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Review] 우리가 치러야 할 몫에 대하여 - 연극 '페이백' [공연]

모순을 받아들이는 법

by 장유정 에디터
2026.09.27 19:00
이 브라우저에서 최근 읽은 글입니다.
      이전에 읽던 글입니다.

      어느 시골, 현장체험학습으로 할아버지의 양계장에 온 제원은 불만이 가득하다. 몸을 겨우 움직일 만큼 작은 닭장에 닭을 가둬 키우는 할아버지는 무엇이 문제인지조차 모르는 듯하다. 어떻게 생명에게 그리 잔인할 수 있느냐는 말에 되레 화를 내며 "네 아버지가, 네가 편히 살 수 있었던 게 전부 내가 닭을 키워 팔아온 덕분인데 그것도 모르느냐"고 윽박지르는 모습을 보면 말이다.

       

      양계농 두만은 두만대로 머리가 아프다. 오랜만에 찾아온 손녀는 자신이 잘 키운 닭을 잡아준다는데도 난리고, 곧 온다던 아들놈은 말을 바꾸고 집에 오지도 않는단다. 잘만 하던 도축업을 때려치우고 자연재배니, 채식이니 하기 시작할 때부터 속을 썩이던 아들이다. 평생을 이어온 자신의 업을 잔인하고 비인간적이라 비난하는 이들을 보면, 헛헛했던 마음에 열까지 오른다.

       

       

      2026_09_페이백 포스터.jpg

       

       

       

      옳고 그름의 회색 지대: 모순된 욕망 받아들이기


       

      환경 문제가 윤리와 얽히면 골치가 아파진다. 무엇이 옳은지는 쉽게 말할 수 있어도, 그 옳음을 현실에서 끝까지 실천하는 일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결국 남는 것은 이상적이고 교과서적인 대답인 경우가 많다.

       

      할아버지에게도 화를 내고, 아버지에게도 화를 내는 제원은 아직 자기 안의 모순을 정확히 설명할 언어를 갖지 못한 사람처럼 보인다. 모든 것이 싫고, 무엇이 옳은지 따지고 싶지만 정작 자신도 그 기준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바로 그 점에서 제원은 꽤 정확하게 우리를 닮았다. 육식을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것은 아니다. 생명을 존중하지만 고기는 먹고 싶다. 내가 하는 행동의 여파를 하나하나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모순을 끌어안은 채 살아간다.

       

      육식을 비난하는 것은 쉽다. 똑같이 살아 있는 생명체를 어떻게 죽이고 먹을 수 있느냐고 묻는 것 역시 어렵지 않다. 특히 죽음이 일상에서 멀어진 현대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도축의 과정은 시야에서 사라지고, 우리는 깔끔하게 손질된 고기만 만난다. 원래의 형체를 잃은 채 정육점과 마트 진열대를 거쳐 주방으로, 그리고 식탁으로 온다. 소와 돼지, 닭과 양은 보지 않고 소고기와 돼지고기, 닭고기와 양고기만 보는 셈이다.

       

      그런 죽음을 생업으로 마주해온 사람들이 극 속의 도원과 두만이다. 이들에게 생명을 죽이는 일은 잔인함을 모르는 사람의 일이 아니라, 그 잔인함까지 일상의 일부로 받아들여야만 지속할 수 있었던 노동이다. 누군가에게는 쉽게 비난할 수 있는 일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가족을 먹여 살린 삶 전체일 수도 있다.

       

      그 안에서 벗어난 사람도 있다. 흑이다. 도축장에서 일하던 그는 밀려오는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채식을 선언한다. 딸 제원 역시 초등학생 때부터 채식을 하도록 키운다. 제원은 아버지의 생각을 따라 생명에 대한 존중과 연민을 배웠지만, 동시에 고기를 먹고 싶은 마음도 품고 있다. 맛있어 보이고, 주변 친구들은 아무렇지 않게 먹는다. 혼자 채식 도시락을 싸서 학교에 가야 했던 경험 역시 또래 집단 속에서는 분명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극의 가장 앞에 제원을 세운 이유도 여기에 있을 테다. 생명을 사랑하면서 고기를 먹고 싶고, 옳은 일을 하고 싶으면서도 불편은 싫은 마음. 〈페이백〉은 그 모순 자체를 틀렸다고 말하기보다 먼저 바라보게 한다.

       

       

       

      페이백: 대가를 인지하기


       

      자연과 환경에 관한 문제는 보통 감성이나 신념의 영역과 맞닿는다. 그래서 무엇이 문제인지 안다고 해서 반드시 행동이 따라오는 것은 아니다. 당장 나부터 그랬다. 공연이 끝난 뒤 예정대로 오랜 친구들을 만나 저녁을 먹으러 갔다. 메뉴는 돈가스였다. 교환학생으로 독일에 머물던 때에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비건 인구가 많은 독일에는 대체육 제품도 많았다. 좋은 뜻에 동참하고 싶었지만 막상 하나 먹어보니 익숙한 고기 맛보다 아쉬웠다. 이후 굳이 다시 손이 가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아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을까.

       

      아마 〈페이백〉이 요구하는 것은 완벽한 전향이라기보다, 내가 누리는 것의 대가를 먼저 인지하는 일에 가까워 보인다. 당장 고기를 완전히 끊으라고 명령하는 대신, 다섯 번 먹던 것을 네 번이나 한 번으로 줄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그 행동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 이전에 무엇이 희생되고 있는지를 보게 만드는 일이다.

       

      흑이는 자연재배를 '페이백'에 비유한다. 자연에 30%의 먹거리를 돌려주자는 것이다. 100%의 농작물 가운데 30%를 손해 보는 것이 아니라, 70%를 얻기 위해 자연을 빌려왔으니 그만큼의 값을 치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멋지고 아름다운 설명이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또 다른 문제가 시작된다.

       

      도살장의 현실을 고발하며 "선배와 내가 책임을 지자"고 말하는 흑이의 선언은 도원에게는 날벼락과도 같다. 자신은 왜 책임을 져야 하는지 납득하지 못했는데, 타인이 규정한 책임이 갑자기 삶 위로 쏟아져 내린다. 아무리 옳은 말이라 해도 상대가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 채 강요받는다면, 그것은 폭력처럼 느껴질 수 있다.

       

      두만 역시 마찬가지다. 그에게 닭을 키우는 일은 착취의 역사가 아니라 가족을 부양한 삶의 역사다. 흑이에게는 반드시 갚아야 할 빚인 것이 두만에게는 자신이 평생 일한 대가다. 같은 현실을 두고도 누구에게는 부채이고, 누구에게는 생계가 된다.

       

      그래서 〈페이백〉은 쉽게 한쪽을 악인으로 만들지 않는다. 생명을 아끼는 마음과 생계를 지키려는 마음, 윤리적으로 살고 싶은 욕망과 편리하게 살고 싶은 욕망을 한 공간에 놓는다. 그리고 어느 하나를 완전히 없앨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결국 이 작품이 돌려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반드시 고기 한 점이나 수확량의 30%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편리하게 누려온 것 뒤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한 번쯤 바라보는 일. 그 사실을 알고도 여전히 모순된 선택을 하는 자신을 외면하지 않는 일. 어쩌면 인지는 우리가 치를 수 있는 가장 작은 '페이백'의 시작인지도 모른다.

       

       

       

      아트인사이트 컬처리스트 명함.jpeg

       

       

      이 이야기는 어떠셨나요?

      장유정 에디터의 인기글

      많이 읽힌 글 3편
      1. 01 [ART insight] 직업이라는 이름의 길 위에서 남기는 글
      2. 02 [Review] 우리가 꼭 다른 답을 찾을게 - 뮤지컬 '라이카' [공연]
      3. 03 [Opinion] 기다리는 삶에 대한 성찰 -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 [공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