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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뮤지컬 <팬레터>와 <디어 에반 핸슨>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거짓말’이란,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양 꾸며 말하는 것을 뜻한다. 거짓말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사실과 다른 내용을 전달해야 하고,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그것이 거짓임을 알고 있어야 하며, 상대방이 그 내용을 사실이라고 믿게 하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어야 한다. 즉,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다 거짓말인 것은 아니며, 중요한 것은 ‘왜’ 그렇게 말했는지에 있다.
부모님과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거짓말은 나쁜 행동이라고 말한다. 이렇듯 거짓말은 보통 해서는 안되는 나쁜 행위로 여겨지지만, 이럴 때 항상 화두에 오르는 주제가 바로 착한 거짓말, 다르게 말해 ‘선의의 거짓말’이다. 남에게 해를 끼칠 의도가 없는 거짓말은 과연 해도 되는 것일까.
그 선의의 거짓말로 인한 결과가 아름다울 경우 더없는 감동으로 이어지지만, 그것이 언제나 아름다운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선한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기도 한다. ‘당신을 위해서 했다’는 거짓말이 사실은 상대방을 더 큰 절망으로 밀어 넣는 결과를 낳았을 때, 거짓을 말한 사람은 용서받을 수 있을까? 그 마음이 선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누군가는 거짓말로 상대를 구원할 수 있다는 생각은 오만한 것이라 말할 것이고, 누군가는 그 마음까지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용서받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 이전에 거짓말로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1.
‘거짓말로 사람을 구원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은 ‘거짓말’로 누군가를 구원하고자 했던 두 소년의 이야기에서 출발했다. 아직은 미성숙한 두 소년의 거짓말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불러 오고, 결국 서로 다른 결말을 맞는다. 뮤지컬 <팬레터>의 세훈과 뮤지컬 <디어 에반 핸슨>의 에반 핸슨이 그 주인공이다.
이 글에서 말하는 ‘구원’은 사실 다소 모호한 개념이다.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누군가의 삶을 완전히 바꾼다는 거창한 의미라기보다, 당장 살아갈 이유를 주거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것에 가깝다.
2.
뮤지컬 <팬레터>의 ‘세훈’은 자신이 동경하는 작가 해진과 ‘히카루’라는 필명으로 편지를 주고 받는다. 히카루라는 가상의 인격체는 나날이 병세가 악화되는 해진에게 금세 한 줄기 빛과 같은 존재가 된다. 세훈은 해진을 직접 만나게 되었을 때, 행여 해진이 실망할까 자신이 히카루라는 사실을 밝히지 못한다. 결국 이름만 있고 실체는 알 수 없는 히카루와 함께 글을 쓰다 생을 마감하려는 극단적인 결심까지 하게 되고, 인물 간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사실 세훈의 이러한 행위는 거짓말과 침묵의 경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히카루를 독립적인 존재로 만들어낸 것은 처음부터 해진을 속이려는 계획이 아니었다. 세훈은 결국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기보다 해진이 히카루라는 인물로부터 얻고 있는 것을 깨뜨리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거짓을 유지했다는 점에서 그의 행동을 단순히 거짓말이라고만 말하기에는 망설여지는 지점이 있다.
뮤지컬 <디어 에반 핸슨>의 ‘에반’의 경우, 좀 더 직접적으로 거짓말을 시작한다. 그는 학교에서 자기 자신에게 편지를 쓰던 중 동급생인 ‘코너’에게 편지를 빼앗기고, 후에 코너가 자살로 세상을 떠났을 때 코너의 부모님은 그 편지를 보고 에반이 코너와 가까운 친구라고 오해한다. 에반은 슬픔에 빠진 코너의 부모님에게 차마 자신은 코너와 친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었고, 그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결국 자신은 코너와 절친한 사이었다고 거짓말을 시작한다.
그 거짓말로 인한 파장은 코너와의 가짜 기억을 만들어 전하고, 가짜 이메일을 부모님께 보여주는 등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에반의 경우 상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서 출발했지만 점점 그 거짓에 자기 자신의 욕구가 뒤섞인다. 결국 거짓으로 인한 상황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 버린다.
결국 상황이 걷잡을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나서야, 두 인물 모두 극의 후반부에서 자신이 해온 거짓을 직접 밝히며 상황이 종결된다.
3.
이렇듯 두 인물의 거짓은 비슷하면서도 또 다르다. 관객은 두 사람을 보며 진작 진실을 말했어야 한다며 분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거짓말이라는 행위는 분명 잘못되었지만, 그 의도와 놓여있는 상황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두 소년 모두 거짓말로 인해 죄책감을 느끼는 과정이 극 중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렇다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행위는 용서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을까? 죄책감이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용서는 상대방의 영역이다. 상대방은 거짓말을 저지른 사람을 용서해야 할 의무는 없다. 그렇지만 상대를 용서하는 것과, 상대의 의도와 상황을 이해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까지 이해하고, 어디까지 용서할 수 있을까.
<팬레터>에서 세훈이 해진에게 자신이 히카루였음을 밝히자, 해진은 왜 진실을 밝힌 것이냐며 분노한다. 이처럼 선의의 거짓말에서는 거짓과 용서, 그리고 진실의 관계가 아주 복잡하게 얽혀버린다. 단순히 남을 속이는 ‘나쁜’ 의도의 거짓말과 달리, 선의의 거짓말에는 상대를 위한 마음과 자신의 욕망, 그리고 진실을 감추려는 의도 등 여러 동기가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 거짓말이 선의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용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할 순 있지만, 이미 벌어진 상황과 그 결과가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4.
그렇다면 용서와 구원의 관계는 어떨까? 거짓말을 ‘당한’ 사람이 거짓말을 한 사람을 용서한다면 그것은 구원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거짓으로 누군가를 구원하려는 행위 자체는, 어쩌면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상대방의 미래에 개입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에반의 거짓말로 슬픔에 빠졌던 코너의 가족은 에반이 들려주는 이야기로부터 위안을 얻고 활기를 되찾는다. 어쩌면 에반의 거짓말은 코너 가족을 잠시나마 구원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순간의 위안을 우리는 구원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에반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무너지기 시작하는 순간, 그 위안의 의미까지 사라져 버린다고 하더라도? 결국 거짓말이 개입되는 순간 미래는 진실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그리고 <팬레터>에는 이 질문에 흥미로운 생각을 던지는 장면이 나온다.
해진이 죽은 후, 해진의 친구 ‘이윤’은 자신을 찾아온 세훈에게 이런 말을 한다. 너 때문에 내 친구는 며칠 더 살지 못하고 죽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이에 덧붙여 이렇게 말한다. ‘혹은 네 덕에 며칠 더 산 것일지도 모르지.’ 이윤의 이 대사가 그 판단의 어려움을 말해주는 듯하다.
결국 결과만으로 누군가의 거짓말이 구원이었는지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 결과가 누군가에게 실제로 위안과 살아갈 이유를 주었다면, 그 시작점이 거짓말이었다는 이유로 그것까지 부정할 수 있을까.
5.
그렇다면 이제 최초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거짓말로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가? 거짓은 진실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뿐, 누군가의 삶에 어떻게든 흔적을 남긴다. 거짓말은 누군가에게 살아갈 이유를 줄 수도 있고, 잠시나마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 구원이 비록 거짓 위에 세워져 있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언제든 무너질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위태롭다.
구원은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베푼다고 끝나는 것이 아닌,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 의해 완성된다. 그런 점에서 답은 결국 이윤의 말로 되돌아온다. 거짓에서 출발했다고 해서 그 과정에서 누군가가 느낀 위안과 삶의 의미까지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세훈의 행동은 해진에게 며칠의 삶을 더 가져다 주었을 수 있다. 에반의 거짓말 역시 코너 가족에게 위안을 주었다는 사실과 결국 그들에게 또 다른 상처를 주었다는 사실 어느 하나만으로 단정할 수 없다.
그 거짓말이 누군가를 구원하려는 마음에서 시작되었다고 해서 그 결과가 구원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반대로 그 거짓말이 무너졌다고 해서 실제로 존재했던 위안까지 거짓이 되는 것도 아니다.
거짓말은 누군가를 구원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구원이 정말 구원이었는지는, 결국 그 거짓말을 살아낸 사람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