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쓸모’라, 나는 인식의 저변이 확대되는 것으로부터 느껴지는 놀라운 확장감과 고양감이라는 열매에 더불어, 열매 떨어진 자리로부터 끝없이 새로 나는 생장의 기쁨을 논하겠습니다. 나는 멈춘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어느새 과거는 아득히 멀어져 있습니다. 그대도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나아가 독서라는 행위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을 때, ‘아직도 자신의 이해와 인식 너머에 무언가 더 나은 것이 있으리라 기대하는 자’들은 모두 개별자로서, 외따로이 떨어진 길로부터 같은 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말해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몰이해와 외로움은 이 여정으로의 최초의 입장권이자, 그 여정을 유지하는 조건이며, 앞선 인식론에 따르면 이 여정이 수반하는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VI.
여기까지 활자의 길을 눈으로 좇아왔던들 여전히 적응, 경쟁, 무한한 자유로부터 가슴 아픈 것들을 연상하고 있을 줄로 압니다. 도태되고 소외되는 것들, 그러나 잔인하게도 이마저 자유라는 낱말 안에 포괄됩니다. 그러나 자유란 필연히 경쟁과 승패를 내포하는 낱말, 20세기를 양분한 두 가지 이념이 이미 증명한바. 이 구도 하에서 자유란 차악인 거 같습니다. 최악을 면하기 위해 택할 수 있는 전부. 그러나 언제나 어려운 것은 참이 양가적인 두 항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고, 역사적 변증의 시간은 너무 느리며, 그 기나긴 시간의 틈바구니에서 지금 이 순간의 우리들이 오래 고통받는다는 것 정도. 진리는 도달할 수 없는 기치고, 변증이 우리가 진리를 향해 가까워질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라면, 유토피아의 끝내 도래함은 잘 안 믿어집니다. 나는 나만의, 내 세계로만이 음미할 수 있는 참된 것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해하지 못해도 좋은 것입니다.
‘왜 우리는 끝없이 내달려야만 하는가요’라는 필연한 질문을 낳는 것은 대부분 시대의 소산. 그러나 시대의 거대한 흐름 위에서 내달음을 지속하는 것도, 그것을 멈추는 것도 개인의 자유와 선택. 택할 수 있는 게 일신 뿐이라면, 내가 고민할 수 있는 것도 그 범주 안의 것으로 제한하려 합니다. 그러므로 포기하는 자유를 생각합니다. 결국 인간이 스스로 떨치고 일어서 제 손으로 빚어낸 것들로부터만 진실로 위안받고 그 안에 거하며 안식한다면 ‘포기할 자유’라는 낱말도 그리 언어도단은 아닐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에게 자주적인 포기라는 선택지가 아직 열려 있으리라 믿습니다. 내 삶도 숱한 선택과 집중과 포기로 이루어져 있으니까요. 누군들 그러지 않겠습니까, 누구의 삶이라고 감히 그 무엇도 잃지 않고, 온통 누리기만 할 수 있겠습니까. 젠장, 그런 척을 하는 사람들의 기망만이 서로를 속이고 있을 뿐이 아니렵니까! 다만 여전히 공평하게도 그는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그가 잃어버리는 것은 그가 채 모르는 것이며, 헤아리지조차 못할 것들. 그러므로 그에게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 인식되지 않는 것은 그의 세계 속에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그것을 한 인간의 삶 속에 현현할 수 있는 것은 시간뿐일 것입니다. 즉, 시간의 문제입니다.
애초에 포기하지 않고 다 끌어안은 채 우리는 살아갈 수나 있겠습니까. 욕망은 비교를 통해 증식하고, 한편 세계는 더 연결돼 인식 속에는 거진 기계적으로 비교의 제재가 주입되고 있다지만, 그럴수록 필요한 것은 인식하고 분별하고 버리고 포기하는 능력이리라 생각합니다. 아, 정말 짜증난다구요, 원치 않아도 인식 속으로 비교 대상이 밀려들어오는 기분은 최악입니다. 어차피 사지도 못 할 동탄 부동산 가격처럼 몰라도 되는 것과 모르는 게 나은 것들이 계속해서 주입되는 판에 심지어 ‘정보상’, 즉 정보를 팔아 빌어먹고 사는 이들은 그 시류에 합세해 불안마저 조장하니 원 참. 유튜브를 열면 당장 내일 세계적 금융위기나 핵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할 것 하나 없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요란하게 까무러친들 개중 어느 것에도 실천의지라든지, 자기 발언에 대한 책임감 같은 것 하나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난 저 무책임함이 정말 싫습니다. 유튜브의 요란한 치장 뒤로, “아님 말고”라며 이죽이는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아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심경입니다.
이 시대에 자신의 고유한 세계를 유지하는 것은 기실 방어전과 같이 지켜내는 일이며, 그것만으로도 너무 많은 심력을 소진합니다. 포기의 필요가 이 대목에서 대두될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곁가지를 잘라내, 하나의 소망을 분명히 하는 것. 나는 자유라는 이름의 광장, 길도 이정표도 주어진 방향도 없는 숲길을 걷기 위해 필요한 것이 다만 이뿐이라 생각합니다. 미리 주어진 것들을 헤아려, 어느 것을 선택할지 고심하는 것. 어느 방향도 분명치 않아 불안하고, 주어진 것으로서의 선택지란 영영 미흡하다지만, 오직 그 길을 걸어내기 위해 반대편으로 무분별히 뻗어나가는 미련과 망설임을 잘라내는 것. 무언가를 얻기 위해 무언가를 포기해야 하고, 무언가를 얻었기에 무언가를 포기해야만 하는 것. 달콤한 사탕 같지 않은 이것, 그러므로 결코 저절로 희구될 리 없는 이것, 그러나 그때 가슴을 뒤집어대는 미련일랑 체념과 씁씁한 뒷맛으로 덮어둘 줄을 아는 것은 자유의 고통을 온몸으로 관통하며 살아간 사람, 그 마음속에 어렵사리 열매 맺는 산물일 것이고 ‘멋진 신세계’가 사람들로부터 빼앗아버린 바로 그것입니다. 일체 고통의 가능성마저 앗아버리자, 그들 신세계인은 유아가 되었습니다. 강아지가 된 것입니다. 야만인의 눈에 비친 신세계인들은 한심하게 퇴화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조금의 요동조차 일 수 없을 만큼 경악스럽도록 무관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세계에는 자유인이라는 대립항으로서의 표상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 신세계의 총통이 책을 말살한 까닭이 바로 이 때문 아니겠습니까.
내가 이해하는 바가 위와 같으므로 ‘왜 가슴 아픈 포기를 종용하느냐, 왜 우리는 있는 그대로 행복할 수 없느냐’ 라는 질문을 나는 언제나 되돌려 보냈습니다. 있는 그대로 살아가다간 좌초할 꼴인 걸요, 뭘. 차라리 애초 지금 우리가 가슴 뻑적지근하게 희구하는 것은 이전에는 꿈도 못 꿀 것들이었음을 나는 생각하렵니다. 다만 우리가 무엇인가를 인식한 뒤, 거기에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선 그것에 대립하는 것으로서의 비교항이 필요하다면, 어느새 쟁점으로부터 당연한 것으로 전락해 의식 배면에 방치되고만 이러한 ‘좋음’들, 이미 빛 바래 잊힌 그것들에 문제의 열쇠는 숨어있다면, ‘인식적 지도’의 필요성은 여기서 다시 한번 대두합니다. (프레드릭 제임스 -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 자본주의 문화 논리)
시대 전반에 걸친 생활의 편리는 우리가 스스로 꾀한 것도 힘들여 얻어낸 것도 아니기에 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기 일쑤이나, 그것을 얻었기에 포기해야 하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엔 곧 ‘그것은 내가 얻어낸 것도, 선택한 것도 아니므로 나의 전적인 소관이 아니이다’라는 반론이 뒤이을 것이고 그 논지란 아마 전형적일 텐데, 여전히 나의 대답은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포기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나는 이러한 결정된 문답, 새로울 것 하나 없는 문답의 지루한 연쇄만을 낳는 일련의 질문들을 ‘꿈꾸는 자의 고통’이라는 역설로 바꾸어 바라보는 편이 더 마음에 듭니다. 그리고 일전 그것이 무언가를 희구할 수 있게 되었기에 생겨나는 고통이라면, 우리는 왜 그것을 얻지 못하느냐 묻는 바에는 왜 고통 속에도 나는 그것을 이적지 붙들고 있는가 바꾸어 묻겠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질문을 켜켜이 쌓은 그 위에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여전히 꽉 쥔 그 두 손을 놓지 못하는 것은 미련인가, 꿈인가!’ 실은 이는 아직도 내게 욱여넣고 있는 질문입니다. 나는 도망치고, 나는 계속 쫓습니다.
인간의 꿈을 긍정합니다만, 그때 꿈을 바라보는 내 시선이 온유하다고는 말 못 하겠습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 무언가를 포기해야만 한다면, 단 하나의 곧고 분명한 높은 소망은 어림셈으로도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을 것 같아서 말이죠. 이 부분, 반론도 얼마간 헤아리나 정녕 포기할 것이 없거나 적은 꿈이었더라면 나로선 온통 축하할 일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높다란 꿈은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요하지 않겠는가, 그 꿈을 좇는 일이란 무거운 선택의 연속이라면, 그 뒷모습은 무게에 짓눌린 듯한 힘겨움으로 다가옵니다. 나는 꿈을 예찬하지만, 그 과정 놓인 그 길을 비단처럼 보드라이 여기지는 차마 못 하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모습을 찬란함이라 표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예우는 여기에 다 바쳤습니다.
왜인즉 사람에 누구나 가슴 깊숙한 곳으로부터 소원하는 단 한 가지의 목표가 있을 테요, 그것을 뭇 욕망의 어지러운 가운데에서 분별하는 일, 즉 발견하고 스스로에게 증명하는 것은 셀프입니다만, 그것을 발견했다 하여 곧바로 약속의 땅에 도달하는 것도 아니더이다. 오히려 그것을 발견하는 일이란 첫 번째 관문을 열어젖히는 행위이고 마치 안개 자욱한 산기슭을 타고 오르는 듯이, 하나의 구름층을 지나자마자 그가 알게 되는 것이란 그 너머로 아직도 걸어가야 할 더욱 높은 산이 있다는 사실 뿐이었습니다. 소망으로 이어지는 꿈길은 한 가지 수수께끼를 해결하자마자 또 하나의 수수께끼를 내걸고, 그것은 갈수록 까다로운 것일 텝니다. 그러므로 꿈꾸는 자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두 다리의 강인함과 집념하는 마음의 끈질김 뿐일 것이고, 이게 시지프 신화의 우스꽝스러운 비유보다 훨씬 마음에 듭니다. 무의미한 돌덩이 굴리기가 직유할 수 있는 것이라곤 내 삶의 근저에서 찾기 어렵습니다. 회사에서 하기 싫은 일을 한다라? 거기에도 월급이란 목적이 있는 딴에, 내 몸소 그 비유를 적확히 이해하기란 불가합니다. 무의미라, 무의미라, 정녕 온통 무의미한 것이, 단 한 톨의 의미조차 내포하지 않는 텅 빈 사건이 내 삶으로부터 하나라도 찾아낼 수 있었던가. 나는 모르겠습니다. 나는 욕망합니다. (알베르 카뮈 - 시지프 신화)
비극이 욕망으로부터 꽃핀다면, 삶은 비극입니다. 무엇을 바라고 꿈꾸는 대가로써 강제로 떠안게 된 상실의 가능성. 그러나 욕망의 그림자를 이유로 욕망을 버리라 하기보다는, 보다 영리해지라 스스로 주문합니다. 보다 좁고 정확히 욕망하라고 주문합니다. 얻을 수 없는 것은 버리고, 필요 없거나 방해되는 것도 버리고, 단 한 가지만을 온몸으로 추구하라 주문합니다. 인식의 경계 너머, 즐거운 지식의 가능성을 꿈꿉니다. 글은 그 경계 너머로 가닿는 계단. 하나의 글이 태어나기 위해, 그 재료로써 필요한 사유는 그보다 많을 테고, 허다한 사유를 촉발하는 것이 삶에의 불만족이라면, 겨우 이 정도의 글을 위해 필요한 불행이란 이름의 불만족은 그 얼만하겠습니까. 그러나 난 이 안에 한 톨의 비극도 전시하지 않았습니다. 고통이 사람의 세계를 파괴하는 위기라면, 끝내 무너지지 않고 살아남는 인간은 깨어진 세계로부터 더 넓은 다음의 세계를 마주할 텝니다.
그러므로 무너지지 않는 정신, 숱한 내외의 훼방에도 집념을 온존하는 마음의 끈질긴 힘을 긍정합니다. 그것을 세계로부터 지켜내느라 너무 굳어진 내 가슴을 긍정합니다. 완고한 마음이 그 그림자로부터 절로 잃어버리게 되는 것은 유연함이라, 놓치게 된 뭇 기회와 그를 따라 흘러버린 모든 시간까지도. 허다한 실패와 실기와 착오와 착각이 있었으며, 스스로 완고한 만큼 뒤늦게 밝혀지는 실패의 무게, 즉 후회는 단번에 육중하게 가슴의 비탈을 따라 쏟아집니다만 다 좋습니다. 견디는 힘만이 내게 충분하고, 나는 영영 운동 상의 존재이니 후회의 무게가 충분히 쌓여 가슴을 짓누르는 때마다 깨달아 그것을 대면할 것이고 아직 끝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언제나 한 박자 늦게 대면해 수정해 왔고, 지금도 큰 바위가 내 가슴에 자리하나 개의치 않습니다. 즉 나는 인간의 강인함을 예찬합니다. 그것을, 그것만을 긍정합니다. 그 무엇도 실패하지 않고, 그 무엇도 포기하지 않는 선택은 연역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까닭에.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버겁지만 감당할 수 있는 고통, 단계적으로 주어지는 고통의 무게입니다. 내가 염려하는 것은 이것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오직 이것의 순서. 시절을 따라, 사람에겐 기어이 버텨낼 수 있는 고통만이 주어졌으면.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끝내 그 고통을 긍정할 것이며, 심지어 그 사람을 대신하여 고통에 축복의 문장을 엮어 줄 겁니다.
내가 진정으로 사람에 더불어 누리고픈 희열은 이것, 정복한 고통과 개척의 감각이자 같은 높이에 이르러, 뒤돌아 만끽하는 자유의 결과입니다. 몇 번의 구름층을 지나야 할지 미리 헤아릴 수는 없지만, 불안의 고통에 한편 우리가 두 발로 개척해 두 눈으로 밝히는 만큼 산은 서서히 제 본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고통에의 인식은 거기 요구될 필수불가결한 대가일 뿐. 그러므로 삶과 소망과 꿈이 끝없는 방황과 선택과 관철을 쌓아 오르는 등반 서사의 비유와 닮았고, 잘 닦인 등산로는커녕 궂은 비가 녹여낸 낙석으로 가득한 길이라면, 다시금 내게 필요한 것은 선택과 집중인즉 분연히 포기하고 떨쳐내는 능력일 것이고, 그러므로 내 소망이 암암리에 요구하는 산 제물로써의 포기를 나는 가능한 한 많이, 미리 헤아리려 듭니다. 그러므로 질문은 ‘왜 달려야만 하는가’가 아니라, ‘멈추고 자신의 페이스를 찾기 위해 무엇을 포기해야 하며, 무언가를 포기하기에 앞서 무엇을 인식해야 하는가’의 문제이리라고 갈무리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사변 논리가 가리키는 단 하나의 것이란, 내가 자유를 긍정한다는 단 하나의 명제로 수렴합니다. 이렇듯 내가 긍정하는 것은 자유라는 이름의 혼돈이고, 그것은 내가 이해해 표상하는 세계 자체, 즉 나의 세계이며, 그때 내 긍정이 가리키는 것은 모든 걸음걸음 앞에 놓인 선택과 책임과 고통의 무게를 포괄합니다. 그것을 전적으로 좋다 여기는 게 아니라, 그러한 세계의 역학을 이해합니다. 그러므로 포기와 실패와 방황마저 긍정합니다. 그리고 ‘멋진 신세계’라는 손쉬운 비유를 들어, 선택의 자유가 이미 포괄하고 있는 도태마저 수용합니다. 마치 소설의 마지막 장처럼, 아직 영영 끝난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후회가 쌓여 막대한 무게가 돼 내 빗장을 두들기는듯이, 살아남을 수 있는 한 인간의 고통은 그의 세계를 대신하여 부수고 그 이상의 세계를 현현합니다. 그러나… 이상은 내 인식의 세계에 지나지 않고, 여전히 이것은 양극화, 구조적 불평등, 착취와 박해 등을 충분히 포괄하지 못합니다. 아직 내 세계의 속성이자 그 표정은 실패와 포기를 불허하는 사내의 얼굴, 내 얼굴 만큼이나 너무 가혹합니다. 여전히 내가 이해해야 하는 세계가 많이 남았습니다.
VII.
선물의 효용이 상대의 필요에 달려 있고, 지금 그대가 찾고 있는 것이 ‘인문학의 쓸모’라면, 나는 그것을 선물로 하고 싶었습니다. 훤칠하게 잘 쓰인 책을 찾아내면 그 표지 쪽에 4장 분량의 편지나마 곁들여 안기려 했건마는, 3시간가량 교보문고를 서성였음에도 마땅한 책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 내내 나는 인문학에 대해 생각합니다.
아직은 인문학을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과 대답’이라고, 다소 포괄적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대상인 인간이 다소 자유로운 존재이자 개성적인 존재인 한 그것에 천편일률적인 정답을 내릴 수 없음이야말로 이 분야의 딜레마 같습니다. 그래서 누구에겐 참인 것이 누구에겐 거짓이고 누구에겐 감동인 것이 누구에겐 지루함이 될 수 있는 것이라고, 다소 연역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인문학은 주제 별로도, 대상 별로도 파편화되는 것 같습니다. 예컨대 ‘철학’과 ‘심리학’이라는 쌍벽을 필두로 문화, 기술 등 주제별로 국소화돼 그로부터 하나의 유의미한 주장을 도출하는 듯한, 특히 요즘엔 AI가 눈에 띕니다. AI를 아직 우리 인류가 속들이 이해하는 것 같진 않은데도 벌써부터 쏟아지는 책들이 신기합니다만, 결국 인문학이 영원한 질문이고, 달리 말해 가설에의 자가 문답이자 사고 실험이라면 이 또한 충분히 설명됩니다.
과학 분야에서도 ‘하나의 이론’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죠. 거시 세계와 미시 세계를 동시에 충족하는 단 ‘하나의 이론’. 인문학 분야에서도 그와 같은 궁극적 목표가 없을 리 있겠습니까만, 그걸 찾아내기 전까지는 파편화되는 것도 당연지사이겠습니다. 연역적 진리가 불가해하다면, 귀납적으로 그것을 시도해 봄 직하지요. 다만 수학에 공리가 있고, 과학에는 그보다 약하게나마 패러다임이랄 게 있다면, 인문학에 무엇이 있을지를 궁금해합니다. 구시대에는 도그마와 보편 명제라는 것이 존재했다던데, 지금은 어떨런가요. 또 다시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 자본주의 문화 논리’가 떠오르는 구절입니다. 여기선 ‘거대 서사의 종말’ 정도로 표제화합시다.
동서양 일반을 논하기에 내 지식이 일천하니 대충 뭉뚱그려, 기독교와 유교 정도로 대표화합니다. 종교적·일반사회적 도그마가 존재할 적엔 그것을 대지로 하여 철학과 인문학의 나무는 거침없이 생장하였던 것 같습니다. 모르긴 모릅니다만 이따금 스치듯 접하게 되는 고대와 중세 철학, 그 눈부신 확신의 논증들을 기억합니다. 현대인의 눈으로 바라본 저 확신은 한없이 낯설기만 합니다. 인류 역사 전체를 하나의 일관된 방향으로 설명하려는 시도, 거대 서사는 이미 사라진 것을 넘어 해학적인 것이 되어 있었습니다.
바야흐로 다양성의 시대가 열린 것을 두고 나는 양가적으로 생각합니다. 능동적인 것으로 논하자면 ‘가능한 한 많은 것을 포함하려는 시도’라 할 테고, 수동적인 것으로 논하자면 ‘단 하나의 보편적인 도그마가 사라진 뒤의 아노미’라 할 텝니다. 인문학 주제에 있어 모두가 동의하는 최소한의 기준이라, 인간성일까요, 글쎄요. 아마 여기가 바로, 그대와 나의 사상이 가장 전면에서 대치하는 지점이겠습니다 그려. 그대의 인문학적 여로는 바로 이 인간성이랄 것을 자기 안으로부터 발견하고 도출하고 논증하는 것일 반면 나의 그것은 낙관적 염세주의를 따릅니다. 나는 이 편에 서 그대를 응원합니다. 어느 하나의 올바름이 그 반대편의 실패를 함의하지 않습니다. 그건 믿음이 나약한 인간의 논증 방식. 겨우 그러한 빈한한 논증으로 나 충족될 수 없고, 겨우 그러한 나약함만을 붙잡을 만큼 내 이지의 두 손이 허약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대가 자기 안에서 발견하게 될 주관적 세계를 온전히 기대합니다.
일단의 현황으로 미뤄보건대 아직 인문학에는 본격 이론을 펼치기 위한 공통의 대지, 공리와 패러다임에 준하는 최소성 요건이자 뭇 주장의 정당화를 대신해 줄 명제적 뿌리가 따로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몹시 시건방진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만약에 그렇다고 한다면 인문학이 아직까지, 아마 반쯤은 체념으로 찾고 있는 것은 바로 그 공통의 대지이며, 그러므로 인문학은 아직 가치중립적인 쓸모, 가장 널리 적용되는 것으로서의 쓸모를 논하기엔 이른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인문학적 주장과 논의의 특성은 대상적이거나 지시적인 것이 아니라 메타적인 것이고, 가치와 효용이란 전자로부터 도출되는 것일 테니까요. 또는 주제를 국소화하여 특정한 좁은 원을 그려둔 채, 그 안에 포함된 것만을 가리키는 것일지도요.
이 분야엔 정답이 없기 때문에 무수한 질문과 가설만이 남을 뿐이고, 그것의 다른 이름은 다양성입니다. 질문은 끝없이 발명될 것이고, 그 질문의 너비만큼 세계는 다양성을 산술적으로 확보하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현행 인문학의 쓸모에 대한 나의 또 한 가지 가설은 ‘가능한 한 많은 다양성의 확보’에 있고, 인문학 전체의 저변과 구획은 계속해서 넓어질 것이며, 개별 인간에 해당하는 무언가는 그 안에서 하나쯤은 발견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오- 마치 우리의 ‘부적응자 안식처 모임’ 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한편 문제는 전혀 색다른 것에 놓입니다. 바로 그 ‘발견’이 문제인 것이지요. 마치 오늘 그토록 많은 책 속에서 내게 걸맞은 단 하나의 책을 찾아내지 못한 것처럼, 책이 너무 많아 내 눈이 얼른 잡아낼 수 있는 것은 베스트셀러와 마케팅 도서뿐이었다는 사실, 그래서 아직 찾지 못했고, 앞으로도 찾아내기 어렵다는 바로 그 사실이 이 지점에서 본격 문제로 등극합니다. 그래서 한편으론 큐레이션이라는 것이 하나의 독자적인 가치를 획득하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친애하는 이동진 씨의 추천 도서도 곧잘 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라지만 말입니다. 이래저래 까다로운 독자인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찾지 못해 못생긴 투레질을 할 바에는 스스로 써 내리기로 합니다. 내 이 조악한 주장쯤이야 세상에 이미 한참도 전에 발명되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만, 무수한 정보의 홍수 속에서 내가 바라는 바로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 본격 문제라면, 나의 방식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효용을 갖게 됩니다. 쓰는 행위에는 공수가 많이 든다지만, 아무튼 가장 확실한 방식 아니겠습니까? 내 취향에 정확히 맞는 건 내가 쓴 글입니다. 또는 더러 제 자식 불알 만지기처럼 콩깍지의 효과일지도요, 사실 무어든 나로선 좋습니다.
나와 주제를 같이 하는 책쯤이야 얼른 찾기에도 어렵지 아니하며, 그 논거야 말할 것도 없이 풍부합니다만, 어째 하나 같이 손이 안 갔습니다. 나는 ‘저것’이 아닌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 글’ 같은 책을 원합니다. 그걸 어떻게 표현해 볼까, 어떻게 양자 간의 차이를 포착해 비교적 드러낼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만, 일단 다음과 같이 일축하렵니다. ‘사유의 결과가 아닌 과정이 드러나 있는가, 그 과정상의 딜레마와 그 딜레마에 대한 논증이 깊숙이 다루어지는가, 마지막으로 하나의 주장이 두 가지 결과를 입체적으로, 공평히 드러내는가.’ 내 생각에 베스트셀러 섹션에선 찾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포맷이 하나같이 똑같았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의 닮아있음은 거기 내재한 모종의 원리를 우회적으로 가리킵니다.
우스개로 달리 표하자면, ‘네가 원하는 것은 철학이나 전공 서적에서나 진지하고 심도있게 다루거라, 여긴 전공수업이 아니라 교양수업이니라’ 하고 책들은 말하는 듯합니다. 그러므로 차라리 책을 잘 모르는 내가 섭했습니다. 좀 찾고 올 걸 그랬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그저 결과를 원하지 않습니다. 요즘의 책들이 즐겨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사유의 외주화”를 나 또한 원치 않습니다만, 재미있고 또 재미있게도, 그 책들이 준엄하게 경고하며 가리키는 바를 책이 자가당착적으로 반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거기 주장과 근거가 두루 있다지만, 과정은 따로 없습디다. 달리 비유하자면, 물고기 잡는 법이 없다는 생각. 그렇다면 이 또한 결국 “사유의 전문 외주화”가 아니고 무엇인가 나는 속으로 묻습니다. 과한가요, 그러한 것쯤은 책 속에서 스스로 도출해야 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과업일런가. 모르겠습니다만 여전히 나는 나를 생각하게 만들기를 원합니다, 곤란하게 만들기를, 어려워 기쁜 탄성을 내지르게 하기를.
응당 이미 나는 내 낚싯대를 지니고 있으니까요. 내 것이 진리가 아닌 것쯤은 당연합니다만, 똑같은 원리로 책의 그것도 진리가 아니라는 것은 자명합니다. 나는 책의 권위에 쉬이 당해줄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나는 쥐뿔도 없이 호기로운 독자요, 증명한 그 무엇도 없이 당돌한 독자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나의 오만에 있다기 보다는, 아직 내가 증명하지 못했다는 소박한 사실에 놓여있을 듯싶습니다.
VIII.
결국, 선물의 효용이 상대의 필요에 달려 있다면, 나는 교보문고 책으로는 마땅한 것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정성 가득한 노동, 활자의 종이학 접기로 선물을 대체합니다. 한편 돈으로 못 사거니와, 다른 한편 돈으로 살 가치도 마땅찮은 이것은 종이학 접기와 닮았거든요. 그리고 그대는 종이학을 좋아할 양반입지요. 다른 이였더라면 하지 않았을 겁니다, 까닭인즉 투입한 노동에 상응하는 반향이 기대되지 않기에, 제법 가치중립적인 이유에서입니다.
어쩌다 보니 생일 편지를 빙자한 말잔치가 되었습니다만, 이해하십시오. 적어도 내가 오늘 훑은 책이 스무 권이 넘었고 그것으로 충분하더라면, 단언컨대 거기 원엽의 이해에 족할 만한 것은 없었습니다. 택할 수 있는 것이 그뿐이란 까닭으로 미진한 것을 선물할 바엔, 우스꽝스럽고 비효율적인 진심이 좋습니다. 선물은 받는 손에 이르기 전에 주는 이의 두 손에 먼저 쥐이고, 적어도 선물의 본질이 주는 이의 진심이라면, 무어건 납득해 만족한 것만을 나는 주겠습니다. 일전 홍수처럼 쏟아지는 책과 활자의 다양성 가운데 진정 문제란 ‘발견’에 있으며, 그러므로 쓰는 것이 공수가 조금 들지언정 가장 확실한 방편이라 했습지요. 나는 교보문고에서 여기 들인 손품만큼의 발품을 더 판다 한들 만족스러운 책을 찾지 못하였을 성싶고, 그 반의 반 만에 썩 그럴듯한 것을 찾아낼 수 있었다한들 그것보다도 이것이 더 좋습니다. 이게 그대 취향에 정확히 걸맞지 않더라도, 내 논의의 주제와 방식마저 그대를 빗겨 나가진 않았으리라 확신합니다.
그리고 선물은 그것이 온 진심일 때에, 받는 자의 기쁨이기 전에 주는 자의 기쁨임을 생각합니다. 나는 오늘 책 선물을 계기로 멋진 하루를 보냈습니다. 갑자기 광화문에 갔고, 갑자기 버스가 종로4가에 멈춰 많이도 걸었으며, 가득한 햇살을 정면으로 받으며 한껏 달구어졌고, 양양한 햇살이 사념을 태우는 통에 사유는 간만에 마구 전진했습니다. 앞서 베스트셀러 섹션에 다소 비판적으로 말하였습니다만, 내 의식 구조는 꽤 공평하여 그로부터 내 모자람을 읽었습니다. 자극이 많이 되었어요, 내게 부재한 ‘지식’의 영역이 부끄러움을 통해 진동하였습니다. 그러자 곧 내 사유는 더 많은 것을 스스로에게 요구하며 흥분한 말처럼 콧김을 토합디다. 그래서 퉁퉁 불은 다리를 한 채로도 교보문고를 나서자마자 청계천으로 걸음을 돌렸습니다. 좀 더 걸어야 했거든요.
청계천에 사람이 많습니다. 천변이며 다리 위며 버스킹하는 사람과 그 주변을 반원형으로 둘러썬 군중과, 그 곁을 무심히 스치는 쌍쌍의 인간들을 구경했습니다. 아, 더웠습니다만 습하지 않아 적이 충분했습니다. 여러 개의 다리를 지났고, 개중 한 다리에는 양 끝에 암막을 쳐두었더랍니다. 장통교 아래, 이제 찾아보니 늘 독서 모임을 하던 젊음의 거리에 붙어 있습디다. 무엔가 궁금해 보니, 냇바닥과 벽에 스크린으로 미디어 아트를 투사하고 있습니다. 색채가 화려하고, 대충 어질어질 빙그르르 돌아갔습니다. 거기 앉아 다리쉼을 했습니다. 신발을 벗어 발바닥을 주무르는 동안, 만화경처럼 빙그르르 회전하는 색채를 구경했습니다.
그로부터 세운상가까지 더 걸었습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를 정확하게 표적해낼 순 없다지만, 지금 이 글이 담고 있는 막대함이 거기 군데군데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20시가 조금 넘었는데 아직 박명이 아련합디다. 여름 밤이 더디다더니 종로의 고층 건물에 걸치인 어스름은 옛 전설같이 아스라하고, 지상에는 어둠이 깔렸습니다. 옷은 땀으로 완전히 젖었습니다. 가방에 손 선풍기 하나쯤 있지만, 여름에 흠뻑 젖은 다음에는 하나 필요치 않았습니다. 푹숙 젖기로 각오한 여름은, 거꾸로 그다지도 달가워 신기해집니다. 돌아오는 지하철에선 멋진 신세계를 펼쳤고, 그 안에서 책의 마지막을 덮었습니다. 그 즈음, 시벨리우스 교향곡 2번의 4악장이 펼쳐졌습니다. 4악장이 시작하자마자 출현하는 이 곡 전체의 핵심 주제 선율은 들을 때마다 강제로 고양되는 느낌입니다만, 역시 30분에 달하는 1~3악장의 과정이 없이는 이 곡이 선사하는 절정의 카타르시스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고진감래주가 땡기는 구절이네요. 콜라에 소주 섞어, 만간 술이나 한 잔 하십시다.
참 조용히도, 전율적인 하루였습니다. 한 줄의 질문, ‘인문학의 쓸모’에 대한 내 답변이 길기도 길었습니다만 어째 충분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원엽. 독서 모임에서 함께 읽은 책의 흔적들을 군데군데 인용해 두었는데, 그게 작은 즐거움이라면 즐거움이겠습니다. 그러나 그대가 찾는 것은 내가 줄 수 없는 것, 결국 그건 스스로 발견해야 하는 것이니까. 나는 내 세계를 있는대로 펼쳐 보이는 것으로써 답을 대신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