남자가 앉아 있다. 미국 남자는 술을 시키며 소녀에게 물과 함께 마시라 권한다.
아마 미국 남자는 이 행동으로 자신이 소녀를 배려하고 있고 사랑하고 있음을 증명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녀에게는 이 모든 것이 ‘감초 맛’ 같을 뿐이다. 술과 물이 섞인다 한들 술의 독한 맛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어쩌면 그 혼합이 소녀를 더 기분 나쁘게 만들 수 있다. 그걸 소녀도, 미국 남자도 알기 때문에 그들은 최대한 싸우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독한 술을 입에 담는다.
소녀와 미국 남자는 어떤 수술을 위해 마드리드 행으로 떠나는 것처럼 묘사된다. 흥미로운 점은 그들의 대화에서 단 한 번도 소녀가 권유받는 수술이 어떤 수술인지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대화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그 수술이 소녀에게는 매우 큰 고민거리를 던지는 수술이고 미국 남자 또한 이 사실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작품에서는 단편적인 대화로만 그들의 상황을 유추해 볼 수 있는데 소녀와 미국 남자가 하는 대화의 모든 내용은 마치 그들이 ‘흰 코끼리’에 관한 대화를 했을 때와 유사하다.
미국 남자는 소녀가 결정하는 대로 따를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 그가 하는 모든 말에는 소녀가 수술하기 바라는 그의 욕망이 깃들어 있다. 그는 소녀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동시에 소녀가 간단한 수술을 받기 원하고 모든 건 소녀의 결정에 따른다고 그녀를 안심시키면서도 수술 후엔 모든 게 잘될 거라 설득한다. 남자가 하는 말은 소녀의 의지에 반한다.
소녀는 미국 남자와 대화하며 화를 내고 언덕이 아닌 바닥을 바라보고 술을 마시고 바에 있는 발을 바라본다. 소녀가 수술을 원했다면 남자와 긴 대화를 나누지 않고 바로 결정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녀는 그 수술을 원하지 않고 있으므로 남자와의 사이를 걱정하고 고민하고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소녀와 미국 남자 모두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 남자와의 대화에서 소녀가 결정할 수 있는 범위는 매우 좁다. 대화는 미국 남자가 이끌고 소녀는 그 미국 남자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소녀가 역에서 바라본 언덕이 흰 코끼리 같다고 했을 때 남자는 흰 코끼리가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소녀는 그런 남자의 말에 기분이 나빠졌고 화를 냈으나 그렇다고 해서 남자가 흰 코끼리 같은 언덕을 보게 될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소녀와 남자가 처한 공통된 상황에서 그들이 서 있는 위치가 다르기 때문에 그들이 같은 풍경을 바라본다 한들 같은 것을 바라보지 못한다.
아마 남자는 평생 언덕을 바라보고 있어도 소녀가 봤던 흰 코끼리 같은 언덕을 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소녀의 눈에는 그것이 존재하고 있고 그것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보이지 않는 마드리드 행 열차를 오랫동안 기다리게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