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도 ‘모나리자’를 보러 오셨나요?

루브르 박물관에서 본 ‘모나리자’의 인상은 다소 기대와는 달랐다. ‘그림이 파묻혀 있다.’ 이것이 세계적 대명작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그림 주변으로 셀 수 없이 많은 인파가 밀집되어 있었으며, 정해진 높낮이 없이 솟아 있는 고개들 사이로 겨우 그림의 상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사이사이 빼곡히 공간을 채운 사람들은 예외 없이 모두 스마트폰을 자신의 정수리 위 높이로 들어올려 그림의 일부라도 찍으려 안간힘이었다. 나 또한 그 인파 사이에서 땀을 흘리며 서 있었다. 결국 작품의 경이로움과 아름다움에 대한 감탄이 아닌, 더위가 슬긋 올라오던 초여름에 텁텁한 체취들을 맡으며 좁은 틈들을 기웃거리다 후퇴한 기억만이 남았다.
분명 루브르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 이외에도 수많은 명작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어느 다른 작품 앞에서도 위와 같은 ‘사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것이 ‘모나리자’와의 경험이 유독 기묘하게 남은 이유이다. 유럽 각지를 여행하며 여러 대형 박물관을 돌았지만,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오로지 하나의 그림을 위해 같은 포즈로 멈춰 있다가 틈을 파고드는 경험은 다시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모나리자의 매혹’, 그 원인을 찾는 것은 꽤나 흥미로운 일이다. 그림 ‘모나리자’는 규모에 압도당할 정도로 거대하지도 않았으며, 섬세한 묘사와 표현이 느껴졌지만 그만큼 특출난 묘사를 가진 작품들은 여타 다른 방에도 수없이 걸려 있었다. 그렇다면 눈썹 없는 한 여자의 초상이 사람들을 세뇌라도 한다는 것인가. 사실 이 물음에 대한 답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무수히 재정의되기를 반복하며, 희대의 난제로 남아 있다.
벤야민의 아우라, 그리고 그 균열
이 문제에 대한 개념적 바탕을 제시한 인물이 근대에 이미 존재하였다. 저명한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그의 저서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아우라(aura)’라는 개념을 정의한다. 아우라란 예술 작품의 ‘단 하나의 원본’이 지니는 현존감과 권위이며, 벤야민의 표현을 빌리면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멀게 느껴지는 일회적 현상'이다. 즉 아우라는 물리적 거리가 아니라 ‘근원적인 거리감’에서 비롯된다. 이것이 우리가 아무리 모나리자 앞에 서 있어도 알 수 없는 황홀함과 신비로움을 느끼는 이유이다. 미디어에서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풍기는 인물이나 대상을 두고 ‘아우라가 있다’고 칭하는 일상적 표현 역시, 이 개념이 통속화된 하나의 사례로 볼 수 있다. 모나리자의 방에서 사람들이 그림을 향해 몸을 밀어붙이면서도 결국 스마트폰 화면 너머로만, 혹은 수많은 뒤통수 틈새로만 그림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던 그 역설적 장면은, 이 거리감으로서의 아우라를 그대로 체현하고 있었다.
벤야민은 사진이나 영화와 같은 기술적 복제 수단이 이 아우라를 쇠퇴시킨다고 분석했다. 예술 작품이 지닌 ‘지금-여기’라는 유일한 시간적·공간적 현존성이 복제를 통해 대량 생산의 영역으로 편입되면서, 원본이 지녔던 신성한 종교적·제의적 가치는 사라지고 그 자리를 누구나 쉽게 보고 즐길 수 있는 대중적 전시 가치가 대체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루브르의 아트숍에서 무수히 프린팅된 모나리자 굿즈를 손에 쥘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땀을 흘리며 모나리자의 방에서 한 장의 온전한 사진이라도 남기려 고군분투하는 이유도 바로 이 ‘아우라’의 존재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 사진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 ‘내가 그곳에 있었다’는 서사적 증거, 일종의 인증샷이 되어 그들을 아우라의 순간에 고정시킨다. 이것이 모나리자의 방에 스마트폰을 든 손들이 일제히 치켜 올라가 있는 이유일 수도 있겠다.
백 년 뒤, 아우라는 어디로 향하는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의 초고는 1935년에 완성되었고, 이후 1936년 프랑스어판과 1939년 최종 개정판을 거치며 벤야민 스스로도 논의를 다듬어 나갔다. 우리가 살고 있는 2020년대와는 근 백 년의 간극이 있는 셈이다. 당시 벤야민은 아우라의 붕괴가 완전한 소멸이 아니라, 인간이 아직 인식하지 못한 새로운 감각과 지각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과도기’일 수 있다는 통찰을 남겼다. 그렇다면 그로부터 백 년을 바라보는 지금, 우리는 과연 어떤 영역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사실 현대의 예술 작용은 아직 ‘과도기의 과도기’라는 관점으로 바라보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계층은 넓어졌고, 이를 생산·유통·소비하는 매체와 주체 역시 다양해지며 예술의 지평이 확장되었다. 여기에 더해 예술의 민주화로 창작자와 소비자 모두의 예술에 대한 접근성이 한층 높아졌다. 이로 인해 벤야민이 제시했던 아우라의 붕괴와 그 과도기적 과정은, 오늘날 디지털·AI 시대에 이르러 해소되었다기보다 오히려 새로운 차원의 모순과 한계로 진화했다고 볼 수 있다. 벤야민이 경고했던 위협들이 현대에 어떻게 재현되고 변형되었는지, 그 양상은 여러 갈래로 갈라져 나타난다.
아우라의 동시적 퇴화와 강화
실제로 현상을 면밀히 살펴보면, 벤야민이 예견했던 일방향적 붕괴와는 달리 아우라는 퇴화한 동시에 강화되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고도화된 현대 기술사회에서는 이 두 흐름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소비문화를 예로 들면 이해가 쉽다. 생산 과정이 과거보다 정교해짐에 따라 이른바 ‘짝퉁’을 만들어내는 기술 또한 만연해졌고, 대중의 일부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기꺼이 이를 소비한다. SNS에서 레플리카 패션이나 인테리어가 떳떳하게 공유되고, 짝퉁인 줄 알면서도 구매하는 소비자층이 하나의 시장으로 자리 잡은 것이 그 단적인 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정교한 감별 기술로 짝퉁을 가려내려는 움직임과 ‘진품’을 찬양하는 세태가 공존한다.
소비문화에서 나타난 이 동시성은 예술의 영역에서도 동일하게 작용한다. 근대가 종교와 박물관 같은 공간을 중심으로 ‘제의적 공간’에서 ‘전시적 공간’으로 이동했다면, 현대는 그 전시적 공간을 넘어 또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다. 근대에 만연했던 ‘레플리카’, 즉 복제품으로 인해 현대에는 원본과 사본을 가려내는 인증 기술이 제도적으로 발달했다. 미술품의 소유 이력을 추적하는 ‘프로버넌스 시스템’이나 ‘NFT·블록체인’ 기반의 디지털 진품 인증이 그 구체적 사례다. 이러한 신기술들이 감정가 역할을 완전히 대체하지는 못하였지만, 기존의 추적 과정을 보완하며 자리 잡았다. 이러한 발달은 대중의 인식에도 영향을 끼쳐, 복제품에 대한 환멸과 멸시를 키우는 동시에 원본의 희소성에 대한 감각을 더욱 강화하게 된다.
특히 AI 기술의 등장으로 시각적 형태나 현상만으로는 진위를 가리기 어려운 시대가 도래했다. 이는 장 보드리야르가 말한 '시뮬라크르' 개념과도 맞닿아 있다. 그는 복제가 극단에 이르면 원본과 사본의 경계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초과실재'의 상태가 도래한다고 보았는데, 오늘날의 상황은 이 초과실재적 조건에 어느 정도 근접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반발 심리와 불쾌한 골짜기 효과 등으로 대중의 경계심은 오히려 극심해지게 된다. '레플리카', '기술복제', '투어리즘', '예술 민주화'라는 조건들이 뒤얽히며, 대중의 심리는 원본에 대한 아우라가 실질적으로 쇠퇴했음에도 오히려 그것을 향한 추구와 강박이 더욱 강해지는 역설적 결과를 낳았다. 즉 아우라는 더 이상 존재 자체에서 자생적으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인식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 되었으며, 그런 점에서 근대보다 한층 인위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사물에서 관계와 서사로
AI의 등장은 또 다른 변화를 낳았다. 그동안 소비자의 위치에 머물렀던 다수의 대중이 생산자가 될 수 있는 기술적 환경을 확보하게 되면서, 오히려 누가 만들었는지, 어떻게 만들었는지와 같은 작품의 ‘뿌리’가 중요해진 것이다. 요컨대 근대의 아우라가 ‘사물’에서 시작되었다면, 현대의 아우라는 ‘관계’와 ‘서사’에 깃들어 있다.
미술시장 안에서도 이러한 흐름은 뚜렷하다. 작가가 SNS나 브이로그를 통해 작업 과정을 공개하는 것이 작품 가격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고, 작품 자체보다 작가와의 만남이나 토크에 더 높은 프리미엄이 붙는 현상이 그 예다. 현대 미술이 개념미술에 가까워진 이유나 대중이 예술 앞에서 더 비판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 이유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혹은 이러한 변화가 미술관과 박물관 같은 전시 기관들의 마케팅 전략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는 비단 예술 작품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며, 현대의 총체적인 가치 평가 양상과도 어느 정도 맞닿아 있다. 과거 소비자는 제품의 스펙과 품질 __사물 그 자체__로 구매를 결정했다면, 현대 소비자는 브랜드의 창업 서사, 지속 가능성 스토리, 창립자 인터뷰 등 ‘이야기’를 함께 구매한다. 같은 품질의 제품이라도 브랜드 서사의 유무가 가격과 소비자 충성도를 좌우하는, '물건 자체'에서 '물건을 둘러싼 이야기'로의 이동이 발생하였다는 것도 흥미로운 예시이다.
심미화된 정치, 그리고 그 이후
결과적으로 벤야민은 이러한 아우라의 붕괴가 예술의 사회적 기능을 ‘오직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예술지상주의에서, 대중이 세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도록 이끄는 무기인 ‘정치적 변혁의 도구’로 전환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것이 아우라가 급격히 붕괴하던 시기, 즉 벤야민 당대의 진단이었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의 결론부에서 그는 파시즘이 대중의 감정을 동원하기 위해 정치를 ‘화려한 볼거리나 쇼’로 전환시킨다고 지적하며, 이를 ‘정치의 심미화’라 명명하였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파시즘이 예술을 이용해 사람들을 속이고 선동하는 것에 맞서, 대중이 세상을 바르게 깨닫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무기로 예술을 사용하는 ‘예술의 정치화’를 제시한 바 있다.
파시즘은 표면적으로 종적을 감췄지만, 이 구도는 오늘날에도 형태를 바꾸어 지속되고 있다. 과거 파시즘이 선동을 위해 예술과 이미지를 동원했다면, 오늘날에는 정치 세력과 빅테크 기업 같은 거대 권력의 주체들이 ‘AI’와 정교한 ‘알고리즘’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실시간으로 조작하고 여론을 흔드는 새로운 형태의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 정치의 심미화가 이제는 ‘정치의 알고리즘화’라는 더 은밀하고 정교한 형태로 옮겨간 셈이다. 이는 시각적 스펙터클의 남용이라는 점에서 예술적 측면과도 맞닿아 있다. 그들이 텍스트보다 이미지가 더 설득력 있다는 전략을 바탕으로, 대중들을 현혹하는 방법으로 감각적 이미지들을 도구로 삼는 ‘이미지 남용’ 방식과도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업들이 자사 제품의 실제 성능이나 가치를 피력하기보다, 인플루언서의 화려한 라이프스타일이나 감각적이고 몽환적 이미지를 숏폼으로 대량 유포하여, 소비자의 이성적 소비를 마비시키고 충동구매를 유도하는 마케팅들을 쉬이 찾아볼 수 있는 것도 그 중 하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욕망의 문제일까
다시 벤야민이 제시한 개념적 배경으로 돌아가 보자. 아우라의 붕괴는 개인이 사물을 ‘가까이로 끌어오려는 욕구’와 ‘주어진 것의 일회성을 복제의 수용을 통해 극복하려는 경향’에서 비롯되며, 여기에 복제 기술의 발달이라는 조건이 결합되면서 원본이 지녔던 물리적 제약이 무너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현상은 결국 인간의 욕구와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지 의문을 품어 볼 수 있다. 시대가 변해도 창작자이자 소비자로 기능하는 인간의 본질은 변하지 않기에, 가장 집중적으로 변화를 만들어내는 주체는 다름 아닌 인간의 욕망에 가깝다.
이러한 인식 변화의 요인에는 너무 많은 변수가 얽혀 있어 모두 수합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복제의 수단이 제재되지 않는 이상 아우라는 강화와 쇠퇴를 은밀하게 반복하리라는 점이며, 그 선택은 결국 우리에게 위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가치 평가는 다수의 가치가 함께 움직여야 비로소 우리가 인식할 정도의 가치 형성에 도달할 수 있다. 그리고 근대에 비해 현대는 예술의 민주화로 인해 대중에게 훨씬 넓은 선택권이 보장되어 있다. 이제는 권위와 가치가 더욱 유연하고 유동적인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 유동은 우리의 거대한 욕구를 통해 실현될 것이며, 앞으로 예술 작품의 가치 역시 ‘욕구-선택’의 굴레 안에서 다양한 양상을 번복하리라 예측해 본다.
그리하여 모나리자의 방은 앞으로도 언제나 북적일 것이다. 우리의 욕망과 선택이 모나리자의 권위를 만들어냈듯, ‘만들어진 아우라’는 앞으로도 우리를 무수히 매혹할 것이다. 우리가 그 앞에서 느끼는 경외감과 황홀경을 감각적으로 온전히 누릴 가치는 충분하지만, 이러한 권위의 기원을 꿰뚫어 보는 일은 우리를 또 다른 차원의 감각으로 이끌어줄 것이라 예고하며 글을 마친다.
[참고문헌]
- 발터 벤야민. (2007).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최성만, 역). 길. (원저 1935년 출판)
- 장 보드리야르. (2001). 시뮬라시옹 (하태환, 역). 민음사. (원저 1981년 출판)
- 최성만. (2009). 기술과 예술의 열린 변증법 — 발터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읽기. 뷔히너와 현대문학, 32, 183-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