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좋아서’ 눈물이 난 적이 있는가? 한때는 ‘좋은데 왜 울어?’라고 질문하는 어린아이처럼, 행복을 웃음으로만 치환하던 시절이 있었다. 웃음은 행복의 가장 낮은 단계의 반응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때였다.
행복해서 눈물이 날 때면 생각해본다. 이렇게 순수하게 무언가를 좋아해서 나오는 눈물을 병에 담아 성분을 분석한다면, 과연 ‘행복’ 말고 또 어떤 감정이 섞여 있을까? 순수 행복만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어쩌면 이 감정을 다시는 느끼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슬픔도 있을 것 같다.
공연을 볼 때 종종 이런 행복의 눈물을 흘리곤 한다. 지금 이 공연과 함께 숨 쉬고 있다는 벅참, 대사 한 줄과 가사 한 줄이 전해주는 감동, 그리고 이 순간이 영원하길 바라는 간절함까지- 이 모든 감정이 한꺼번에 터져 나올 때 눈물이 난다.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행복의 눈물이다. 그러나 결국 공연은 순간의 예술이다. 이미 사라지고 지나가 버릴 것에 대한 눈물에서는 달콤하면서도 슬픔의 신맛이 났다.
페퍼톤스의 음악은, 신맛이 섞이지 않은 눈물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나에게 처음 깨닫게 해준 존재였다. 그들의 음악을 들을 때면 정말 행복 이루어진 감정이 있을 수 있다는 걸 느낀다.

페퍼톤스는 올해로 데뷔 21주년을 맞은 2인조 밴드다. 데뷔 EP ‘A PREVIEW’부터 가장 최근 앨범 ‘Twenty Plenty’까지, 20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그들은 어떤 음악을 해왔을까. 흔히 페퍼톤스의 음악이라 하면 ‘청춘’이라는 말이 자주 따라붙는다. 그들의 음악은 밝고 푸르며, 어딘가로 떠나고 싶게 만드는 힘을 지녔다. 새로운 시작을 생동감 있게 응원하면서 때로는 끝의 쓸쓸함을 조용히 고백하고 추억에 잠기게 한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이야기들에 ‘그들만의 색깔’을 담아냈다는 데 있다.
페퍼톤스의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힘찬 청춘의 사운드에서, 멜로디와 어딘가 대비되는 가사에서, 그리고 담담하게 건네는 목소리를 통해 위로와 용기를 얻곤 한다. 물론 나 역시 그렇다. ‘우울증을 위한 뉴 테라피 2인조 밴드’라는 초기의 캐치프라이즈를 보고 고개가 끄덕여지는 걸로 봐서 여전히 그에 맞는 음악을 하고 있나 보다. 그렇다고 그들의 음악이 대놓고 ‘위로’하고 ‘치유’하기 위한 목적을 가진 것은 아니다. 그저 ‘기분 좋은 음악’을 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출발했을 뿐이다. 이런 마음에서 비롯된 음악에서는 자연스럽게 밝은 사운드가 흘러나오고, 그들만의 이야기는 조용한 위로가 되어 다가온다.
페퍼톤스 하면 떠오르는 키워드가 몇 가지 있다. 시작과 끝, 계절, 사람, 위로와 용기, 추억, 그리고 쓸쓸함이다. 가사를 중심으로 각 키워드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곡들을 보며 그들이 어떤 음악을 해왔는지 알아 보자.
‘시작과 끝’ - 끝은 또 다른 시작이 되어 끝내 영원이 된다
열어보지 않은 지도
어딘가 짙은 무지개의 끝
너와 나 거기 닿을 수 있을까
- 페퍼톤스, 'Freshman' 中
페퍼톤스에게 시작은 이야기로 가득 찬 모험이다. 곡 ‘Freshman’은 제목 그대로 어딘가 처음 발을 내딛는 사람을 위한 노래다. 초행길은 기대와 설렘 가득하지만, 막역한 걱정을 품고 시작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걱정도 잠시, 시작의 낯섦을 덮어버리는 듯한 희망찬 멜로디와 누군가의 반짝이는 눈빛이 떠오르는 가사는 당장이라도 앞으로 나아가고 싶게 만든다.
자 떠나자
우리가 꿈꾸던 멋진 모험이야
가보자
어디로 가는지 아직은 몰라도
- 페퍼톤스, 'Freshman' 中
새로운 시작은 곧 무언가의 끝을 의미하기도 한다. 앞서 언급한 노래가 오직 ‘시작하는 사람’만을 위한 노래라면, 페퍼톤스 음악이 가진 진정한 힘은 시작과 끝이 공존하는 곡에서 드러난다.
수많은 이야기
끝없는 모험만이
그대와 함께이길-
- 페퍼톤스, '행운을 빌어요' 中
‘행운을 빌어요’에는 또 한 명 시작을 앞둔 인물이 등장한다. 페퍼톤스의 곡 중에서도 여전히 많은 사랑을 받은 이 노래는, 시작을 위해 떠나는 사람이 아닌 ‘떠나보내는 사람’의 시선에서 쓰인 노래이다. 밝은 사운드 뒤에 이별의 아쉬움이 가득한 모습들을 볼 수 있다. ‘행운을 빌어줘요, 웃음을 보여줘요, 눈물은 흘리지 않을게 굿바이.’라는 가사처럼, 이별은 아쉽지만 시작을 앞둔 사람에게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테니 웃음만이 가득하길 바란다는 노랫말은, 마치 나를 향한 응원인 듯 깊은 울림을 준다.
이 노래는 6집의 타이틀곡인 ‘긴 여행의 끝’에서 이야기가 이어진다.
외로웠던 아득했던
머나먼 여행의 날들
기나긴 날 그 캄캄한 밤
난 언제나 너를 떠올렸어
고마웠던 소중했던
다시 만날 거란 약속
들려줄게 내 낡은 배낭
가득히 담아온 긴 이야기
- 페퍼톤스, '긴 여행의 끝' 中
길었던 여행에서 돌아온 그는 분명 끝을 말하고 있는데 어쩐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듯한 느낌을 준다. 다시 돌아올 곳이 있는, 두려울 게 없었던 여행자는 자신의 행운을 빌어줬던 이에게 감사를 전하며 그동안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떠난 사람을 다시 맞이한 이에게 이보다 더한 행복이 있을까? 이야기 가득한 배낭은 ‘행운을 빌어요’에서 건네졌던 응원에 대한 다정한 응답처럼 느껴진다. 곡 중간에 나오는 웅장한 브라스 사운드는 고된 여행자의 금의환향을 표현하는 듯한다. 그들의 음악 스타일 때문일까, 노래에 숨겨진 기운 탓일까. 여행은 끝났지만 그 끝에서 또 다른 시작이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다.
마치 맨 처음 그날처럼 우린 시작하네
어딘가에서 기다리는 눈부신 바다를 꿈꾸네
...
영원한 것은 없다고 모두 말하지만
하늘은 아직도 푸르네 눈부신 바다를 꿈꾸네
- 페퍼톤스, '라이더스' 中
그리고, 20주년 기념 앨범 ‘Twenty Plenty’의 타이틀곡인 ‘라이더스’에서 그들은 시작과 동시에 영원을 노래한다. 그들은 처음과 같은 마음으로 여전히 눈부신 바다를 꿈꾼다.
그들의 시작과 끝, 그리고 영원을 말하는 노래는 하나의 서사를 이루는 듯하다.
아주 긴 시간 긴 이야기들을 했는데
눈 깜짝할 만큼 짧은 순간 같았어
- 페퍼톤스 '할머니와 낡은 로케트'
‘위로와 용기’ - 페퍼톤스가 건네는 천 개의 우산
페퍼톤스의 음악이 품은 응원은 특별하다. 그들 음악 속 누군가의 이야기로부터, 그들의 일상적 단어로부터 응원과 위로를 받는다.
절대 물러서면 안 돼
그 리듬을 늦추지 마
나는 알아 너라면 진짜 할 수 있어
- 페퍼톤스 '코치' 中
‘코치’는 내가 가장 애정 하는 곡 중 하나다. 하나의 스토리텔링이 있는 가사에서 한 번, 힘찬 에너지가 느껴지는 사운드에서 한 번 울컥함이 터져 나온다. 노래 속에 등장하는 ‘코치’가 ‘유망주’에게 소리치는 물러서지 말라는 말, 너라면 진짜 할 수 있다는 말은 거창한 문구가 담긴 응원은 아니지만, 듣다 보면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진심이 담긴 외침이다.
위 노래가 힘찬 응원을 받는 느낌이라면, 잔잔하고 조용한 위로를 건네는 곡도 있다. 호소력 짙은 가사와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몇몇 가사가 가슴에 꽂힌다.
오오 절망이여 나를 포기하여라,
나지막이 중얼거렸던
- 페퍼톤스, 'Give up' 中
‘Give up’이라는 곡은 절망 속에 무너져가는 상황에서도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고 오히려 절망에게 나를 포기하라고 말을 건넨다. 때로 너무 힘이 들 때면 오히려 더 눈을 부릅뜨고 내게 붙은 이 모든 일이 떨어져 나가길 기다릴 때가 있다. 내가 포기하고 싶지 않을 때는 절망이 나를 포기하도록 한 번 더 외쳐본다. 빠른 박자, 박동하는 리듬과 함께 들으면 심연에서 점점 밝은 곳으로 떠오르는 듯한 한 사람의 모습이 그려진다.
같은 곡의 가사 ‘헤이 일어나, 헤이 잠깐 기다려.’라는 부름은 나를 잊지 않고 불러주는 누군가가 있음을 떠올리게 해준다. 제목이 ‘Give up’인 이유 또한 처음엔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위 가사가 머리에 막히는 순간 그 이유도 알게 되었다. 포기의 주체는 내가 아니고 절망이었음을.
Good night Good bye
내일 아침이면 다 괜찮아질거야
Good night Good bye
거짓말처럼 모두 잊혀져 갈거야
- 페퍼톤스 '불면증의 버스' 中
‘사람’ -영원이 된 우리의 순간들
‘사람’ 키워드에서 소개하는 아래 3개의 곡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순간’을 노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키워드를 순간으로 바꿔볼까 고민도 했지만, 그들이 말하는 순간은 언제나 누군가와 함께인 순간이었고, 그 누군가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에 그대로 '사람'이라는 키워드로 소개하겠다.
오늘 지금 바로 여기
이 멋진 우주 한복판에서
너를 만나 정말 기뻤다
눈을 감고 소리치며
21세기를 함께 느꼈던
우리 기억되길
- 페퍼톤스, '21세기의 어떤 날' 中
자 보아라 노래를 불러라
타오르는 빛처럼
우리들도 여기 이 곳에서
빛나고 있어라
- 페퍼톤스, '캠프파이어' 中
‘21세기의 어떤 날’은 페퍼톤스 콘서트 셋리스트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곡 중 하나이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이 후렴구를 다 같이 따라부를 때면, 영원 같은 감정이 북받쳐 오른다. ‘오늘지금바로여기’라는 순간을 표현하는 단어들과, 이 드넓은 우주에서 만나게 된 너라는 하나의 존재가 만나 영원의 순간 이룬다. 가장 작은 단위끼리의 결합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순간을 사랑하게 되고, 또 누군가와 함께하는 영원을 꿈꾸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이 곡의 또 다른 백미는, 매일 달라지는 가사에 있다.
사랑 낭만 슬픔과 눈물 모두 흘러가겠지만
2012년 1월 16일 이 세상이 얼마나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 페퍼톤스, '21세기의 어떤 날' 中
콘서트를 할 때면 이 날짜 부분을 그 날의 날짜로 바꾸어 부른다. 매일매일 바뀌는 가사 덕분에 우리의 모든 하루가 아름다울 수 있게 해주는 페퍼톤스에게 고맙다.
서두르지 않기를
흔들리고 물들지 않기를
언제나 너의 그 말처럼
살아갈 수 있을까?
- 페퍼톤스, 'Thank You' 中
아무런 약속도 없이 우린 여기까지 왔지
어떠한 기대도 없이도 서로 기대기만 하지
- 페퍼톤스, '불쑥' 中
‘사람’이라는 키워드를 바꾸지 않은 것에는 위 ‘Thank You’라는 곡을 꼭 소개하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가사 ‘서두르지 않기를, 흔들리고 물들지 않기를’은 페퍼톤스의 멤버 이장원이 신재평에게 직접해 준 말로 유명하다. 오랫동안 옆에서 함께해 온 사람만이 해줄 수 있는 말이 있다. 묵직하지만 진지하게 보단 가볍게 던져지는 그 말들은, 진심에 대한 약속이다. 나에게도 그런 말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계절’ - 모든 계절에서 축제의 향이 나길
꼭 어느 특정한 계절이 아니더라도, 계절의 향이 물씬 나는 페퍼톤스의 곡을 좋아한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high-five
반갑습니다, 언제나 great time
상상했던 대로 바랬던 대로
나의 사랑하는 그대
- 페퍼톤스, '스커트가 불어온다' 中
위 가사에는 나오지 않지만, 중간에 ‘봄바람’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곡 소개에 따르면 ‘봄날의 몽롱함’을 담은 노래라고 한다. 노래를 직접 들어보면 차분하지만 어딘가 몽글거리는 멜로디가 봄날의 나른함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햇살엔 세금이 안 붙어 참 다행이야
오늘 같은 날 내 맘대로
...
세상은 넓고 노래는 정말 아름다운 것 같아
인생은 길고 날씨 참 좋구나
- 페퍼톤스, 'New Hippie Generation' 中
푸릇한 앨범 커버,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따뜻한 오후의 햇살, 그리고 시원 청량한 사운드까지 여름이 떠오를 수 밖에 없는 노래다. 듣다보면 푸른 잔디밭이 떠오르기도 한다. 무엇보다 이 곡은 페퍼톤스가 추구해온 음악에 가장 가까이 닿아 있는 작품처럼 느껴진다.
계절의 흐름은 곧 시간의 흐름을 의미한다. 변해가는 풍경 속 열심히 달려온 우리를 맞이하는 것은 무엇일까.
흩날리던 벚꽃잎 위로
그 설레이던 봄날이 끝나고
뜨겁디 뜨거웠던 여름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고서
가슴 시리던 찬바람에
눈부신 가을 햇살이 저물어
다시 또 겨울이 찾아오면
또 다른 시작
- 페퍼톤스, '계절의 끝에서' 中
‘계절의 끝에서’는 페퍼톤스의 1년을 긴 여정에 빗댄 곡이라고 한다. 따뜻한 기타 사운드로 시작해 활기차게, 때론 담담한 선율로 1년을 기록한다. 이 곡이 나에게 특별했던 이유는 ‘겨울’을 새로운 시작의 기점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왜 겨울일까. 15년째 학생 신분인 나에게 시작은 언제나 새 학기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울을 시작의 계절로 바라보는 시선이 유독 마음에 남았다. 봄이 시작이라면, 이미 활짝 피었던 것이 저무는 느낌이다. 반대로 겨울이 시작이면, 아직은 고요한 풍경 속에서 서서히 무언가가 피어나는 한 해가 그려진다. 겨울은 시작에 어울리는 계절이었다.
‘쓸쓸함’ - 사라진 것에 대한 그리움
그렇다고 그들이 밝음만을 노래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곡에는 혼란과 쓸쓸함, 고독감을 담아내기도 한다.
아 아름다운 인생 길고 길었던
들뜬 봄날 한참 바라보았던
높은 하늘 마음껏 꿈을 꾸었지
어린 날들 이제는 안녕
- 페퍼톤스, 'coma' 中
가사 속 ‘안녕’에서 볼 수 있듯이 화자는 과거를 회상하고 떠나보낸다. 7집 ‘thousand years’의 ‘coma’라는 곡이다. ‘죽음’과 관련된 곡으로, 꺼져가는 의식 속 내 삶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아름다웠던 날을, 어리석은 선택, 보고 싶었던 얼굴들이 순차적으로 떠오르며 다시 한 번 그때로 돌아갈 수 없을까 생각하지만 이내 너무 늦은 걸 깨닫는다. 덤덤히 과거를 읊는 보컬(신재평)의 목소리에 집중하다보면 어느새 한 사람의 인생이 내 앞을 스쳐 지나간다.
가장 차가운 끝없이 광활한 우주의 저 너머로
상상할 수도 견딜 수도 없는 영원이란 시간 속을
- 페퍼톤스, '검은 우주' 中
페퍼톤스는 ‘우주’를 정말 좋아하는 게 틀림없다. 우주는 끝없이 펼쳐진 미지의 세계이지만, 때론 그 광활함이 두려움을 주기도 한다. ‘검은 우주’는 우주에서 미아가 된 우주 비행사의 극한의 외로음울 표현한 곡이다. 반짝이는 별을 향해 나아가는 음악만을 할 것 같던 그들이, 우주 속 고독을 담아낸 곡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처음 들었을 때 꽤나 낯설고도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들이 풀어내는 고독에는 어딘가 특별한 결이 있었다.
아주 일상적인 것에서 오는 쓸쓸함을 노래하는 곡도 있다.
삶은 다시 낡은 가구들과 범벅이 되어가겠지
어떤 날엔 새 의자를 사게도 될 거야
지난 날의 번민과 고독
쌓인 추억까지도 이젠 안녕
- 페퍼톤스, 'Furniture' 中
‘Furniture’이라는 곡이다. 이사를 할 때면 드는 허전함과 어색함이 담긴 노래다. 두고 온 것들에 대한 미안함과 바뀌어버린 생활 공간에 대한 아쉬움은 처음에는 강렬하지만 가구들이 낡아가고, 새 의자를 사는 일이 늘어갈수록 무뎌진다. 그렇기 때문에 어찌보면 잠깐 스쳐지나갈 수도 있는 감정이지만 사라지기 전에 가사로, 음악으로 남겼다는 것은 그들이 삶의 한 부분, 한 부분을 유심히 느끼고 있다는 증거였다.
'추억' - 빛바랬기에 더욱 아름다운
마지막 키워드는 ‘추억’이다. 작고 소박한 추억부터 이젠 먼지가 쌓여버린 기억들까지. 추억이 아름다운 이유는 뭘까? 그것이 좋은 기억들이어서, 아니면 더없이 순수한 시절의 기억이어서?
내가 생각하는 추억의 아름다움은 ‘빛바래짐’에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은 점점 희미해져 가지만, 감정은 오래 남는다. 우리는 ‘그때 참 좋았지...’와 같은 말을 하며, 기억 속 감정들을 품은 채 살아간다. 추억을 말할 때면 자연스럽게 감정의 언어가 따라오는 것도 이 이유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늘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내 행복의 발자취
- 페퍼톤스, '도시락' 中
가슴시린 날들 함께 한 너에게
고마워 다시 돌아본다.
- 페퍼톤스, '작별을 고하며' 中
찬란했던 지난 날들에
이젠 내게 남은 건 먼지 쌓인 기억
다시 한 번 주워담고
조금씩 조금씩 빨라진 걸음으로
- 페퍼톤스, 'Knock' 中
‘행복의 발자취’, ‘가슴 시린 날들’, ‘찬란했던 지난 날들’. 페퍼톤스의 음악 속 추억은 다양한 형태이면서, 하나같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는다.
‘도시락’에서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싸주시던 소박한 도시락에 담긴 추억을, ‘작별을 고하며’에서는 한때 함께했던 것들과의 시간을 노래한다. Knock에선 먼지 쌓였지만 여전히 찬란한 기억을 지닌 채 앞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젠 흐릿해진 기억들일지라도, 감정으로 진하게 남았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사랑' - 페퍼톤스 노래에서 찾은 사랑
음악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하나의 키워드가 있다. 바로 ‘사랑’이다. 그런데 페퍼톤스의 음악에서는 그 흔한 사랑 노래를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거의 부재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리고 키워드를 하나하나 정리하며 짚어가다 보니,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페퍼톤스의 음악에도 분명 사랑은 존재한다. 다만 그 사랑은 남녀 간의 사랑에 머무르지 않고, 삶과 세계를, 나아가 온 우주를 끌어안는 형태의 사랑이었다.
누군가의 ‘시작’과 ‘계절’, ‘사람’, ‘용기’, ‘추억’ 그리고 ‘끝’까지. 페퍼톤스의 음악은 '삶'을 담았다. 무언가를 시작할 땐 ‘행운을 빌어요’를 듣고, 용기가 필요한 날에는 ‘코치’의 응원을 떠올린다. 'Thank You'를 들으며 소중한 사람을 생각하고, 계절의 끝이면 ‘계절의 끝에서’를 들으며 한 해를 마무리한다. 가끔은 ‘도시락’과 같은 노래를 들으며 추억에 잠기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여정이 끝이 났을 때, '긴 여행의 끝'을 들으며 원래 자리로 돌아간다.
그들이 걸어온 길은 결국 청춘과 삶을 향한 사랑이었으며, 세상 모든 것에 대한 사랑이었다. 삶을 노래하는 음악에 어떻게 사랑이 빠질 수 있겠는가. 어쩌면 그들이 전형적인 사랑 노래를 굳이 원해서 하지 않는 이유도, 이미 그들의 음악에 곳곳에 사랑이 녹아들어 있어서가 아닐까. 온 우주를 노래하는데, 여기서 무슨 사랑이 더 필요할까?
just one more look into the sky
you'll know
just one more look into the streets
you'll see
where we are heading for
and what to love
- 페퍼톤스, 'Tulipsong' 中

그리고 그들의 음악을 들으며 흘리는 눈물에서 신맛이 나지 않았던 이유는, 그들이 ‘계속되는 삶’을 노래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들이 노래에 담은 인생의 아름다움은, 우리에게 고스란히 전해져 눈물방울을 달콤하게 물들인다. 그 작은 물방울 속에는 이미 사랑과 삶이 가득 차 있어서 다른 감정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그래서 그 눈물은 맑게 반짝인다. 오직 행복으로만 빛난다. 그들의 음악과 함께 달콤한 눈물을 흘리며, 나 역시 인생을 사랑하며 살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