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는 비어 있었다. 화려한 세트도, 장면을 갈라주는 암전의 친절함도 거의 없었다. 의자 몇 개와 조명, 그리고 배우 한 사람. 연극 〈플리백〉은 그 최소한의 조건만으로 런던의 골목과 카페, 집과 면접장을 차례로 불러냈고, 80분 동안 인터미션 없이 관객을 붙들어 두었다.

〈플리백〉은 2013년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초연된 피비 월러 브리지의 1인극이다. 프린지 신작상과 더 스테이지 베스트 1인 공연상을 받으며 화제작이 되었고, 이후 런던 소호 시어터와 웨스트엔드, 뉴욕 오프 브로드웨이를 거치며 세계적인 반향을 얻었다. BBC와 아마존의 TV 시리즈로 확장되어 에미상 3관왕과 골든 글로브 2관왕에 오른 이력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이번 공연은 그 원작의 세계 최초 공식 라이선스 한국 초연으로, 6월 19일부터 9월 6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올려진다. 연출은 극단 산수유 대표 류주연이 맡았고, 김히어라·김주연·김규남 세 배우가 각기 다른 '플리백'을 무대에 세운다. 필자가 관람한 회차의 플리백은 김규남이었다.
이 작품의 형식은 내용만큼이나 도발적이다. 플리백은 시종일관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건다. 농담을 던지고, 눈을 맞추고, 방금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변명한다. 관객은 관찰자가 아니라 그녀의 비밀을 나눠 가진 공범이 된다. 필자 역시 어느 순간부터 웃고 있는 자신이 불편해졌다. 웃음의 재료가 결국 한 사람의 무너짐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순간, 그 불편함은 이 극이 설계한 가장 정확한 감정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플리백은 친구 '부'의 남자친구와 잤다. 이 사실 하나가 극 전체를 지탱하는 죄책감의 뿌리다. 흥미로운 것은 그 죄책감이 반성이나 회복으로 이어지지 않고, 오히려 자기 자신을 더 함부로 대하는 방식으로 표출된다는 점이었다. 아무하고나 잠자리를 갖고, 남자친구가 알몸 사진을 요구하면 별다른 저항 없이 찍어 보낸다. 그 반복 속에서 플리백은 누군가가 자신의 몸을 원할 때에만 사랑받고 있다고, 온전한 사람이 되었다고 착각하게 된다. 필자는 그 지점이 이 작품에서 가장 기괴하면서도 가장 서늘한 대목이라고 느꼈다. 그것은 욕망이 아니라 존재 증명의 방식이었고, 증명이 끝나는 순간 다시 텅 비어버리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죄책감의 정체를 짐작하게 하는 장면은 훨씬 앞에 놓여 있다. 플리백이 부에게 연필 끝 지우개로 햄스터를 학대한 사건 기사를 들려주었을 때, 부는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고 그래서 연필 끝에 지우개가 달려 있는 거라고 답한다. 그 대답은 다정했지만, 결과적으로 플리백을 더 깊은 자책으로 밀어 넣은 것처럼 보였다. 자신과 너무 다르고, 지나치게 착하고, 누구의 실수든 지워주려는 사람. 그런 친구를 배신했다는 사실은 용서받을수록 무거워진다. 그리고 부가 남자친구에게 보이기 위해 스스로를 위험에 밀어 넣은 선택이 끝내 진짜 사고가 되어 돌아왔을 때, 플리백에게 남은 것은 갚을 대상이 사라진 부채뿐이었다. 필자는 그가 자기 학대에 매달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보았다. 벌을 줄 사람이 없으니 스스로 벌을 주는 것이고, 그 벌은 하필 잠깐의 쾌락과 안정감이라는 형태를 하고 있었다.
극의 정점은 부의 기니피그가 아파서 헐떡이는 장면이었다. 플리백은 연필 지우개를 기니피그에게 밀어 넣고 싶다는 충동과, 그래서는 안 된다는 이성 사이에서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른다. 필자는 이 장면을 은유로 읽었다. 헐떡이는 기니피그는 플리백 자신이다. 지금까지 그가 스스로에게 해온 일이 바로 그 손짓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플리백은 기니피그를 해치지 않는다. 그 선택은 부의 말로 되돌아가는 순간처럼 보였다. 누구나 실수하고, 그래서 연필 끝에는 지우개가 달려 있다. 지운다는 것은 없던 일로 만드는 일이 아니라 다시 쓸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일까. 필자는 마지막 면접 장면이 인상 깊었다.(어쩌면 안도했던 것 같다.)
앞서 상의를 벗어버리는 사고로 망쳐놓았던 그 자리에 플리백은 다시 앉아, 처음부터 면접을 시작한다. 충동도 아니고 자기혐오도 아닌, 자신의 의지와 이성으로 내린 극 중 첫 번째 결론이었다. 화려한 구원의 장면은 아니었다. 다만 무너지는 방향에서 살아가는 방향으로 몸을 돌리는 데 80분이 걸렸다는 사실이, 오히려 정직하게 느껴졌다.
관람을 마치고 필자에게 남은 문장은 결국 하나였다. 인간은 외로움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
플리백은 외로움을 다스리지 못했기에 스스로 공허해졌고, 그 공허를 타인으로 채우려다 가장 손쉬운 방법인 몸을 택했다. 그러나 그 방법은 채우는 대신 파내는 쪽이었다. 남에게 기대는 동안 정작 자기 자신은 더 빠르게 사라진다. 외로움을 다루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스스로를 파멸에 밀어 넣는지를 이 극은 웃기고 발칙한 얼굴로, 그러나 한 치의 봐줌도 없이 보여준다.
〈플리백〉은 결핍을 극복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결핍을 자기 눈으로 처음 바라본 사람의 이야기다. 류주연 연출의 말처럼 이 발칙한 고백은 관객이 자신의 결핍을 마주하게 만든다. 극장을 나서며 필자가 확인한 것도 무대 위의 플리백이 아니라, 객석에 앉아 웃고 있던 나 자신의 얼굴 쪽에 가까웠다. 배우 한 사람으로 그만큼을 해내는 무대를, 오랜만에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