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은 관계 속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간다. 가족에게는 딸이 되고, 친구에게는 비밀을 나누는 사람이 되며, 연인에게는 사랑받고 싶은 존재가 된다. 관계의 단절이 단순히 한 사람을 잃는 일로 끝나지 않는 이유다. 누군가가 떠나면 그 사람과 함께 존재하던 자신의 일부도 사라진다.
연극 <플리백>은 관계가 하나씩 무너지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말하고 웃기는 한 여성을 통해 현대인의 고립을 들여다보는 작품이다. 플리백의 소란스러운 언어 이면에는 누구에게도 온전히 건네지 못한 슬픔과 죄책감이 자리하고 있다.
공연장에 들어서자 무대 위에 놓인 수십 개의 의자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크기와 높이, 색상과 형태가 모두 다른 의자들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를 차지한 채 연결되어 살아가는 하나의 사회망처럼 보였다. <플리백>에서 의자는 인물이 되기도 하고 특정한 장소가 되기도 하며, 플리백과 타인을 이어주는 관계의 매개체가 된다. 그녀가 어떤 의자에 앉고 누구를 향해 몸을 돌리느냐에 따라 보이지 않는 인물과 새로운 상황이 만들어진다. 수십 개의 의자는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많은 관계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보여주는 시각적 언어였다.

배우 김규남의 플리백

<플리백>을 찾은 직접적인 계기는 배우 김규남이었다. 평소 즐겨 보던 유튜브 채널 ‘띱’에서 그는 특유의 표정과 정확한 코미디 감각으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짧은 영상에서 보여준 리듬감이 긴 호흡의 무대에서는 어떻게 확장될지 궁금했다. 짧게 편집된 영상 속 캐릭터가 아닌, 홀로 무대를 책임지는 배우 김규남의 모습도 보고 싶었다.
<플리백>은 한 명의 배우가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건네며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1인극이다. 플리백은 연애와 가족, 친구 부(Boo), 파산 직전의 기니피그 카페에 관한 이야기를 쉴 새 없이 쏟아낸다. 김규남은 여러 의자를 오가며 목소리와 표정, 시선과 몸의 방향을 바꾸는 것만으로 무대에 존재하지 않는 인물들을 불러낸다. 해리와 대화할 때, 언니와 충돌할 때, 아버지와 새어머니를 마주할 때마다 서로 다른 관계의 긴장과 온도가 한 사람의 몸을 통해 구현된다.
모든 인물이 플리백의 기억과 재현을 통해 등장하기 때문에 관객은 철저히 그녀의 시선 안에서만 세계를 바라보게 된다. 그녀가 기억하고 싶은 모습과 외면하고 싶은 장면, 과장하거나 축소한 감정이 한 사람의 연기 안에 중첩된다. 1인극이라는 형식이 플리백의 고립을 더욱 선명하게 만드는 이유다.
작품은 스탠드업 코미디의 리듬을 바탕으로 전개된다. 플리백은 성적 경험과 실패한 연애, 가족과의 갈등, 면접에서 벌어진 황당한 사건까지 거리낌 없이 늘어놓으며 자신의 실패마저 웃음의 재료로 바꾼다.
영국식 정서에서 농담과 빈정거림은 감정을 직접 드러내지 않기 위한 우회적인 표현으로 자주 활용된다. 슬픔을 웃어넘기고, 외롭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더욱 태연한 얼굴을 한다. <플리백>의 유머 역시 플리백이 수치심과 상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세운 정서적 방어막에 가깝다.
배우 김규남은 자신의 플리백을 “가장 시끄러운 고립”이라고 표현했다. 플리백은 잠시도 쉬지 않고 관객에게 말을 걸지만, 정작 자신의 삶 속 인물들과는 진실한 감정을 나누지 못한다. 가족과 연인에게는 중요한 사실을 감추면서도, 극 중 인물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관객에게는 가장 은밀한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관객이 그녀가 솔직해질 수 있는 유일한 상대라는 사실은 이 유쾌한 독백을 역설적으로 쓸쓸하게 만든다.
하나의 이야기가 된 기억의 파편들

공연의 서사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다. 연애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가족에게로 이동하고, 카페에서 벌어진 사건을 말하다가 죽은 친구 부의 기억으로 되돌아간다. 각각의 에피소드가 깨진 유리 조각처럼 흩어진 채 제시된다.
이러한 파편적 구성으로 인해 중반부에는 사건의 흐름을 따라가기 어렵고 리듬이 다소 느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후반부에 이르러 흩어져 있던 이야기들이 하나의 비극을 향해 모이면서, 서사의 파편화 자체가 플리백의 내면을 보여주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플리백은 가장 아픈 기억에 도달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다른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처럼 보인다. 웃길 수 있는 에피소드를 먼저 꺼내놓고 그 아래 묻힌 죄책감에는 좀처럼 손을 대지 않는다. 관객을 웃기는 동안에는 자신도 비극의 중심을 바라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녀는 타인에게 비난받기 전에 먼저 자신을 희화화하고, 관계가 자신을 버리기 전에 스스로 관계를 망가뜨린다. 거침없는 성적 농담과 냉소적인 태도는 자유분방함의 표현인 동시에, 자신이 망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는 위장이다.
김규남이 플리백에게 “이제 그만 웃겨도 돼”라고 말해주고 싶었다는 인터뷰가 인상적으로 다가온 것도 이 때문이다. 플리백은 재미있는 사람이기를 멈추는 순간 자신의 수치와 슬픔이 고스란히 드러날 것이라고 믿는 사람처럼 보인다. 김규남은 정확한 코미디의 리듬을 유지하다가 짧은 정적과 흔들리는 표정만으로 그 방어막에 균열을 만든다. 관객의 웃음이 멎는 순간, 플리백이 필사적으로 감춰온 외로움이 비로소 말을 시작한다.
의자가 쓰러진 뒤 남은 한 사람

작품에서 가장 강렬했던 장면은 무대 위 의자들이 하나씩 쓰러지는 순간이었다. 친구 부는 세상을 떠났고 남자친구 해리는 플리백을 떠났다. 파산 직전이었던 기니피그 카페는 결국 문을 닫고, 단골손님 조 역시 더는 그곳에 머물지 않는다. 카페에 데려온 남자에게 걷어차인 기니피그 힐러리는 심하게 다치고, 플리백은 울면서 힐러리를 품에 안은 채 직접 숨을 끊는다.
공연 내내 의자는 플리백이 타인과 관계를 맺는 장소였다. 의자가 쓰러지는 장면은 자신을 구성하고 있던 관계들이 모두 무너졌다는 사실을 눈앞에서 확인하는 순간이다. 사회망처럼 보였던 의자들은 단절된 관계의 잔해가 되고, 그 폐허 한가운데 플리백만이 홀로 남는다.
힐러리의 죽음은 그중에서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장면이었다. 왜 다른 방법을 찾지 않았을까. 힐러리는 죽은 친구 부가 남긴 마지막 흔적이다. 그런 힐러리의 죽음을 자기 손으로 완성하는 행위는 남은 애착마저 파괴함으로써 스스로에게 벌을 내리는 자기처벌에 가깝게 보인다.
플리백은 가장 친한 친구인 부의 남자친구와 관계를 맺었고, 이를 알게 된 부는 남자친구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위장 교통사고를 시도하다 세상을 떠났다. 플리백은 이 사실을 곧바로 고백하지 못하고 농담과 다른 기억 사이에 숨겨두었다가 공연의 말미에야 진실을 드러낸다.
그녀는 자신이 짊어진 죄책감을 감당할 언어와 방식을 찾지 못한 사람에 가깝다. 부의 죽음 이후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 채 관계를 망가뜨리고, 타인의 애정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며, 자신에게 남은 소중한 것들을 하나씩 잃어간다.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자신의 삶 전체를 서서히 무너뜨리고 있었다.

“다들 언제쯤 깨달을까. 우리가 가진 건 결국 서로뿐이라는 걸.”
플리백은 욕망하고 실패하며, 상처받는 동시에 타인에게도 상처를 준다. 작품은 그런 그녀를 갑작스럽게 구원하거나 반듯한 사람으로 변화시키지 않는다. 그저 모든 관계가 쓰러진 자리에서도 한 인간이 여전히 살아 있고,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건네고 있다는 사실을 남겨둔다.
우리에게도 쉽게 털어놓지 못하는 어두운 구석이 있다. 대부분은 그것을 능숙하게 숨긴 채 괜찮은 사람처럼 하루를 보낸다. 플리백은 특별히 이상해서 외로운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감추고 살아가는 고립을 더욱 소란스럽고 노골적인 방식으로 드러내는 인물인지도 모른다.
배우 김규남은 한 사람의 몸과 목소리만으로 웃음과 침묵, 욕망과 수치심, 고립과 연결을 오가는 플리백의 내면을 밀도 있게 구현한다. 한 사람이 무대를 가득 채우고 다시 텅 비게 만드는 1인극의 힘을 경험하고 싶다면 연극 <플리백>을 만나보길 권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