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기다리는 삶에 대한 성찰 -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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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에 관심을 가지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호기롭게 ‘연극의 이해’라는 강의를 신청해 들었던 기억이 있다. 희곡 다섯 편을 골라 읽고 감상문을 제출해야 하는 과제가 있었는데 그 후보 중 하나가 바로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였다. 이름도 특이하고, ‘부조리극’이라는 키워드로 수업 시간에 잠시 다루기도 했던 작품이라 다른 작품들보다 흥미롭게 느껴졌다.
그러한 이유로, 꼭 과제를 위해서가 아니라도 언젠가 내가 읽겠거니 싶어 다른 - 내 의지로는 절대 안 읽을 것 같은 - 희곡 다섯 편을 읽었던 것이 벌써 2년 전의 일이다. 그런데 굳이 도서관에 들러 이 희곡을 찾아 읽고 싶은 마음이 들 때 읽겠다고 미루고 미루다, 2024년 가을이 되었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꾸준히 우리나라에서 공연으로 올라오고 있기도 한 작품이지만 어쩐지 어려워 보여서, 희곡 읽기와 마찬가지로 공연을 보는 것도 다음으로 미루어 왔다.
그런데 이번에 신기한 제목의 연극을 하나 발견했다.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라는. 예스24스테이지라는 익숙한 극장에, 얼굴도 이름도 익숙한 배우들과 함께 나타난 이 작품은 원작보다는 조금 더 발랄한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었다. 조금이나마 부담을 덜어낸 채로 보러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을 적기를 기다리던 나는,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를 먼저 보러 가게 되었다.
'고도를 기다리며'를 연기할 기회를 기다리기
베케트의 원작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고도’를 기다리는 ‘에스트라공(고고)’과 ‘블라디미르(디디)’의 이야기라면, 데이브 핸슨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는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주인공 두 명의 언더스터디로서 자신들이 무대에 오를 기회만을 기다리고 있는 에스터와 벨의 이야기다.
언더스터디(understudy)는 본래 주연 배우가 공연을 진행하지 못하게 되는 돌발상황을 대비하여, 그 역할을 연습해 두는 대역 배우이다. 언더스터디로서의 본분에 맞게 에스터와 밸은 무대에 오를 순간을 기다리며 준비하지만, 언제나 공연은 차질 없이 막을 내리며 그들의 차례는 오지 않는다.
주연 배우가 갑자기 아프거나, 무대에서 사고가 발생하는 등 언더스터디가 필요하게 될 수만 가지 상황을 상상하고, 이대로 공연을 올리지 못하고 끝날까 불안해하기를 반복하는 이들은 우스꽝스러운 말들과 몸짓으로 대화를 이어나가며 오지 않는 ‘연출님’을 하염없이 기다린다.
블라디미르가 ‘누군지,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고도’를 기다리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는 밸도, 그런 건 이해하지 않아도 연기만 하면 된다는 에스터도 ‘누군지,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연출님’을 기다리는 웃픈 상황이 극 내내 펼쳐진다.
그렇게 둘은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린다.
내가 기다리는 고도는 무엇일까
계속해서 기다리는 에스터와 밸을 보면서, 관객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기다림에 대해 질문하게 된다. 나도 저렇게 열정적으로 무언가를 기다려본 적이 있었나? 나는 지금 무엇을 기다리고 있지? 이 질문에 스스로 어떤 답을 찾는지에 따라 공연의 초점이 달라질 것이다.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고집불통 예술가 에스터라는 인물이다. 그는 무대를 기다리는 언더스터디로서, 배우로서 자부심을 느끼는 동시에 자신이 더 이상 인정받지 못하는 뒷방 배우일까봐 자괴감을 느끼기도 한다. 자신이 다 아는 것처럼 굴지만 사실 모르는 걸 들킬까봐 노심초사하고, 절대 모르는 걸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사소한 규칙에도 집착하면서, 정석적인 길이 아닌 모든 우연은 편법일 뿐이라고 깎아내리기도 하는 모습을 보이는 에스터는 현실을 외면하는 이상주의자, 또는 공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신랄하게 그를 비판하는 이유는, 그의 이런 모습들에서 나와 닮은 모습을 찾았기 때문이다.
나는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중이지만, 어쩌면 그것을 핑계로 현실적인 문제나 다른 기회를 외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눈앞에 보이는 길만 고집하기보다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 어쩌면 현명한 방법일 수도 있을 텐데.
오만하고 바보 같은 그의 모습에도 미운 마음이 들지 않았던 건, 좋아하는 일로 성공하고 싶다는 그의 욕심만은 진심이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나 스스로와 겹쳐보았던 것이기 때문이고.
하지만 정확하게 무엇을 기다리고 싶은지 파악하는 것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대상이 명확해지면, 무작정 기다리기보다는 어딘가로 찾아나서는 게 더 빠르고 손쉬운 방법일지도 모르지 않나. 적어도 무력하게 누군가가 나타나서 기적을 만들어주길 바라기만 하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웃음과 성찰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은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는 대학로 예스24스테이지 3관에서 12월 1일까지 공연된다. 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베케트의 성찰을 엿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그리고 내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고민해 보고 싶은 이가 있다면, 이 공연을 꼭 추천하고 싶다.
[장유정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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