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라이프 오브 파이>
인도 소년 파이가 배가 침몰한 뒤 벵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와 함께 227일 간 바다에서 생존한 이야기를 다룬 연극 <라이프 오브 파이(Life of pi)>는 2019년 영국에서 초연되었고, 웨스트엔드와 브로드웨이를 거쳐 2025년 12월부터 제작사 설컴퍼니를 통해 한국에서 라이선스 초연이 공연되었다. 이 작품은 이 안 감독의 <라이프 오브 파이>(2012)로 영화화되기도 했던 소설 얀 마텔의 『파이 이야기』(2001)를 원작으로 한다. 파이의 본명은 피신 몰리토 파텔이지만, 스스로 지은 별명의 어원이 되는 원주율 파이(π)는 등호(=)로 완벽하게 정의할 수 없는 숫자다. 즉 유리수로 표현될 수 없는 ‘초월적 무리수’에 속하고, 이러한 숫자를 활용한 명명은 인간의 상상력으로는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강력한 자연에 대한 상징처럼 활용된다.
믿음과 종교, 정확히는 ‘종교성’을 다루는 원작 소설과 영화의 메시지와 마찬가지로, <라이프 오브 파이>는 동물원을 운영하며 동물을 길들이고, 합리성과 이성을 신봉하는 아버지의 가르침과 공존과 공생, 자연을 강조하는 어머니의 가르침으로 표현되는 대립적 코드를 통해 이야기가 구성되고 결말은 단순히 양자 간의 균형을 찾는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파이의 이야기 속에서 ‘본능’을 상징하는 리차드 파커가 결과적으로 떠나버린 이유 역시 이성의 ‘회복’이 아니라 본능과 이성의 통합 혹은 변증법적 발전일 것이다. 호랑이 리차드 파커를 ‘길들이는’ 파이를 보면, 파이의 아버지가 썼던 훈련과 정복의 의미보다 관계를 맺고 서로에게 책임과 의무를 지는 『어린 왕자』에서 쓰였던 ‘길들이기’와 비슷하다. 처음 포획 당시 ‘목마름(thirsty)’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서류에 사냥꾼의 이름이 대신 적혀서 ‘리차드 파커’로 명명된 호랑이의 이름처럼, 문명(서구)과 자연(동양)이라는 서구의 이항대립을 반전시키고 그 위계적 관계를 뒤집는 상상력이 이 작품의 묘미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은 서구의 식민 지배로 인해 벌어진 정치적 혼란을 마주한 인도의 도시 폰디체리라는 공간적 배경에서 표면상 이민이지만 실질적인 망명을 택하는 파이의 가족, 배에서 마주한 각각의 인물들의 국적과 그들이 상징하는 동물을 떠올린다면 더욱 흥미로운 포인트가 된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단순히 특정 종교를 강조하거나 혹은 비합리적 ‘믿음’과 합리성의 추구라는 대립을 긍정하는 것을 넘어서서, 믿음의 원형인 ‘종교성’과 신성함의 가치를 강조한다. 이 작품에서, 인간들이 등장하는 두번째 이야기는 더욱 개연성이 있지만 마치 1884년 (이 작품에서 호랑이의 이름이기도 한) ‘리차드 파커’라는 소년이 표류 중 다른 선원들에 의해 먹힌 사건처럼 믿고 싶지 않을 만큼 암울한 이야기다. 동물과 살아남은 이야기가 인간에게 더욱 희망적이고 기적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에 파이를 ‘관리’하던 야카모토와 첸 모두 첫번째 이야기를 선택한 것이며, 그래서 보고서 역시 ‘원인불명’으로 남게 된다. 두 이야기를 ‘선택’해야 하는 입장에서, 그 이야기를 믿는 힘이 종교이며 종교의 필연성을 말하는 파이의 모습은 실제 물리적인 현실을 넘는 더욱 아름다운 ‘이야기’를 재현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깨닫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힘은 곧 연극이라는 장르가 만들어지고, 연극 텍스트라는 허구적이고 상상적인 서사를 ‘믿는’ 인간들의 모습과도 유사하다. 따라서 종교적 믿음에 대한 이야기는 곧 연극이라는 형식에 대한 이야기로 전이된다.
연극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벵골 호랑이 리차드 파커를 비롯한 오랑우탄, 얼룩말, 하이에나와 해양생물을 무대 위로 재현하는 방식은 정교하게 구성된 퍼펫과 함께 움직이는 퍼펫티어(Puppeteer)의 움직임과 이에 동반되는 조명, 무대 장치 등 연출의 조합을 통해 동물의 움직임을 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공연의 관건은 실제 동물이 무대 위에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퍼펫티어와 연출의 조화를 통해 관객들이 동물로 형상화된 캐릭터가 살아 움직인다고 믿게 만들어야 한다. 따라서 흥미롭게도 실제 동물이라는 비인간 행위자가 무대 위에 존재하지 않더라도 재현을 통해 존재하게 되는 연출적 상상력은 <라이프 오브 파이>의 원작 소설과 영화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던 ‘믿음’의 중요성이라는 주제와 공명한다. 허구와 현실의 경계가 흐려지는 것이 연극이라는 형식의 기반인데, 이를 전면적으로 겨냥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설정인 셈이다.
중년이 된 파이가 과거를 회고하며 이야기하는 영화와 소설과 달리 이야기를 하는 파이가 병원에서 방금 구조된 소년이라는 점 역시 연극만의 특징이며, 파이의 누나이자 수학을 전공한 라니가 영화에서는 형으로 표현되는 등 등장인물의 구성 역시 다르다. 영상 기법을 활용해 스펙타클을 강조한 영화의 장르 문법과 달리 무대 위에 표현된 다양한 요소만으로 파이의 이야기를 ‘믿어야’ 하는 상황 속에서, 인간이 등장하는 두번째 이야기보다 동물이 등장하는 상징적이고 환상적인 이야기가 더욱 더 신뢰가 가는 것은 연극 고유의 장르 문법이 주는 특이점일 것이다. 두번째 이야기도 개연성의 측면에서 모순이 없지 않은데 단순히 인간이 등장했다는 이유만으로 ‘믿을 수 있는’ 이야기가 된다는 것은 어딘가 의심스럽다. 또한 애초에 첫번째 이야기와 두번째 이야기가 매끄럽게 구분될 수 있을까? 인간이 등장하는 이야기와 동물이 등장하는 상징적인 이야기 중 무엇이 진실인지 판단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스스로 질문하다 보면 어느새 두 이야기의 진위 여부는 사라지고 우리가 특정한 대상을 받아들일 때 사용하는 인식론적 틀과 태도가 드러난다. 그렇다면 <라이프 오브 파이>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완결된 하나의 진실된 이야기보다는 질문을 하는 방식이며, 그동안 견지해 왔던 가치관과 태도에 대한 자기 성찰이다. 그럼에도 <라이프 오브 파이>의 두 이야기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그 답은 연극 <테베랜드>의 두 주인공이 지속해서 언급하는 명대사를 인용하는 수밖에 없다. “모르겠어요”
뮤지컬 <물랑 루즈!>
뮤지컬 <물랑 루즈!(Moulin Rouge!)>는 바즈 루어만 감독의 동명 뮤지컬 영화(2001)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주크박스 뮤지컬로서, 19세기 파리의 클럽 물랑루즈를 배경으로 가난한 예술가 크리스티앙과 클럽의 스타이자 쇼걸인 사틴의 사랑 이야기를 주제로 팝송과 클래식(캉캉, 오페라 <카르멘>의 하바네라 등)을 매시업(mash up)해 구성된 영화 음악에 최신의 팝송인 아델의 ‘Rolling in the Deep’이나 마돈나의 ‘Crazy in Love’, 그리고 위크 더 문의 ‘Shut Up and Dance’ 같은 음악을 활용해 구성된 뮤지컬이다. 뮤지컬의 경우 극강의 화려함과 강렬한 붉은 색으로 무대 장치 및 객석을 채우는데, 이때 거대한 풍차와 코끼리 조형물은 공연이 시작되기 이전부터 19세기 파리의 클럽이라는 배경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 작품은 브로드웨이 초연(2019) 당시 제작사 CJ ENM이 공동 프로듀서로 참여했고, 블루스퀘어 신한카드홀에서 한국 라이선스 초연(2022)을 거쳐 재연(2025~2026)이 공연되었다.
<물랑 루즈!>의 서사적 구조는 단순하다. 19세기 ‘벨 에포크’를 경험한 파리는 프랑스 혁명과 그 이후의 거대한 정치적 혼란기를 겪고 급격하게 ‘근대화’되면서 (유사한 시기의 영국과 마찬가지로) 도시의 화려함과 함께 도시의 계급적 모순이 터진 채 혼종적으로 발달하던 시기다. 그러한 모순적인 도시의 풍경 아래 무대의 공간은 전통적 귀족 계급의 고전적 유산이나 부유한 부르주아들의 성장이 문화적으로 반영된 것처럼 화려하게 구성된 클럽의 모습과 빈곤과 결핍 속에서 역설적으로 예술적 역량이 자라난 몽마르뜨의 언덕으로 양분된다. 파리로 건너온 예술가 크리스티앙은 자신의 보헤미안 친구들인 화가 툴루즈 로트렉가 ‘지골로’인 산티아고와 어울리며 우연히 들어간 클럽 물랑 루즈에서 자신을 몬로스 공작으로 착각한 사틴과 사랑에 빠진다. 사틴을 자신의 정부로 삼고 클럽을 후원하려 하는 몬로스를 속이기 위해 크리스티앙은 즉석에서 가상의 ‘이야기’를 지어내고, 그 이야기는 <물랑 루즈!>의 전반적인 서사와 호응한다. 공작을 속이고 크리스티앙과 비밀스러운 만남을 이어가던 사틴은 빈곤과 궁핍한 생활에 허덕이던 자신을 스타로 만들어 준 클럽과 그 클럽의 동료들을 지키기 위해 진정한 사랑의 대상인 크리스티앙과 세속적인 가치를 대변하는 공작이라는 두 남자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위치에 놓인다. 이러한 이분화된 대립은 물질적으로 빈곤하지만 ‘진정한’ 자유로움과 예술적 가치를 추종하는 보헤미안의 삶과, 세속적인 가치만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고 이를 정당화하는 부르주아 도덕을 따르는 ‘진정성’이 결여된 삶이라는 상상력으로 이어진다. 작품 속 보헤미안 중 하나인 툴루즈 로트렉은 진실과 아름다움, 자유와 사랑이라는 자신의 신념(‘truth beauty freedom love’)을 지키는 대가로 빈곤, 즉 자신의 물적 조건을 기꺼이 받아들인 사람이며, 그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는 보통의 인간들은 ‘속물’이 된다. 물랑 루즈의 일원들이 겪었던 빈곤의 경험이 자신의 존재를 보이지 않게 은폐한 채 현재의 일시적 화려함을 떠받치는 상황 속에서 클럽은 재정적 위기를 겪고, 정부의 배신을 용납하지 못하는 성향 속에서 크리스티앙을 죽일 수도 있는 공작의 계략 속에서 사틴은 위험한 이중생활을 이어간다.
비루한 과거를 지닌 사틴은 젠더화된 계급 질서 속에서 자신의 아름다운 얼굴과 몸을 더 높은 지위나 자본과 교환할 수 있는 일종의 ‘자산’으로 감각하면서, 몸을 활용해 생존하고 ‘그 자리까지 올라온’ 인물이다. 기본적인 삶의 조건이 박탈당하고 위계적으로 배분되는 상황에서 이러한 선택을 부도덕적으로 여기며 비난하는 것은 전형적인 부르주아 도덕의 한계이며, 따라서 이 작품은 ‘코르티잔’이 등장하는 오페라 <라 보엠>과 <라 트라비아타>에서 부각되는 주제와 대립적 코드를 계승한다. 사틴은 마치 <라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처럼 물리적이고 현실적인 세계와 낭만적이고 이상적인 세계 모두에 속한 자신의 모순을 느끼고 자신의 ‘속물성’에 환멸과 자기혐오를 느낀다. 이 모든 모순을 해결할 서사적 장치는 결핵으로 인한 사틴의 죽음을 통해 역설적으로 그들의 사랑이 영원해지는 것이다. 이를 통해 사틴이라는 보통의 개인이 마주한 두 세계의 긴장과 모순은 해소되고 보헤미안의 이상은 낭만화된다. 이때 오페라 <라 보엠>과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원작은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의 소설 『춘희(동백꽃 여인)』)에서 동일하게 나타난 코르티잔의 질병인 ‘결핵’이라는 소재가 이어진다. <물랑 루즈!>에 영향을 준 두 오페라 속에서 ‘결핵’이 낭만화된 그 방식대로 이 작품에서 사틴의 죽음은 크리스티앙과의 사랑의 완성이자 동시에 그가 클럽의 친구들과 ‘쇼’라는 형식에 복무하는 방식이다. 사틴은 극중극이라는 형식을 빌려 크리스티앙이 즉석으로 만든 서사에서부터 시작한 ‘쇼’를 완성하면서 동시에 크리스티앙에게 자신의 진심을 말하고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한다. 따라서 이 이야기에서 사틴은 낭만적 사랑을 구현하는 여성이라는 측면에서 대상화된 존재이면서 동시에 완벽히 주체화된 결단을 하는 모순적이면서 흥미로운 존재가 된다.
뮤지컬 <비틀쥬스>
뮤지컬 <비틀쥬스(Beetlejuice)>는 팀 버튼 감독의 동명의 영화(1988)를 바탕으로 2018년 워싱턴 DC, 그리고 2019년 브로드웨이 프로덕션을 거쳐 2021년 한국에서 라이선스 초연되었다. <비틀쥬스> 역시 <물랑루즈!>와 마찬가지로 한국 제작사 CJ ENM이 브로드웨이 프로덕션 단계에 투자한 작품으로, 유령이 된 아담과 바바라 부부가 자신의 집에 새로 이사 온 리디아의 가족을 내쫓기 위해 이승에도 저승에도 속하지 않은 유령 ‘비틀쥬스’와 협력하는 내용의 원작을 뮤지컬의 문법에 맞게 풀어냈고 리디아의 비중을 강화하는 등 ‘쇼’의 형식을 염두에 둔 각색을 거쳤다. 한국 재연(2025~2026) 역시 초연에 비해 미국식 유머의 맥락적 특성과 정서를 유지하면서 한국 관객에게 더욱 익숙하게 다가올 수 있도록 어휘나 대사를 다듬으며 블랙 코미디라는 장르의 특성을 더욱 강화했다. 이로 인해 관람 가능 연령대가 8세에서 14세로 상승했고, ‘가족 뮤지컬’을 의도했던 초연에 비해 더욱 노골적이고 거친 표현과 더 높은 수위의 개그가 활용되었다. 이는 다소 놀라운 결정인데, 쇼 뮤지컬이라는 특성을 고려한다면 특정한 수요층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은 흥행에 있어서 상당한 위험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재빠르게 전환되는 무대 연출과 쉴 틈 없이 몰아치는 개그로 구성된 뮤지컬 <비틀쥬스>의 특이점은 거대한 코미디 속에 죽음과 삶에 대한 철학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유쾌한 분위기 속에 공존하는 불안과 부정성의 정동을 고려한다면, ‘희비극(tragicomic)’이라는 이름이 이 작품에 어울릴 것 같다. 또한 작품 속에서 나뉘어진 죽음과 삶의 경계선은 곧 질서와 규범을 함의하고, 이승과 저승 모두에 속하지 못한 유령 비틀쥬스는 보통 인간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즉 ‘투명한’ 존재다. 이러한 투명성의 은유는 주류적인 시선에 의해서 호명과 인식도 불가능한 배제의 결과물인 ‘비체(abject)’의 인식론적, 그리고 존재론적 지위와 유사하다. 1막에서 비틀쥬스가 앞둔 과제는 자신을 볼 수 있는 특별한 인간인 리디아를 이용해 본인의 이름이 세 번 호명되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보이게’ 만드는 것이고*, 이를 달성한 비틀쥬스는 2막에서 이승과 저승 간의 결혼 제도를 이용해 리디아와 ‘계약 결혼’을 통해 완전한 인간이 되는 새로운 과제를 마주한다.
뮤지컬 <비틀쥬스>의 또 다른 축인 리디아는 어머니를 잃고 아담과 바바라 부부가 죽은 집에 이사를 오고, 자신의 아버지 찰스와 찰스의 애인이자 자신의 ‘라이프 코치’로 고용된 델리아에게 불만을 느낀 채 새 집에 적응하지 못한다. 리디아가 엄마의 죽음을 수용하지 못함으로써 오는 절망은 자신에게 발생한 상실이 우연적이라는 것을 납득할 수 없기 때문에 발생하고, 그러한 상실이 수반하는 슬픔과 충격을 인정받지 못했다는 점은 리디아의 불안과 두려움을 증폭시킨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거나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은 삶에서 흔하게 나타나는 부조리인데, ‘No reason’에서 델리아와 가치관이 충돌하는 이유도 델리아는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물론 이 ‘가르침’을 전해준 스승(guru) ‘오토’가 사이비 교주였다는 사실은 2막에서 밝혀진다). 리디아는 전형적인 정신분석학적 ‘우울증’ 상태로서, 죽은 엄마(‘dead mom’)을 망각하고 ‘새로 시작하자는’ 것, 즉 애도의 종결을 아버지 찰스에 의해 종용당하면서 발생한다. 찰스와 델리아가 애인 사이라는 것을 목격하고, 새로운 집에 적응하지 못하고 불안을 느낀 리디아는 아담과 바바라 부부, 그리고 비틀쥬스를 보면서 그들의 도움을 받아 가족에게 복수하고자 한다.
화려한 무대 연출과 기묘하게 조우하는 상실에서 비롯되는 리디아의 우울과 비틀쥬스의 냉소라는 ‘부정성’은 드라마를 통해 교훈과 메시지로 전환된다. 리디아는 산 자는 저승에 들어갈 수 없다는 금기를 깨고 저승에 침입해 비틀쥬스의 엄마인 주노에게 쫓기는 상황에 처하게 되며, 그 과정에서 자신을 뒤따라온 아버지 찰스와 진솔한 대화를 나누고 화해하게 된다. 그리고 이승으로 귀환한 그들은 비틀쥬스의 폭주를 막기 위해 아담과 바바라와 협력하고, 결국 (영화와는 달리) 모든 캐릭터들의 성장과 안식을 암시하는 결말로 끝이 난다. 특히, 영화와 달리 모래벌레에 의해 사라지는 것은 비틀쥬스가 아니라 그와 갈등 관계에 있던 비틀쥬스의 어머니 주노다. 간접적인 모친 살해를 완료한 비틀쥬스는 저승으로 떠나기 전 모두에게 작별인사를 하면서 극에서 제기되었던 모든 갈등을 봉합한다. 이 작품은 규범으로부터의 (병리적) 이탈과 탈주에 대한 욕망, 그리고 질서를 회복하려는 움직임 사이에서 그 긴장 관계의 에너지를 흡수해 작품의 희극적 동력으로 활용하고 결말 부분에서 이를 복잡하면서도 단순하게 해소하는데, 성장과 회복이라는 전형적인 가족애의 서사로 회귀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의 결말이 마음에 드는 이유는 리디아가 과거 집의 주인이었지만 일종의 지박령이 된 아담과 바바라 부부와 공존하기로 선택했기 때문일 것이다. 죽음과 삶의 경계를 구분함으로써 상실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 삶이 공존하고 순환하는 것임을 이해하고 인정하면서 모두는 변화한다. 리디아가 안정을 느끼지 못했던 집이라는 공간은 역설적으로 죽은 존재들과 함께하면서, 불안과 고통 또한 삶의 한 부분임을 받아들이면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복잡한 변화와 재해석의 과정 속에서 뮤지컬 <비틀쥬스>가 동명의 원작 영화에 비해 다소 진일보했다는 느낌이 드는 이유는 영화와 공연의 시차 속에서 공연이 가질 수 있는 이점을 최대한으로 활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원작 영화의 감독인 팀 버튼은 영화 <가위손>에서 활용된 장애를 연상시키는 서사, 최근 작품 기준으로는 넷플릭스 영화 <웬즈데이>의 아메리카 선주민 등 소외와 배제의 대상이었던 소수자성의 매력적인 부분을 선별적으로 차용해 매력적으로 가공하며, 여전히 백인 중심적 미학을 선보인다. 그의 작품에서 주류 서사에 포섭된 (혹은 낭만화된) 타자성의 단면을 발견하면서 느끼는 애증의 감각은 실제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소수자, 특히 영원히 ‘외부인’임을 느껴야 하는 비백인의 입장에서 다소 독이 든 성배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뮤지컬 <비틀쥬스>의 경우 영화를 공연의 문법에 맞게 변화시키는 각색을 통해 이러한 약점을 어느 정도 빗겨간다. 1막 마지막 장면인 ‘Day-O’나 ‘Creepy old guy’에서는 ‘블랙 코미디’라는 장르적 특성이 유독 부각되며, ‘펀치 업’ 유머로서의 특성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또한 비백인 배우나 스태프들이 프로덕션에 참여하면서 백인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고스 문화를 실험하고, 이 작품을 보는 수용자인 관객들이 원작과 공연의 시차 속에서 이 작품의 메인 테마이기도 한 ‘가시성’에 현대 사회의 맥락을 덧붙이면서 뮤지컬 <비틀쥬스>의 텍스트는 확장된다.
이승도 저승도 아닌, 산 자와 죽은 자의 세계에 ‘끼어 있는’ 비틀주스와 산 자의 신분으로 죽은 자의 세계에 들어간 리디아는 ‘난민’과 ‘불법체류자’라는 단어를 활용해 설명되는데, 이러한 특징은 (원작 영화에도 유사한 대사가 있지만) 1980년대에 만들어진 원작 영화에서는 쉽게 느낄 수 없었던 전세계적인 반-이민주의와 난민 배제 정책을 새롭게 연상시킨다. 불안과 소외를 낳는 경계와 배제의 언어가 바로 그 불안을 해결하는 방식이라는 헛된 믿음이 전세계적으로 유통되는 현 시점에서, 경계를 의심하고 삶의 근본적인 조건인 불안정성과 소외를 연대의 토대로 삼는 실천이 필요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비틀쥬스>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교훈은 자연스럽게 나뉘어진 것처럼 보이는 굳건한 경계가 반드시 필연적이지 않다는 사실과, 필연적인 상실과 그것이 동반하는 취약성을 병리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인정하는 방법일 것이다.
* 인간인 리디아가 비틀쥬스를 볼 수 있는 이유는 이 작품 내에서는 다소 모호하게 처리되지만, 원작 영화의 후속편인 <비틀쥬스, 비틀쥬스(beetlejuice, beetlejuice)>(2024)에서는 영매가 된 리디아의 모습을 통해 그가 원래부터 영적 능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