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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이곳은 극장이 아니다 - 안티포나 포 터널링 [공연]

연극이 공간의 경계를 허무는 방법

by 유예현 에디터
2026.08.11 14:04

연극을 보기 위해 서울 곳곳을 돌아다니다 보면 공연이 끝난 뒤 낯선 동네에 툭 떨어지는 경험을 자주 하게 된다.

 

며칠 전 나는 성북동의 한 (구)교회에서 나와 갑작스레 올해 여름의 끝자락을 맞이했다. 그날 점심까지만 해도 등을 땀으로 흠뻑 적시던 열기가 가시고, 시원한 바람 한 줄기가 나를 훑고 지나간 것이다. 천천히 성북천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땅은 여전히 낮의 열기를 머금고 있었고, 천 주위로 드문드문 늘어선 술집 속 사람들의 볼 위에 새로운 열기가 피어나고 있었다.

 

다른 세상이다, 라고 생각했다. 분명 방금 전까지 나는 (구)교회에서 천체과학자 소명과 그녀의 수많은 모습을 만났고, 우주의 한가운데 있었는데. 네 층의 계단을 내려와 길을 건너니 어느샌가 다시 성북이었다. 그 경계를 넘는 게 이리도 쉬운 것이 의심스러워, 성북을 조금 더 맴돌았다.

 

 

 

공간 뒤집기


 

연극은 ‘실재 안의 허상’이란 틀을 가지고 있는 매체다. 음. ‘실재 위의 허상’이란 말이 더 적합할 수도 있겠다. 연극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물리적인, 고로 실재하는 공간이 있어야만 한다. 실재하는 공간은 나름의 축적된 시간 속에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 역사는 우리로 하여금 그 공간에서 벌어질 일들에 대한 어느 정도의 예상이랄지, 기대를 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내벽이 하얗고 알코올 소독제 냄새가 가득한 병원에 가면 나는 긴 대기, 주삿바늘, 의사 선생님의 차분한 목소리 같은 것들을 예상하게 된다. 또 내부가 그늘지고 향 냄새가 가득한, 나무의 서늘한 냉기가 남아 있는 절에 가면 무언가를 소원하는 사람들의 바지런한 몸짓을, 바닥에 닿은 무릎과 중얼거리는 기도의 옅은 웅웅거림을 기대하게 된다.


극장이 아닌 곳에서 벌어지는 연극은 그러한 맥락에서 보았을 때 공간의 역사성을 전복시킨다. 그 공간에 축적된 시간이 말해주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눈앞에서 펼쳐지기 때문이다. 병원이지만 병원이 아니고, 절이지만 절이 아니다. 흰 벽과 소독제 냄새, 나무 바닥과 향 냄새는 분명 이곳이 내가 알던 공간이 맞다고 얘기하고 있는데.

 

TINC에 들어서면 보이는 높은 천장, 어둑한 실내, 줄지은 긴 나무 의자들과 저 멀리 한 지점으로 모아지는 시선. 어딜 봐도 이곳은 교회인데, 교회가 아니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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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NC(This Is Not a Church)


 

서울프린지페스티벌2026의 자유 참가작 중 하나인 ⟪안티포나 포 터널링(Antiphona for Tunneling)⟫이 무대로 삼은 복합문화공간 TINC는 이름에서부터 그 전복을 드러낸다. ‘This Is Not a Church(이곳은 교회가 아니다)’의 약자인 TINC. ‘명성교회’라는 초록색 간판이 걸린 이곳은 구 예배당이자 현 다목적 공간으로, 전시, 공연, 촬영, 워크숍 등 다양한 행사가 열리고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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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이 오르면 예배당의 문을 박차고 한 여자가 들어온다. 예배당이라는 것만으로도 생기는 엄숙함이 있는지, 여자가 내는 소리 하나하나에 움찔하게 된다. 거친 발소리와 숨소리는 벽에 한참을 튕기고 튕겨 울려 퍼진다. 마치 교회 전체가 여자와 함께 화를 내고 있는 듯이. 여자는 털썩, 긴 나무 의자에 앉아 원망 같은 기도, 아니 기도 같은 원망을 올린다. 객석은 교회의 강단을 중심으로 양옆으로 퍼져 있어, 여자는 객석 사이사이를 누빌 수 있다. 가만히 앉아 얼어 있는 내 주위로 여자가 올 때면, 설교를 듣는 중에 마음대로 움직이는 사람을 보는 것 같아 당신도 빨리 앉으라 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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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 여자는 누군가와 함께 2층에 올라가 있다. 강단을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에서 여자는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본다. 바로 옆의 에어컨이 가림막도 없이 노출되어 있지만, 여자의 머리칼을 흔드는 바람이 인조적인 것이라 믿기가 어렵다. 여자가 있는 곳은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다.

 

극이 진행되는 동안 교회는 꿈속이, 숲이, 바다가, 블랙홀이 된다. 시간 역시 고정돼 있지 않다. 현재와 과거와 미래가 서로 충돌하고 뒤섞여 성북구의 여름밤은 까맣게 잊힌 지 오래. 그 대혼란 속에서 갑자기, 배우가 강단 옆의 쪽문을 열어젖힌다. 문밖으로 보이는 건 성북구의 전경. 해가 진 어둑한 하늘 아래로 건물들의 지붕과 하얗게 빛나는 작은 창들이 보인다. 떠나온 줄 알았던 지금, 여기. 이내 문은 다시 닫히고, 성북은 사라진다.

 

 

 

터널링


 

극은 맨 처음 여자가 뛰어 들어온 예배당의 뒷문에서 막을 내린다. 정확히는 그 문의 밖에서. 하지만 이번에 문밖에는 또 다른 자신이 기다리고 있다. 불이 꺼진 복도에 서 있는 두 사람의 실루엣만이 간신히 보이고, 이내 어둠 속에서 검은 형체 두 개가 하나로 포개진다.

 

그날 밤 소명과 우리는 함께 수많은 공간들의 저편에 도달했다.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채 교회에서 숲으로, 바다로, 우주로 건너가는 일. 이곳과 저곳 사이의 단단한 벽을 잠시 무용하게 만드는 일. 불가능할 것 같은 경계를 통과하고 나면, 우리는 어느새 다른 쪽에 서 있다.

 

그러나 문밖에서 또 다른 자신과 하나로 포개지는 소명을 보고 있으면, 그 ‘다른 쪽’이라는 것이 애초에 그렇게 분명히 나뉘어 있었는지 의심하게 된다. 교회가 교회인 동시에 교회가 아닌 것처럼, 같은 쪽과 다른 쪽을 가르는 기준 역시 처음부터 그리 단단한 것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모험을 거친 우리가 다른 곳에 도달했다고 믿는 것은, 결국 변한 것이 우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교회이자 극장이었던 공간을 떠나 성북천을 걸었다. 새삼스럽게 낯선 동네에 와 있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성북천을 가운데 두고 겨우 한 사람이 지나다닐 정도의 좁은 길이 양쪽에 나 있었다. 하늘이 가까웠다. 역에 가까워지자 공터가 하나 나왔다. 날씨가 선선해져서인지 동네 사람들이 삼삼오오 나와 있었다. 벤치에서 할머니 한 분이 건너편의 친구에게 뭐라 말을 거셨다. 그리 대단하지도 않은 이 풍경이, 교회의 쪽문을 통해 엿보다 마침내 다다른 낯선 세상 같았다. 아마도 연극은 때로는 내 삶의 역사성을 전복시키기도 한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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