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the world's a stage,
And all the men and women merely players."
인생을 연극에 비유하는 말은 이제 하나의 숙어처럼 남았다.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우리는 모두 한 명의 배우라는 말. 이 말을 천천히 곱씹다 보면 약간의 무상함이 올라온다. '아냐, 그 정도로 단순하지는 않지' 라고 되뇌며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연극은 나에게 풀리지 않는 오랜 과제 같은 것이었다. 매년 버킷리스트에는 지우지 못한 '연극과 친해지기'라는 항목이 빠짐없이 들어가 있다. 연극을 자주 보겠다는 결심이기도 했지만, 위의 '인생은 연극이다.'와 같은 말에 나오는 연극의 본질과 가치를 제대로 느끼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적어도 '나는 연극을 좋아한다'라는 말을 당당히 하고 싶었다.
그러다 최근에 '진짜 연극이란 무엇인지' 궁금하게 만드는 작품을 만났다. 더 이상 이 고민을 미룰 수 없었기에 끈질기게 이 작품을 파고들었다. 며칠 전 대학 수업 시간에 이 작품의 연출가님께서 오셔서 강연해 주신 영향도 컸다. 바로 '연극'을 이야기하는 연극, 이철희 연출의 <삼매경>이다.
연극 <삼매경>은 함세덕의 희곡 <동승>을 재창작한 작품으로, <동승>이 극중극 형식으로 등장하기는 하지만 완전히 다른 작품이다. 흥미로운 점은, 1991년 박원근 연출의 연극 <동승>에서 ‘도념’ 역을 맡았던 지춘성 배우가 35년 후, 이 연극 <삼매경>에서 또 한 번 ‘도념’ 역할을 맡는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연극은 메타 연극의 형식을 취한다. 지춘성 배우는 극 중 '도념'이라는 인물로 나오지만, 극 밖으로 나와 스스로를 지춘성이라 칭하며 자전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장면도 있다. 또한 극은 과거와 현재, 현실과 연극 사이를 넘나들며, 하나의 이야기를 보여 주기보다는 도념(춘성)의 여러 기억의 파편들을 내어 보인다. 이러한 구조는 이 극이 어떤 하나의 지점으로 향하기 보다는, 무언가를 온몸으로 말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극 중 인물 '춘성(도념)'은 자신이 35년 전 맡았던 도념이라는 역할을 실패로 규정한 채 평생을 그 기억 속에 사는 배우다. 그는 과거를 회상하며 자신이 만들어 낸 어린 도념의 분신과 대화를 나눈다. ‘나는 네가 되지 못한 것 같아’. 이제 그만 자신을 놓아달라는 듯, 그 분신은 춘성(도념)을 칼로 찌른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그 순간, 그는 1991년의 그 연습실로 되돌아간다. 죽음 앞 삼도천조차도 그 미련의 관성을 끊어내지 못했다. 그토록 원하던 35년 전으로의 회귀. 그는 마침내 완벽한 도념이 될 마지막 기회를 얻는다.
이쯤 되니 궁금해진다. 춘성은 왜 이렇게 도념에 집착할까. 다르게 말해, 왜 이렇게 연기에, 혹은 연극에 진심일까. 연극은 평생 자신을 괴롭혀 온 존재이다. 대체 연극이 무엇이기에, 평생을 얽매이게 하고고,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미련이 남고, 다시 태어나도 찾고 싶게 만드는 걸까. 이 글은 연극 <삼매경>의 감상이 아닌, <삼매경>이 말하는 연극의 의미를 탐색해 보는 글이다.
극 중 이런 말이 나온다. "연극은 신이고, 배우는 사제라." 이제 연극은 인생이면서 신이기까지 하다. 실제로 극 중에는 연기, 혹은 연극이란 무엇인지 고민해볼 수 있는 지점이 여럿 존재한다.
가장 먼저 눈에 띄었던 것은 장례식 장면이다. 초로의 배우가 그리도 미련을 가졌던 원작 <동승>의 도념(어린 도념)은, 멀리 떠나간 어머니를 항상 그리워하는 인물이다. 실제로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그 배우는 장례식장에서 사람들을 관찰하고 올라오는 감정을 붙잡는 데 바쁘다. 이제 도념과 같은 상황이 되었으니 그의 마음에 좀 더 가까워졌다며 기뻐하는 그의 모습. 그는 장례식장에 나타난 어머니의 분신을 보고도 ‘누구세요?’라고 물을 정도로 인물 구축에 열중한다. 완벽한 도념을 위한 배우의 광적인 집착을 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춘성이 1991년 새벽 2시의 연습실로 돌아갔을 때 등장한 연출가의 목소리도 생생하다. ‘부단히 나를 비우고 무의 상태를 유지하라’, ‘연습실 올 때는 (자아를) 제발 좀 다 버리고 와라, 다 걸고 하라’고 말하는 그는 말은 거의 울분에 가까웠다. 이게 아니면 지구가 멈출 것 같이 절박하게 쏟아내고 있었다. ‘왜 저렇게까지 하지?’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렇게까지 해서 연출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그것은 이 극 <삼매경> 자체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연극에서 '연극 하는 법'을 보고 있다니, 이 극이 얼마나 연극에 대해 말하고 싶은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그 외의 요소들도 마찬가지였다. 최소한의 소품, 최소한의 음향. 오직 배우들의 몸짓과 대사만으로 무대가 채워진다. 특히 배우들이 온몸으로 자연물을 표현해낼 때, 어떤 연기의 극치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정말 순수 연기 그 자체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무대 위 배우 모두가 그랬다. 어떤 화려한 연기를 선보이기보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감정을 풀어낼 뿐이었고, 이 점이 지금껏 봐 왔던 연극과는 다른 감각을 선사했다. 진짜 연극 같은 느낌.
극 내용을 더 살펴 보자. 과거로 돌아간 춘성(도념)은 이번에는 완벽하게 도념을 연기해냈을까. 아니, 이번에도 실패였다. 어떻게든 완성해내고자 자신이 직접 만든 ‘허공’이라는 공간 속에서 텍스트를 하나하나 뜯어내어 자신만의 <동승>으로 재창작을 시도해보기도 한다. 하지만 자꾸만 튀어나오는 자아들로 인해 극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결국 완성에 도달하지 못한다.
또 실패인가. 결국 그는 완벽한 도념을 연기하는 것을 단념한다. 오랜 시간 이루지 못한 연기의 완성에 얽매여 있는 그가 그것을 내려놓기로 결심한 것은 괄목할 만한 일이었다. 계속되는 실패, 그 안에서 나눈 또 다른 자아와의 대화는 마침내 그에게 하나의 깨달음을 주었다. 자신을 과거에 붙잡아 두고 있던 것은 연극이 아니라 실패했다고 믿는 자기 자신이었다는 것. 그리고 완성을 향해 달려온 이 미완의 과정 자체가 아름답다는 것. 그는 그렇게 떠난다.
“안녕, 나의 이름다운 미완성.”
자신을 받아들임으로써 도달하는 미완성의 경지에는, 그 누구도 뭐라 할 수 없는 나만의 과정과 고뇌, 그리고 나만의 인생이 담겨 있었다. 극이 전하는 여러 메시지 중에서도 특히 이 ‘미완성’이라는 말이 오래 남았다.
‘연극은 삶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말이 문득 떠오른다. 이 작품에 거울이 등장해서일까. 춘성의 완성을 향한 발버둥을 생각하고 있자니, 어쩌면 우리 인생 또한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만 결국은 미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완벽해 보이는 연극 속 인물이 결국 미완성으로 남는 것처럼. 그가 자꾸만 과거에 매달렸던 이유가, 못다 이룬 과거의 완성, 즉 삶의 완성을 향한 미련 때문이라면, 연극은 그에게 우리가 추구해야 할 미완성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있었다.
'미완성이라는 완성'이라는 말은 여전히 어렵다. ‘미완성인 척하는 완성을 말하는 걸까?’, 아니면 ‘완성인 척하는 미완성’을 말하는 걸까. 그럼에도 나는 이 극을 통해 ‘완성인 척하는 미완성’으로서의 연극의 역할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인생은 연극이다.’라는 말과, ‘인생은 미완성이다.’라는 말. 결국 연극 또한 미완성인 것인가. 나란히 놓고 보니 둘은 제법 비슷한 느낌을 준다. 약간의 무상함과, 그 속 어딘가에서 보이는 반짝임. 이것은 ‘완성인 척하는 미완성’에서만 느껴질 수 있는 감각이었다. 우리의 인생은 너무나도 미완성이기 때문에, 완성인 '척'하는 장치가 꼭 필요하다. 비록 그것 또한 미완성인 것일지라도.
수학에 '점근선'이라는 개념이 있다. 함수의 그래프가 특정한 선에 '무한히' 가까워지지만 결코 닿지 않는 선을 뜻한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인생은 죽기 직전까지도 '완성'이라는 점근선에 도달하지 못하지만, 연극은 우리가 그 완성에 수렴하도록 이끄는 하나의 장치가 되어준다. ‘닿지 않는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더 본질적인 것은 그 값으로 '수렴해 간다'는 점이다.
연극을 통해 하나의 완결(완결이 완성이란 뜻은 결코 아니다}된 이야기를 접하고, 그 안에서 지혜를 얻고, 다시 삶을 돌아보는 것. 연극은 그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중요한 것은 그 연극이 삶에 끼친 영향들이다. 춘성의 사연처럼 연극 자체가 주는 의미일 수도 있고, 이야기가 주는 메시지일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그 힘은 인생을 ‘완성’이라는 점근선을 향해 나아가게 만든다. 춘성의 미완성이 아름다웠던 이유도, 미완성으로 끝난 그의 노력들이 끝내 완성을 향해 수렴해 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연극이란 무엇인가.' 연극을 말하는 연극, 여기서 비로소 나는 연극과 친해지기 시작할 수 있었다.
또 한 가지, 이 작품이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긴 이유는, 작품이 주는 메시지를 떠나서 그 본질에 충실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연극다운 연극'. 이 ‘답다’라는 말이 가능하기 위해 얼마나 치열한 고민의 흔적이 극에 새겨져 있을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삼매경>이라는 극이 내내 분출해 낸 연극의 깊이는, 알려고 하면 할수록 더 깊게 빠져들게 만든다. 나는 그 물속에서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했을 뿐이다. 앞으로 만나게 될 또 다른 연극들이, 그곳에서 나를 끌어 당겨 줄 동아줄이 되어주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