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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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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같은 장소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기억을 가지고 나가게 된다.

 

자신이 무엇을 보고 들었는지 다른 관객들은 영영 알 수 없으며, 다른 관객들이 무엇을 보고 들었는지 자신은 영영 알 수 없다.

 

통상적인 공연예술에 적용되지 않는 기묘한 전제가 이곳에서는 사실이 된다. 뉴욕과 상하이를 거쳐 더욱 정교해진 세계로 거듭나 한국에서 마침내 막을 올린 공연 ‘슬립노모어 서울'의 이야기다.


슬립노모어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매키탄 호텔'을 찾아가야 한다. 매키탄 호텔은 지리적으로 명백히 서울의 중심부에 있지만, 호텔 내부에 체크인을 한 뒤 입구로 들어가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짙은 어둠 속 미로가 등장한다.

 

벽을 짚고 천천히 어둠을 따라가다 보면 조금 전 등지고 나온 서울과는 전혀 다른 1930년대의 스코틀랜드가 등장한다 - 어둑하고, 기이하고, 고전적이며, 두려운 동시에 매력적인,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비밀스러운 장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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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불빛과 재즈 선율이 가득한 ‘맨덜리 바’에서 머물다 본격적으로 호텔의 깊숙한 내부에 발을 들이면, 호텔의 벨보이는 이렇게 말한다. ‘저마다 다른 경험을 하게 되실 거예요.’

 

과연 그 말에는 틀린 구석이 없어, 맨덜리 바를 지나며 마스크를 쓰고 다른 세계로 들어서는 관객들은 저마다 완벽히 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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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들은 제각기 다른 장소에서 탐험을 시작한다. 자신이 어디에서 여정을 시작할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거대한 건물의 곳곳에서는 서로 다른 인물 - 배우 - 들이 서로 다른 장소에서 서로 다른 일들을 벌인다.

 

이들은 홀로 떨어져 비밀스러운 무언가에 연관되기도 하고, 각자의 길을 가다 마주치며 또 다른 일을 벌이기도 하고, 모두가 한데 모여 격랑 속으로 빨려들어가기도 한다. 관객이 어느 장소에 머물며 어느 배우를 따라가기로 마음먹는지에 따라 그가 경험할 수 있는 장면이 달라진다. 갤로우그린 스트리트, 비밀스러운 숲, 호텔, 연회장, 각자의 처소와 객실, 병실, 그리고 뉴욕과 상하이 공연에서는 없었으며 오직 슬립노모어 서울에서만 새롭게 생겨난 ‘5.5층’의 비밀 공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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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에게는 여러 선택지가 있다. 이 배우를 따라가기, 저 배우를 따라가기, 그 자리에 가만히 머무르기, 또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길을 찾아 나서기. 어느 선택지를 택하건 간에 관계없이 그의 눈앞에는 머지않아 새로운 장면이 펼쳐지게 되어 있다.


자신의 의지 그리고 우연에 따라 관객들은 ‘오직 자신만이 볼 수 있는’ 일련의 장면들을 목격한다. 마스크를 쓴 채 같은 공간 안을 누비는 다른 그 어느 누구도 그와 동일한 장면, 동일한 순간을 경험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모든 것이 끝나고 매키탄 호텔을 나섰을 때, 한 관객이 자신이 경험한 바를 토대로 재구성한 공연의 흐름은 그의 옆 사람이 기억하는 바와는 사뭇 다르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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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크를 쓴 관객들은 그 자체로 퍼포먼스의 일부가 된다. 역동적이고 강렬한 연기와 무용을 선보이는 배우들 주위로 둥글게 모여 있는 ‘흰 마스크의 군중’은 장면을 완성하는 연출이라 해도 무방하다. 특정 배우들을 따라다니다 보면 배우들이 손을 내밀고 무언가를 건네주거나, 인파 속에서 오직 관객 한 명만을 잡아 이끌고 숨겨진 공간 속으로 향하거나, 남몰래 비밀스러운 부탁을 하는 이른바 ‘원 온 원’을 목격할 수 있다.


방대한 공간을 누비며 주위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파악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관객들은, 서로 다른 장소에서 제각기 달려나가는 듯하던 서사가 어느 순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재현되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이는 착각이 아니며, 실제로 공연에는 모든 장면이 원점으로 돌아가 재시작되는 일종의 '루프'가 존재한다.

 

공연 전체를 통틀어 세 번의 루프가 반복된다. 어느 장소에서건 선명히 들을 수 있는 종소리는 루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다. 루프의 특정 순간 모든 주요 인물들은 연회장에 모이게 되는데, 바로 이 만찬에서의 자리 배치를 통해 어느 배우가 어떤 인물의 역할을 맡았는지를 유추할 수 있다. (관객 시점으로 가장 좌측은 맥베스, 가장 우측은 레이디 맥베스, 가운데에서 팔을 양쪽으로 뻗는 이는 던컨 왕이다.)


명백히 이해되는 서사와 빈틈없는 전개를 원하는 관객에게 있어 캐스팅보드, 사전 정보, 긴 대사가 모두 부재한 슬립노모어는 다소 불친절한 공연일 수 있다. 관객은 같은 순간 동시에 벌어지는 모든 장면을 빠짐없이 알 수는 없다. 단일한 관람만으로는 필연적으로 ‘알지 못하는’ 장면이 생긴다. 그러나 전례 없는 스케일, 공간을 장악하는 배우들이 근거리에서 선보이는 퍼포먼스, 치밀하게 설계된 동선과 디테일 등은 다른 그 어느 공연예술에서도 맛볼 수 없는, 오직 슬립노모어 서울만이 선사할 수 있는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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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분히 고전적인 동시에 세련된, 말 그대로 ‘셰익스피어적인 동시에 히치콕스러운’ 시공간 속으로 빨려들어가 어쩔 때는 그림자처럼, 또 어쩔 때는 극을 이끌어 나가는 배우처럼 모든 것을 관조하는 경험은 서사의 이해 여부를 떠나 그 경험 자체만을 위해서라도 매키탄 호텔 너머의 세계로 기꺼이 들어가고 싶게끔 만든다.


‘모든 관객이 저마다 다른 관극 경험을 얻게 되는 공연’, ‘관객이 공연장의 일부가 되는 공연’. 전례 없던 수식어 너머에 자리한 섬뜩하고 아름다운 먼 과거의 스코틀랜드를 목도하고 싶은 이들이라면 지금 바로 행장을 꾸려 매키탄 호텔로 향해야 한다.

 

막이 내리기 전까지 그 누구도 절대 잠들어서는 안 된다. 지금 당신의 눈앞에 펼쳐지는 장면은 오직 당신만이 기억할 수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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