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맥도날드와 예술작품 [문화 전반]

비장소를 장소화 하기
글 입력 2023.07.12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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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도날드, 현대의 대성당


 

2022년 맥도날드의 총매출은 500억 달러를 넘겼다. 이는 에콰도르 국내총생산보다 많은 수치이다. 세계 120여개국에 매장이 있는 맥도날드의 하루 평균 방문 고객 수는 7천만명을 상회한다. 세계통화 구매력지수는 맥도날드의 대표 메뉴 ‘빅맥’으로 표현되고, 맥도날드 매장의 유무는 발전 수준의 가늠자가 되었다. 매장의 상징인 ‘황금 아치’는 “천국의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곳” “현대판 대성당” “신성한 장소” 같은 말을 통해 종교적 심벌로 일컬어진다.

 

미국의 사회학자 조지 리처는 ‘맥도날드화’ (McDonaldization)라는 개념을 제시한 바 있다. 맥도날드화란 “패스트푸드점의 원리가 미국을 비롯하여 전 세계에서 점점 더 많은 부분을 지배하는 과정”을 말한다. 이런 맥도날드화의 특성은 ‘효율성, 계산가능성, 예측가능성, 통제’로 축약된다.

 

이를테면 소비자가 비교적 저렴한 가격을 지불하여 고픈 배를 ‘빨리 효율적’으로 채우는 것, 노동자가 ‘빨리 값싸게 효율적’으로 움직이며 일하는 것, 세계 어디서나 같은 맛의 햄버거를 먹을 수 있으리라는 예측가능함, 소비자와 노동자 모두 계산된 동선 아래 첨예한 통제를 받으면서 속도감 있게 움직이는 것 등이 맥도날드화의 특징이다.

 

이 맥도날드화에는 그림자도 존재한다. 미국에서는 저임금, 저기술, 중노동의 장래성 없는 직업을 ‘맥잡’(McJob)으로 부르기도 한다. 맥도날드는 생산과 소비를 아우르는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시대의 포디즘이라고 표현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비장소


 

맥도날드는 마르크 오제가 언명한 ‘비장소’의 전형이다. 비장소란 어떠한 종합도 이루지 않고 아무것도 통합하지 않으며, 단지 여정의 시간을 허가하면서 서로 간에 구분되고 대등하면서도 별 상관은 없는 개별성들의 공존을 허용하는 ‘초근대성의 공간’이다. 비장소는 이동수단과 인터넷 환경을 비롯해 구체적인 영토를 점령하지 않는 곳이면서 패스트푸드점이나 커피전문점처럼 불특정 다수가 스쳐 지나가는 공간을 모두 포함한다. 그런 점에서 맥도날드 역시 소비의 공간으로 마르크 오제가 주장하는 비장소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비장소는 개인의 능동적인 의미 부여에 따라 장소로 거듭날 수 있다. 비장소가 파편화의 공간이라면, 장소는 종합의 공간이다. 이런 장소화는 예술의 메커니즘과 유사하다. 예술 역시 산재해 있는 대상에 의미를 부여해 자아와의 합일에 이르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가령 시인은 풀밭의 꽃과 냇물을 보고 어떤 정념을 떠올림으로써 시작을 한다. 시를 통해 개별적 구성물이었던 사물들은 시인의 관념 속에서 통합을 이룬다.

 

현대의 지배적인 비장소인 맥도날드는 여러 예술작품의 무대 혹은 주제로 쓰였다. 의미화라는 예술의 특성상 작품 속에서 맥도날드 역시 나름의 의미를 부여받으며 장소가 되었다. 필자는 이 글에서 맥도날드와 관련된 소설과 시, 영화를 각각 한 편씩 소개해보고자 한다.

 

 

 

추억의 매개물


 

“인사이동을 통보 받았을 때 필용이 가장 먼저 떠올린 건 십육 년 전 종로의 맥도날드였다. 미국 유학을 준비한다며 어학원에 다니던 시절이었다. 필용은 언제부터 맥도날드에 가지 않았더라, 하는 생각에 맥락없이 빠져 들어갔다. 문책을 받아 영업팀장에서 시설관리팀 직원으로 밀려나는 순간에 왜 맥도날드 생각이 났는가. 그 공장제 프랜차이즈 정크 푸드가.” - 김금희, 「너무 한낮의 연애」, 문학동네, 2015, p9

 

회사에서 좌천된 필용은 문득 16년전 사랑하는 양희와의 한때를 보냈던 종로 맥도날드를 떠올린다. 그 시절에 먹었던 피시버거는 단종됐지만 여전히 맥도날드는 그 자리에 ‘있다’. 그 ‘있음’으로 인해 필용은 양희를 추억하고 둘은 재회한다. 죽은 인간관계는 맥도날드라는 공간을 통해 되살아난다. 물론 작중의 ‘있음’은 ‘아주 있음’보다는 ‘있지 않음’에 가깝다. 추억의 매개물인 메뉴는 단종되었고, 지금의 맥도날드에는 양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주 없음’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맥도날드는 필용에게 장소로 기능하며 모종의 의미를 가진다.

 

   

 

맥도날드 내셔널리즘

 

“2018년 3월 30일 / 맥도날드 경희대학교점이 폐점했다 / 어찌 이 날을 울지 않고 지나가랴? / 온통 맥도날드가 널려 있는 세상에 / 맥도날드가 없는 동네라니 / 우리는 노스트라다무스가 되었다 / 성소가 없는 동네에서는 / 손가락이나 귀가 하나씩 모자란 아이들이 / 성기가 없는 아이들이 / 항문이 없는 아이들이 태어날 거야 / 개와 고양이가 쥐를 낳게 될 거야 / 여기가 체르노빌이야 / 여기가 후쿠시마야 / 여기가 평양이야 / 여기가 락까야 / 한 컵에 두 개의 빨대를 꽂고 / 이마를 맞댄 채 얼음 재운 콜라를 마시던 곳 /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찾아온 / 우리의 보리수 / 거기서 우리는 새처럼 지절댔지 / 온통 맥도날드인 세상에서 / 우리는 장소를 잃어버렸다” - 장정일,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눈 속의 구조대』, 민음사, 2019

 

시제가 재밌다. ‘시일야방성대곡’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11월 20일 황성신문에 논설을 써서 그것의 굴욕적인 내용을 폭로하고 서명 당사자인 을사 5적과 일본을 비판한 장지연의 비분강개일 것이다. 하지만 장정일은 ‘이 날에 목놓아 우노라’라는 뜻의 이 논설 제목을 변주한다. 이 시대에 맥도날드는 조국의 위상을 지닌다. 국민국가가 상상적 요소를 동원하여 구성원을 통합하듯, 맥도날드 역시 마케팅으로 소비자에게 의미를 제공하며 종합의 단초를 제공하는 것이다.

 

시에서 맥도날드가 사라진 곳은 불모의 공간(체르노빌, 후쿠시마)이거나, 미국식 자본주의가 아직 가닿지 못한 지역(평양, 락까)이다. 그런 공간은 시인에게 절망으로 감각되는 곳이다. 그곳에서 장정일은 노스트라다무스가 종말을 예고한 것처럼 죽음에 대한 불안을 안고 살아야만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시에서 가장 눈 여겨볼 대목은 “슬픈 때나 기쁠 때나 찾아온/ 우리의 보리수”가 아예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맥도날드는 우리의 일상이 되었다. 맥도날드의 폐점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의 일상이 파괴되었다는 것이며 “장소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장소는 공간과 달리 그곳을 점유한 존재들의 실천적 행위로 인해 의미를 획득한 곳이다. 장소를 잃었다는 것은 그곳을 장소로 만든 존재의 행위가 의미를 상실했다는 말이다. 장소의 상실은 실존의 상실로 이어진다. 그 장소로부터 이탈한 존재는 자신을 증명할 역사를 다시는 회복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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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동무들의 자본주의 사랑

 

“톈진엔 맥도날드가 없어요.” - 여소군(여명)의 대사, 천커신, <첨밀밀>, 1996

 

등려군의 노래 제목이기도 한 ‘첨밀밀’은 여소군과 이요(장만옥)의 연애담을 그린 홍콩 영화이다. 작중에서 맥도날드는 ‘두 동무’가 사회주의의 망망대해를 건너 자본주의 홍콩의 물을 먹는 발판이자 인연이 싹트는 장소로 연출된다. 영화 초반 이요는 어눌한 영어 발음으로 버거를 주문하는 여소군을 이용해 이익을 취하고자 한다. 말만 서툴렀을 뿐 아둔하지 않았던 여소군은 이요의 의중을 알았음에도 적당히 속아준다. 타향살이로 외로운 그는 친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또한 영화에서 맥도날드는 자본주의, 개혁개방의 상징이기도 하다. 두 동무의 고향인 중국 본토에는 맥도날드가 없다. 맥도날드는 미국식 자본주의가 침투한 지역에만 존재하며 그런 점에서 홍콩은 자본주의의 아성이다. 냉전이 종식될 무렵 모스크바 붉은광장에 맥도날드가 입점했다는 사실은 맥도날드가 미국주의의 단면임을 보여준다.

 

 

 

인간은 의미화의 동물


 

상기한 세 작품에서 필용과 장정일과 동무들은 맥도날드라는 비장소를 장소로 변용했다. 이 지점은 상충하는 두 해석을 낳는다. 첫 번째는 누군가에겐 그저 머물다 가는 비장소도 다른 누구에겐 유의미한 장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관점을 따른다면 장소와 비장소는 교차되며 그 구분은 상대적이다.

 

두 번째는 스스로의 능동적 행위로 장소화 했다고 생각한 공간이 실은 체제가 강제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스타벅스가 ‘간편하면서도 고급스럽게 보이고 그 덕분에 자유로울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줌으로써’ 세계를, 특히 한국을 장악했듯 다국적 기업의 세련된 전략을 사유해 볼 필요가 있다. 이 견해의 연장에선 주체적 실존은 없고, 오직 ‘사회적 앙상블의 구성물로서의 개인’만이 있을 뿐이다.

   

둘 중 어느 주장이 진실에 가깝든 간에, 중요한 것은 인간은 끊임없이 의미화된 공간으로서의 장소를 갈구한다는 사실이다. 의미와 진리가 해체되어 가는 탈근대 시대에도 여전히 인간은 의미를 찾는다. 그저 ‘무’(無)로서 있지 않으려는 분투, 그것이야말로 인간과 동물이 구분되는 지점이다.

 

 

[최정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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