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짧은 인생, 좋게만 살다 가기를.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공연]

글 입력 2023.12.17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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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의

프로그램 북 내용을 참고하여 작성되었으며,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조씨고아_포스터.png

 

 

2018년의 무더운 여름날부터 5년을 기다려왔다. 단지 꼭 보라는 친구의 한마디에 공연 제목을 기억했다. 대극장 라이선스 뮤지컬도 5년 넘게 소식이 들리지 않을 수 있는데 무엇을 믿고 공연을 계속 기다린 것일까. 시놉시스 한 줄도 알지 못하는 공연의 제목을 5년째 소중히 간직해왔다.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5년을 기다린 끝에 드디어 관람하게 된 공연. 이 시간을 운명이 아닌 ‘선택’으로 설명하고 싶게 만드는 공연을 소개한다.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2015년 초연 이후 제52회 동아연극상, 제8회 대한민국연극대상 등 여러 수상을 자랑하며 수차례의 매진 신화를 기록한 국립극단의 대표 레퍼토리다. 올해 명동예술극장 공연 100회를 맞이하며 2023년 연말을 장식한다.


 

시놉시스

 

진나라 대장군 도안고는 권력에 눈이 멀어 조씨 가문의 멸족을 자행한다. 조씨 집안의 문객이던 시골 의사 정영은 억울하게 멸족당한 조씨 가문의 마지막 핏줄인 조씨고아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자식과 아내의 목숨마저 저세상으로 떠나보낸다. 조씨고아를 아들로 삼아 정발로 키우고 이를 알아채지 못한 도안고는 긴 세월동안 정영을 자신의 편이라 믿고 정발을 양아들로 삼는다. 그렇게 20년이 지나고 정발이 장성하자 정영은 참혹했던 조씨 가문의 지난날을 고백하며 도안고에 대한 복수를 부탁하는데…

 

 

 

객석이 눈물바다가 된 이유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의 마지막은 묵자(무대 행동을 돕지만 관객에겐 보이지 않는 인물로 상정되는)의 대사와 나비가 장식한다. 커튼콜 이전, 막이 내리고 극장 내 암전이 찾아왔을 때 나는 연신 눈물을 닦아야 했다. 미리 준비해 둔 휴지가 볼품없어질 정도로 눈물샘이 터졌고 박수 소리에 숨어야 할 만큼 주체할 수 없었다. 아이를 살리고, 그가 장성하여 복수하고, 끝내 악인이 처단되는 이야기일 뿐이다. 관람 전 읽은 시놉시스가 전부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흔한 권선징악의 이야기. 하지만 묵자의 마지막 대사가 결말의 틀을 깬다.


1. 은혜와 희생의 1막 - 조씨 가문에 은혜를 입은 자들이 조순을 비롯해 조씨 가문 사람을 살리고자 노력한다. 누군가는 망가진 바퀴를 대신하여 조순의 도망을 돕고, 누군가는 자신의 아이를 대신 내놓아 조씨고아를 살린다. 복수의 씨앗이 될 조씨고아와 그를 살린 정영만이 남은 채 1막이 끝난다.


인터미션 15분 내내 은혜가 무엇인지 고민했다. 정영이 조씨가문에 입은 은혜가 무엇이길래 자신의 아이까지 죽게 만드는 선택을 할 수 있는지 생각했다. 이것을 과연 희생이라고 칭해도 되는지 고뇌하기도 했다.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이기 때문에 숭고하다는 말이 따라붙는 것인가 싶었다. 그래서 타인을 위해 희생한다는 행위의 의미를 체감할 수 있었다. 이해하기 힘들고 따르기를 주저할 만한 결정을 해낸다는 것, 어쩌면 큰 용기를 가져야만 실행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 용기와 숭고함만을 바라볼 수는 없었다. 공주의 부탁을 받는 것부터 결국 조씨고아를 살리는 데 성공하는 것까지 정영에게서는 의무감이 가장 많이 느껴졌다. 본인의 뜻보다는 타인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선택이었다. 그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그뿐이었다. 조씨고아를 살리고 조씨 가문의 복수를 이행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힌 듯했다. 정영의 결단은 용기라기보다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내린 선택이었다. 상황이 여의찮았다는 것을 알지만 따져보면 정발의 희생 역시 본인 의지가 아니었다. 은혜와 희생 뒤에 감춰진 꺼림칙함을 발견한 채로 2막이 시작되었다.


2. 복수와 인생의 2막 - 2막은 장성한 조씨고아가 과거를 알게 되고 도안고에게 복수하는 내용을 담았다. 20년을 숨기고 살았던 진실을 밝히고 그동안 염원하던 복수를 이뤘다. 하지만 모든 것이 끝난 후 정영에게 남은 것은 없었다. 똑같이 구족을 멸할 것이라는 말에도 정영은 기뻐하기는커녕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느라 바빠 보였다. 자신의 인생을 바쳐 복수에 성공했지만 정영 본인을 포함하여 과거의 인물 그 누구도 기뻐하지 않았다. 그 상황에 남기는 묵자의 마지막 대사는 다음과 같다.


 

“이 세상은 꼭두각시의 무대

북소리 피리소리에 맞추어 놀다 보니

어느새 한바탕의 짧은 꿈

갑자기 고개를 돌려 보면 어느새 늙었네

이 이야기를 거울 삼아

알아서 잘들 분별하시기를

이런 우환을 만들지도

당하지도 마시고 부디 평화롭기만을

금방이구나 인생은, 그저 좋게만 사시다 가시기를”

 


150분 동안 정영에게 이입하던 관객은 이 모든 것이 꼭두각시의 무대처럼 흘러갔다는 것을 느낀다. 정영의 삶은 꼭두각시의 인생과 무엇이 다른가. 20년을 가득 메웠던 의무는 사라졌고 늙어버린 그에게 남은 것은 없었다. 인생은 찰나다. 어느샌가 늙어있을 것이 분명한 인생을 복수 하나만으로 채우는 것이 아깝지 않은가? 복수는 꼬리에 꼬리를 문다.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기 마련이다. 그러니 누군가 복수하게 하지도, 복수를 꿈꾸지도 말고 짧은 인생을 좋게 살라는 말을 건넨다.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들리기 시작한다. 정영에게 이입한 관객은 그 허무함에 눈물을 흘리고 그것을 다 닦아낼 새도 없이 삶의 소중함을 느끼게 된다. 찰나를 닮아서 더욱 소중한 삶을 누군가를 미워하고 지워버리는 데 허비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되새긴다.


연출가 고선웅은 인터뷰를 통해 계속 오가는 복수의 고리를 누군가는 끊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진짜 분노해야 하고 정말 복수를 해야 하는 일들이 있다며 역사적 사건들을 언급했고 그 부분에서는 정리를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정리가 미흡하여 복수의 순환 고리가 끊어지지 않는다면 너무 불행한 일 같다고 말하는 그의 말에 공감했다. 잘 정돈된 생각으로 전하는 그의 신념은 작품에서도 드러났다.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통쾌한 복수를 그려내는 이야기가 아니다. 죽음에 또 다른 죽음으로 갚았지만, 종국에는 이 복수의 고리를 끊어내야 한다고 말한다. 끊어지지 않는 고리에 갇혀 불행한 삶을 살지 말고 짧은 인생을 좋게만 살다 가라고 조언한다.


 

 

사랑받는 레퍼토리의 매력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의 막이 내린 후에 또렷하게 남은 것 중 하나가 연출적 특성이었다. 희극적 요소가 비극을 만드는 것부터 무대 연출, 묵자의 활용 등 독특하게 느껴지는 연출적 특성이 작품의 입체적인 매력을 만든다.

 

 

조씨고아_무대.jpg

 

 

1. 무대 연출 - 많은 연극과 뮤지컬의 무대는 한정된 공간에서 장소의 변화를 표현하기 위해 다채롭게 배경을 꾸민다. 주요 인물의 주된 공간을 조성하고 그들을 표현하는 소품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무대 연출일 것이다. 하지만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그러한 정형을 떠올릴 겨를조차 없었다. 짙은 회색빛으로 보이는 무대 바닥과 자줏빛으로 물든 막이 전부인 양 배우들의 연기가 시작된다. 마치 고대 그리스 연극이 펼쳐지듯 광활한 공간을 채우는 것은 배우의 연기다. 연극의 본연을 마주하며 시작한 이야기는 독특한 무대 장치로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만의 매력을 만들어 간다.


상차림을 전해주는 이가 무대 아래서 올라오고 성문이 오르내리며, 모래 무덤이 무대 위로 모습을 드러낸다. 거대한 날붙이, 달, 나무, 수레바퀴 등 각종 소품과 배경이 천장에서 내려온다. 눈에 보이는 무대 바닥은 평면적이기에 이 표면에 무언가 배치하고 이동시키는 수평적 움직임을 기대할 것이다. 하지만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에서의 무대는 천장과 바닥 밑까지 활용하는 수직적 움직임으로 채워진다. 이러한 무대 활용은 소품의 등퇴장으로 인한 암전이 필요치 않으며 소품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은 채 배우의 연기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도록 한다.


자줏빛 커튼으로 가득한 프로시니엄 무대의 전형적인 모습까지도 깨버린다. 배우가 막을 직접 치면서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며, 추격이나 언쟁의 상황에서 커튼 뒤를 오간다. 그들이 막 뒤로 몸을 숨기며 사실상 무대 위에 등장한 것은 그 무엇도 없는 찰나가 생기더라도 관객은 당황하지 않는다. 자줏빛 막의 뒷공간까지도 배경이 되는 공간이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관객은 평면적인 액자가 아닌 무진히 뻗은 공간을 그려낼 수 있다.


2. 묵자 활용 - 묵자는 죽음을 맞이한 인물을 검은 부채를 활용하여 퇴장시키거나 화살이 박히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조씨 가문의 마지막 핏줄인 조씨고아를 지키기 위한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죽는다. 검은 부채가 펼쳐지면 그 인물의 죽음을 인지하게 되며 이러한 무대 약속이 형성된다. 하지만 묵자의 행동 범주가 부채를 펼치고 닫는 것뿐만은 아니다. 도안고가 던지려던 정발을 두 번이나 빼앗아 들었던 묵자의 행동은 정발이 죽지 않았음을 이야기하는 장치였다. 죽은 정발의 퇴장을 돕고자 했지만 그러한 묵자를 정영이 막아서기도 했다. 분명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역할이 이야기 흐름에 영향을 끼칠 때면 그 행동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묵자를 특정한 인물로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지만 등장인물 사이에 존재하는 생사의 그림자처럼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그런데 이 묵자가 마지막에 나비와 함께 등장한다. ‘나비’로 등장했다는 생각을 깨버리고 모자를 벗더니 대사를 이어간다. 묵자가 나비를 날리며 내뱉는 대사는 제삼자의 시각인지 정영을 비롯해 작품 속 등장인물들의 시각인지 모호하다. 그렇기에 묵자만이 전할 수 있는 대사가 아니었을까. 타자의 몸으로 150분 내내 정영에게 이입하고 있던 관객은 그 모호함을 누구보다 쉽게 공감한다. 이야기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다가도 금세 눈물을 흘린다. 길게 이어온 이야기가 마침내 끝을 맞이하는 순간 우리는 이야기의 본질을 깨달으며, 묵자는 그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하는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


이야기의 결말도, 작품의 연출도 모두 흔한 생각에서 벗어난다. 익숙하게 드는 생각, 예측을 부순다. 그렇지만 관객은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이 비극 자체도 익숙하지 않을뿐더러 예상을 깨버리는 전개와 결말, 독특한 연출이 펼쳐지지만,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그에 앞서 ‘인생’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자신만의 삶을 살아나는 주체로서 인생을 이해할 수밖에 없다. 수많은 낯섦이 존재해도 인생을 이야기하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낯익은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것이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의 매력이자 관객석이 눈물바다가 되는 이유다. 누군가 무언가에 사로잡혀 있다면, 무엇을 놓지 못하고 있다면 이 작품을 보여주리라. 정영의 전철을 밟지 말라고, 나비처럼 자유롭고 좋게 살기를 바란다고 말해주리라.


당신의 삶은 어떠한가?

 

 

[박서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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