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플리백〉을 보고 극장을 나서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단순했다. ‘그래서 이 작품이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유명한 원작과 수많은 수상 기록, 세계적인 흥행 소식을 읽으면 분명 내가 놓친 무언가가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공연이 끝난 뒤에도 주인공의 이야기는 내 안에서 하나의 의미로 정리되지 않았다.
물론 모든 작품이 관객에게 공감이나 위로를 주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 예술은 이해하기 어려운 인간을 그대로 보여주고, 불편한 감정을 남기는 것만으로도 역할을 한다. 그럼에도 〈플리백〉을 바라보며 생긴 거리감은 단순히 주인공이 비도덕적이거나 불완전해서만은 아니었다. 내가 끝내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은 그녀의 행동, 그리고 그 행동을 둘러싼 작품의 시선이었다. 파괴적인 욕망과 무책임한 선택이 고통스러운 과거를 통해 설명되는 순간, 설명과 변명 사이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듯했다.
솔직함이라는 이름의 면죄부
플리백은 자신의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성적 농담을 던지고, 관계의 실패를 냉소하며, 자신의 충동과 실수를 관객에게 끊임없이 고백한다. 그녀는 좋은 사람이 되려고 애쓰기보다 자신이 얼마나 엉망인지 먼저 폭로한다. 아마도 이 거침없는 자기 노출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일 것이다. 타인의 평가를 기다리는 대신 스스로 자신의 추함을 공개해버림으로써, 수치심의 주도권을 빼앗아오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플리백은 자신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고 때로는 잔인할 정도로 정확하게 해부하지만, 그 자기 인식이 삶의 변화를 향해 나아가지는 않는다. 오히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라는 고백 속에 머무르며 자신의 행동을 반복한다. 자신의 결함을 먼저 인정하는 태도가 어느 순간 타인의 비판을 무력화하는 방어막처럼 보이기도 했다.

고백은 진실을 드러낼 수 있지만, 그 자체로 책임을 대신하지는 못한다. 누군가 자신이 이기적이고 충동적이라는 사실을 안다고 해서, 그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의 고통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플리백의 솔직함을 보면서 계속 질문하게 되었다. 우리는 한 사람의 깊은 상처를 이해하는 것과, 그 사람이 다른 이에게 남긴 상처를 용서하는 일을 얼마나 구분하고 있는가.
욕망은 정말 생명력인가
플리백에게 성적 욕망은 단순한 쾌락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유일하게 확실한 자산처럼 다루고, 타인의 욕망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관계가 실패하고 가족과의 대화가 어긋날수록, 그녀는 다시 몸의 감각으로 돌아간다. 성적 대상이 되는 순간만큼은 자신이 필요하고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작품은 이를 현대 여성의 욕망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태도로 보여주려는 듯하다. 여성이 성욕을 말하고, 성적 주체로 행동하며, 사회가 요구하는 단정함이나 순결함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플리백은 분명 기존의 여성 인물과 다르다.
황당하고 모욕적인 요구를 하는 연인에게 계속 응하고, 자신에게 충분한 존중을 보이지 않는 상대와 관계를 맺으며, 원치 않았을 법한 신체 접촉조차 자신의 가치가 인정된 증거처럼 받아들이는 모습은 자유롭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여성의 몸이 오랫동안 타인의 욕망을 통해 평가받아온 방식이 내면화된 결과처럼 느껴졌다. 몸의 자유를 말하는 서사라면, 그 자유가 누구의 욕망을 위해 작동하는지도 함께 물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작품이 성적 주체성을 말하는 것인지, 성적 자기파괴를 보여주는 것인지 선명하게 와닿지 않았다. 물론 이 모호함 자체가 작품의 의도일 수도 있다. 자신이 자유롭다고 믿는 사람이 사실은 가장 오래된 억압의 방식을 반복하고 있다는 역설을 보여주려는 것일 수도 있다. 플리백의 행동은 저항인지 자해인지 구분되지 않은 채, ‘발칙함’이라는 이미지 속에 소비되는 듯했다.
타인의 죽음 앞에서도 자신을 중심에 두는 사람
플리백의 삶을 무너뜨린 가장 큰 사건은 친구 부의 죽음이다. 그녀는 친구의 연인과 관계를 맺었고, 그 배신을 알게 된 부는 상처를 입을 목적으로 도로에 뛰어들었다가 죽음에 이른다. 플리백이 친구를 직접 죽인 것은 아니지만, 그 죽음의 원인에 자신의 선택이 깊이 얽혀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작품은 이 사건을 통해 그녀가 왜 자기혐오와 공허 속에 빠져 있는지를 설명한다. 죽은 친구의 상실과 배신은 어느새 살아남은 플리백의 죄책감과 슬픔을 설명하는 장치가 된다. 부는 독립적인 한 인간이라기보다 플리백의 상처를 완성하는 기억으로 남는다.

누군가의 죽음에 직접적인 책임이 없더라도, 자신의 행동이 그 비극에 영향을 미쳤다면 살아남은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할까. 평생 죄책감 속에서 살아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자신의 고통만큼이나 자신이 타인에게 가한 고통을 똑바로 바라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플리백은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아는 것과 직면하는 것은 다르다. 그녀는 죄책감을 성적 관계와 농담, 냉소로 덮고, 관객에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으며 잠시 숨을 돌린다.
관객을 공범으로 만드는 1인극
한 명의 배우가 제한된 무대 위에서 여러 인물과 관계를 구현하고, 대화와 독백을 빠르게 넘나들며 공연 전체를 이끄는 과정은 그 자체로 하나의 차력에 가까웠다. 별다른 장치 없이 목소리와 표정, 몸의 방향만으로 보이지 않는 인물들을 만들어내는 기술은 분명 인상적이었다.

특히 플리백이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거는 방식은 그녀의 내면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그녀는 관객에게 농담을 던지고, 눈빛을 보내며, 방금 벌어진 일을 함께 비웃는다. 무대 위 인물들은 알지 못하는 비밀을 관객만 공유하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편에 서게 된다. 그녀가 얼마나 무책임한 행동을 하든, 이미 우리는 그녀와 웃음을 나눈 공범이다.
그 형식 때문에 작품에 대한 생각도 커졌다. 관객과 가까워지는 연극적 장치가 인물을 이해하도록 만드는 것을 넘어, 인물의 행동을 매력적으로 소비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플리백의 날카로운 유머와 배우의 에너지가 강할수록 그녀가 타인에게 입힌 상처는 잠시 뒤로 밀려난다. 웃음이 윤리적 판단을 유예하고, 연민이 책임을 희석하는 순간이 생긴다.
관객을 공범으로 만든다는 것은 단순히 친밀감을 형성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얼마나 쉽게 매력적인 가해자의 시선에 동화되는지를 보여주는 장치가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재미있고 솔직한 사람에게 더 관대하다. 자신의 약점을 먼저 드러내는 사람에게는 쉽게 마음을 열고, 그 사람이 저지른 잘못조차 상처의 부산물로 이해하려 한다. 〈플리백〉의 형식은 이러한 인간의 심리를 정확하게 이용한다.
불완전한 여성을 무대의 중심에 세우는 일
〈플리백〉은 현대 여성의 욕망과 외로움, 자기파괴적인 내면을 솔직하게 드러낸 작품으로 평가받아왔다. 플리백은 오랫동안 여성 인물에게 기대되어온 모범성과는 거리가 멀다. 그녀는 친절하지도, 희생적이지도, 도덕적으로 완전하지도 않다. 충동적인 선택을 반복하고,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를 주며, 스스로를 더 깊은 고립 속으로 몰아넣는다.
그럼에도 이러한 인물이 이야기의 중심에 설 수 있다는 점은 이 작품이 지닌 분명한 의미라고 생각한다. 여성 인물이 반드시 선하거나 현명해야만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성 역시 욕망하고, 실패하고, 이기적일 수 있으며, 때로는 스스로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선택을 하는 복잡한 인간이다. 〈플리백〉은 그런 여성을 교정하거나 모범적인 방향으로 이끌기보다, 불완전한 모습 그대로 무대 위에 남겨둔다.
다만 나는 플리백의 욕망을 해방이나 주체성의 언어로만 바라보기는 어려웠다. 그녀가 자신의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 인상적이지만, 동시에 타인의 욕망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고 있다는 느낌도 강했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선택처럼 보이는 행동 안에는 외로움과 낮은 자기 인식, 사랑받고 싶다는 갈망이 뒤섞여 있었다.

그러나 어쩌면 이 모호함이야말로 이 인물을 쉽게 정의할 수 없게 만드는 힘인지도 모른다. 실제 인간의 욕망 역시 늘 주체적이거나 늘 수동적인 한 방향으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우리는 자유롭다고 믿으면서도 타인의 시선에 자신을 맞추고,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스스로를 해치는 선택을 하기도 한다. 플리백의 행동이 쉽게 납득되지 않았던 이유도, 그 안에 서로 모순되는 감정들이 너무 가까이 붙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플리백〉은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한다기보다, 여성 인물 역시 얼마든지 불완전하고 비호감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넓힌 작품에 가깝다. 나는 그녀의 모든 선택에 공감할 수는 없었지만, 여성 캐릭터가 반드시 응원받을 만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기대에서 벗어나 한 인간의 복잡함을 끝까지 바라보게 했다는 점이 의미 있게 남았다.
이해하지 못했기에 오래 남은 질문
공연이 끝난 뒤 나는 한동안 내가 작품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닌지 생각했다. 세계적으로 찬사를 받은 작품이고, 많은 관객이 플리백의 외로움과 상실에 공감해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관객이 같은 인물에게 같은 방식으로 마음을 열 수는 없다. 예술 작품은 모두를 하나의 감정으로 이끄는 대신, 서로 다른 질문을 품고 극장을 나서게 하기도 한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플리백의 외로움과 자기혐오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관계가 어긋날수록 더 자극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죄책감을 마주하지 않기 위해 농담과 냉소 뒤로 숨는 모습에는 분명 인간적인 면이 있었다. 다만 그 고통이 그녀의 행동을 어디까지 설명할 수 있는지, 그리고 이해가 어느 순간 용서로 이어지는지는 쉽게 정리되지 않았다.

배우의 연기는 뛰어났고, 한 사람이 여러 관계와 인물을 오가며 무대를 채우는 과정은 인상적이었다. 특히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거는 형식은 플리백의 내면을 가까이 들여다보게 했다. 그녀가 농담을 건넬 때 함께 웃고, 비밀을 털어놓을 때 자연스럽게 귀를 기울이게 되면서 관객은 어느새 그녀의 가장 가까운 청자가 된다. 그 친밀함 덕분에 나는 그녀를 단순히 잘못된 선택을 반복하는 사람으로만 밀어낼 수 없었다.
동시에 그 가까움은 계속해서 판단을 망설이게 했다. 한 사람의 사정을 알게 되는 것과 그 사람의 모든 행동을 받아들이는 일은 같지 않다. 상처받은 사람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고, 깊은 외로움이 있다고 해서 그로 인한 선택의 책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플리백〉은 이 두 가지 사실을 한 인물 안에 겹쳐놓으며, 관객이 쉽게 한쪽으로 결론 내리지 못하게 한다.
나는 공연장을 나설 때까지 플리백의 편에 완전히 서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그녀를 단순히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인물로만 남겨두기도 어려웠다. 공연이 끝난 뒤에도 계속 그녀의 행동과 감정을 떠올렸다는 사실은, 작품이 나에게 분명한 흔적을 남겼다는 뜻일 것이다.
좋은 작품이 반드시 관객을 설득하거나 위로해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때로는 나와 전혀 다른 사람을 오랫동안 바라보게 하고, 내가 타인의 실수와 상처를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는지 되묻게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런 의미에서 〈플리백〉은 공감보다는 질문으로 남은 작품이었다. 사람의 상처는 어디까지 그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는지, 우리는 타인의 실수를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는지, 그리고 이해하면서도 책임을 물을 수 있는지 오래 생각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