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과 혐오, 편 가르기의 시대다. 사람은 항상 타인과 갈등한다. 또한 다름에서부터 비롯된 경계심을 이용해 편을 가르고 서로를 혐오해 왔다. 따라서 시대란 말보단 현상 혹은 본질이란 말이 더 적절하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시대를 ‘지금 있는 그 시기. 혹은 문제가 되고 있는 그 시기.’라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어가 생기고, 문명이 발달한 이래로 인류는 타인의 권력을 빼앗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며 수많은 선을 그어왔다. 타인이 내 영역에 못 들어오게, 내 편의 결속력을 강화하기 위해 장벽을 쌓는 기준은 인종·국적·지역·세대·이념·직업을 비롯한 생활 방식·빈부 격차·성격과 기질·성 정체성·정치 성향·종교·학력 등이 있다.
연극 및 뮤지컬에서도 다양한 갈등이 등장한다. 기승전결이 있는 서사 구조의 극에선 갈등의 씨앗이 뿌려지고, 싹이 트고, 그 갈등이 자라나 폭발한 후 해소에 이르는 과정이 그려진다. 보수와 진보, 현실과 이상, 이념과 사상 등 ‘나’와 외부 세계와의 갈등을 넘어,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충돌하는 내적 갈등 또한 포함된다.
갈등을 해결하는 건 모든 이야기의 목적이다. 하지만 이야기의 궁극적인 목표는 작품으로 전혀 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그 다름을 이해할 수 있겠단 열린 감각을 갖게 하는 것이다. 사소한 시도일지라도, 그 사소함이 멀게만 느껴지던 타인을 ‘우리’로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불꽃 튀듯이, 전기가 흘러 자유를 얻죠 – <빌리 엘리어트>
아버지는 아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들 또한 아버지를 이해 못 한다. 1980년대 영국 탄광촌, 철의 여인 마가렛 대처의 석탄산업 국유화 정책으로 실업자가 될 위기에 처한 광부들이 파업 중인 시기. 광부의 아들인 빌리 엘리어트는 적성에 안 맞는 권투 수업을 받는다. 작은 마을이기에 체육관에선 소녀들의 발레 수업도 함께 진행된다. 빌리는 우연히 춤을 추고, 발레 교습 선생님인 윌킨슨은 빌리의 천재적인 재능을 발견한다.
아버지 몰래 발레를 배우던 빌리는 결국 들킨다. 1980년대, 탄광촌에서 파업 중인 광부 아버지는 소년이 발레를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광부인 자신과 큰아들 토니가 비주류로 밀려나는 상황에 막내 빌리마저 주류가 아닌 길, 전형적인 남성성과는 거리가 먼 길을 걷는단 걸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빌리는 세상을 떠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는 마음, 폭발하는 분노와 반항심, 발레에 대한 열정, 탄광촌과 사회적 편견이란 감옥에 갇힌 답답함을 날 것 그대로의 욕설·비명과 함께 ‘Angry Dance’로 표현한다.
얼마 후, 아들이 춤을 추는 걸 본 아버지는 힘겹게 마음을 바꾼다. 자신과는 다르게 살아온 사람들로 가득한 발레 학교에서, 아버지는 빌리의 발레에 대한 진심을 목격한다. 춤을 출 때 어떤 기분이냔 질문에, 빌리는 나를 잃어버린 것 같고, 춤을 추며 완전해진다고 답한다. 불꽃이 튀고 전기가 흐르는 것처럼 자유로운 빌리의 춤을 본 아버지(‘Electricity’). 객석을 향해 ‘우리 아들이에요’란 무뚝뚝하지만, 아들을 자랑스러워하는 마음이 담긴 말을 남긴다.
탄광촌 사람들이 모금한 돈을 받고 빌리는 런던으로 발레를 배우러 떠난다. 시골 마을에서 대도시로, 친구와 가족을 떠나 낯선 타인들 사이로, 예상할 수 있는 삶에서 불안한 예술가의 삶 속으로 뛰어드는 빌리. 아버지는 아들의 춤을 보고 빌리를 이해했지만, 그가 아버지를 완전히 이해하려면 시간이 더 걸릴 것이다. 그래도 빌리는 발레 학교에 면접을 보러 갔을 때, 아버지 앞에서 춤을 추던 희열과 하늘을 나는 듯한 감각을 잊지 않을 것이다.
미움도, 분노도, 괴로움도 그녀 숨결에 녹아서 사라질 거야 - <여신님이 보고 계셔>
남한과 북한의 군인들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를 못 하는 것에서만 그치면 다행이다. 같은 민족이지만 적이니, 서로를 죽여야 한다고 명령받은 그들은 무인도에 표류한다. 남한 군인 영범과 석구가 북한 군인들을 포로수용소로 이송하던 중, 이송선이 고장 나 무인도에 함께 고립된 것이다. 북한 소년병 순호만이 유일하게 배를 수리할 수 있다. 하지만 순호는 전쟁 PTSD로 아무것도 못 하고 공포에 갇혀 벌벌 떨기만 한다.
처세술에 능하고 두뇌 회전이 빠른 남한 군인 영범은 순호를 달래 배를 고치기 위한 묘안을 떠올린다. 섬에 있는 ‘여신님’이 우리를 지켜준단 이야기를 지어낸 것이다. 동화 같은 착한 거짓말에 순호는 영범의 이야기 속 여신님을 진심으로 믿고 의지하게 된다(‘여신님이 보고 계셔’). 다른 군인들 또한 순호를 위한 연극에 동참한다. 배를 수리해 무인도를 탈출하겠단 목적에서 비롯된 행동이지만, 군인들은 어느새 각자의 여신을 떠올리며 위로를 받는다. 여신을 믿고 나서부터 눈에 띄게 달라진 순호처럼.
남한 군인 석구는 고백도 못 하고 전쟁터에 끌려와 마음에 박힌 첫사랑 누나를(‘꽃봉오리’), 북한 군인 주화는 세계 순회공연을 함께 다니자 약속했던 여동생을(‘원투쓰리포’), 북한 군인 창섭은 홀로 두고 떠나와 생사도 모르는 어머니를(‘꽃나무 위에’ Rep.) 각자의 여신님이라 상상하며 전쟁의 상흔을 그리움으로 승화시킨다. 어느 날 밤, 기약 없는 섬 생활을 견디던 그들이 잠들자 꿈속에 여신님이 나타난다(‘꿈결에 실어’). 그저 꿈인지, 진짜 여신이 그들 곁에 머문 건진 알 수 없다. 그래도 그들은 그날만큼은 여신의 보살핌 아래 악몽을 꾸지 않는다.
극은 아멜리 노통브 소설 <황산>에 언급된 프랑스 작가 ‘로맹 가리’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창작됐다. 로맹 가리가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 포로수용소에 갇혔을 때, 프랑스 포로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귀부인’을 발명했다고 한다. 그 후 포로들의 폭력성은 사라지고, 서로를 배려하고 화합하며 생존할 수 있었다. 이야기는 인간에게 희망이란 무엇인지 알려준다. <여신님이 보고 계셔>의 군인들도 여신님을 만난 후 서로를 적이 아닌 무인도를 함께 떠나야 할 동료로 대한다. 그들이 살아서 무인도를 나갔을지는 극에서 보여주지 않는다. 그래도 서로가 같은 민족, 인간이란 걸 이해했기에 여신의 존재도 진짜이길 바라게 되는 애틋한 작품이다.
난 도발적인 토론을 즐기는 거요, 지금 우리처럼 - <라스트세션>
무신론자와 유신론자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인류가 소멸할 때까지도 끝나지 않을 역사상 가장 치열한 싸움은 종교 논쟁일 것이다. 연극 <라스트세션>은 정신분석의 창시자이자 무신론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나니아 연대기>의 작가·문학 비평가·교수이자 유신론자인 ‘C. S. 루이스’의 신념 대결을 다룬 토론극이다. 작품은 아맨드. M. 니콜라이의 도서 <루이스 vs 프로이트>를 모티브로 마크 세인트 저메인이 집필했다. 전혀 다른 세계관과 사상을 가진 두 지성인이 만나 토론을 벌인단 가정과 상상력에서 시작된 작품이다.
영국이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기로 한 1939년 9월 3일, 프로이트의 초대를 받은 41세 루이스는 어수선한 거리를 지나 프로이트 서재에 도착한다. 그날은 구강암에 걸린 83세 프로이트가 사망하기 3주 전이었다. 60대부터 병마와 싸우고, 가족을 잃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탐구를 멈추지 않았던 프로이트. 그는 무신론자였던 루이스가 왜 ‘간교한 거짓말’을 받아들이게 됐는지 이해 못 한다. 전쟁에 참전했을 당시 트라우마를 간직한 루이스는 어느 날 갑자기 회심(신앙에 눈을 뜸)하며 신을 믿게 된다. 전쟁처럼 치열한 그들의 논쟁은 결론이 안 나는 것처럼 보인다. 서로를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들은 각자만의 괴물과 싸우며 인간적인 면모를 노출한다. 구강암에 걸린 프로이트의 괴물은 입안에서부터 시작되는 고통이다. 루이스의 괴물은 1차 세계 대전 참전 당시 죽음을 목격한 트라우마다. 프로이트의 고통은 그의 가장 내밀한 곳인 입에서부터 출발해 외부로 퍼져나간다. 루이스의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공습경보는 바깥에서부터 들려와 마음 깊은 곳까지 침투한다. 프로이트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루이스에게 보철판을 갈아 끼워 달라 부탁한다. 패닉에 빠져 방독면을 뒤집어쓰던 루이스는 공습경보가 끝나자, 신께 기도하며 마음을 진정시킨다. 신을 믿든, 안 믿든 나약한 인간일 뿐이란 강력한 공통점을 가진 프로이트와 루이스. 평행선을 달리던 그들은 서로의 세계를 조금씩 엿보며, 이해의 실마리를 찾는다.
학자로서의 프로이트를 동경하는 루이스는 그의 책상 의자에 몰래 앉는다. 프로이트는 루이스가 떠난 후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을 듣는다. 프로이트는 음악에 감정을 지배받길 싫어했고, 루이스가 좋아한다는 음악도 ‘교회 음악이겠지’라며 비아냥댄 사람이다. 사소하지만 놀라운 변화다. 타인을 모방한단 건 서로를 인간으로 이해하는 작은 문이 하나 열린 것과 같다.
세대도, 사상도 다르지만 서로를 존중한 그들은 언성을 높이면서도 자유롭게 사유를 교환했다. 구강암에 걸린 후 죽음을 늘 각오하고 있었을 텐데도 루이스에게 ‘다시 만나겠지, 어쩌면’이란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프로이트는 생의 막바지에도 깨달음을 얻었을 것이다. 그 깨달음은 사상의 대척점에 선 타인은 틀린 게 아니라 그저 나와 다를 뿐이란 것이다.
예술가와 함께 산다는 건 - <라흐 헤스트>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나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결국엔 이해한다. 뮤지컬 <라흐 헤스트>는 시인 이상의 아내였던 변동림, 화가 김환기의 아내였던 김향안의 일대기를 그렸다. 변동림은 이상과 짧은 결혼생활을 하다 20대 초반에 사별했고, 20대 후반에 김환기를 만난 김향안은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의 예술 세계를 세상에 알렸다. 변동림은 이상처럼 글을 썼다. 김향안은 에세이와 미술 평론을 썼으며, 김환기의 영향을 받아 말년엔 직접 그린 그림들을 모아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한국인이라면 모르는 이가 거의 없을 이상과 김환기란 예술가와 함께 살았던 아내이자, 자신 또한 예술가였던 변동림과 김향안은 동일 인물이다.
극은 변동림의 삶을 시간순으로 보여준다. 2004년 2월 29일, 김향안이 작고한 날에서부터 시작된 그녀의 삶은 시간 역순으로 진행된다. 성숙해지는 동림과 노인에서 시작해 젊어지는 모습의 향안은 삶이란 예술을 함께 창조한다. 꿈 많았던 동림은 이상을 사랑해 그의 아내가 되지만, 얼마 못 가 사별하며 상처받는다. 그 상처를 끌어안은 채 마음의 문을 닫은 동림은, 환기를 만나 서서히 문을 다시 열며 그에게 ‘당신의 아호(雅號 : 문인이나 예술가의 호나 별호를 높여 이르는 말)를 내게 달란’ 고백을 한다(‘향안, 그 이름을 내게 줘요’). 향안이란 아호를 동림에게 준 환기는 수화라는 아호를 새로 쓰게 된다.
동림 역을 맡은 배우는 처음엔 환기를 밀어낸다. 또한 결혼 3개월 후 일본 도쿄로 훌쩍 떠나버렸던 이상을 향안 역 배우가 함께 회상하기도 한다(‘그는 어떻게 그렇게’). 이 장면들은 상징하는 바가 크다. 과거는 현재와 미래의 밑그림이란 것. 극은 동림이자 향안이 인생의 변곡점을 넘을 때마다 그들을 만나게 한다. 향안은 동림을 애틋해하고, 때론 동림의 말이 향안에게 용기를 주기도 한다. 동림의 상처를 아는 환기는 처음에 그녀가 자신을 밀어냈을 때 이해한다며 묵묵히 기다린다. 극에서는 이처럼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 모습, 또한 내가 나를 이해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슬픔을 따뜻한 아름다움으로 바꾼다.
동림과 향안은 ‘예술가와 함께 산다는 건’이란 노래를 함께 부른다. 아프고 외롭겠지만 찰나의 행복을 간직하고 그 사람을 기억하는 게 예술가와 사는 거라며, 향안은 동림에게 ‘너의 느낌표를 믿어’라고 한다. 한국 문학사와 미술사의 거물인 이상과 김환기의 아내로 살았지만, 일생을 창작(문학·미술)과 평론을 병행한 동림이자 향안 또한 예술가였다. 그녀는 작품 활동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동반자였던 이들의 예술 세계를 세상에 알리는 데도 힘썼다. 또한 자신의 삶을 뜨겁게 사랑하며 평생 모험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기에, 동림과 향안은 그녀 스스로가 예술이 된 여성이었다. 그녀는 떠났지만, 그녀가 만든 예술은 세상에 뚜렷하게 남았다.
“잘 모르겠습니다. 아는 척하지 않겠습니다.”
<라스트세션> 루이스가 극 후반부에 하는 말이다. 극 초반엔 신을 믿지 않는 프로이트의 신념을 꺾어버릴 기세로 당당하게 주장을 펼치던 그는 뒤로 갈수록 혼란에 빠진다. 그 혼란은 상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감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동의할 수 없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왜’ 그렇게 말하고 행동했는지 알 것 같을 때, 그 사람의 내면을 봐 버렸을 때 마침내 그를 이해하게 된다. 루이스가 프로이트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고통을 목격한 것처럼.
하지만 타인을 온전히 이해한다고 확언하는 건 가식이고 위선이다. 나 자신도 이해 못 할 때가 많은데, 타인을 완벽히 이해하는 건 판타지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타인의 일부라도 이해하는 것, 그 일부를 붙잡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했단 것 자체가 가치 있는 행동이다. 나와 다른 저 사람을 외면하고 포기하는 게 아닌, ‘그럴 수 있어’라고 이해하는 것. 쉽지 않은 그 결심은 배려·존중이자 연민이며, 함께 하고 싶다고 손을 내미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한 다양한 감정들이 혼합된 이해라는 행위는, 사랑의 시작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