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무명씨 모임

덕수궁에서 그 애랑 걷고 싶다
글 입력 2024.02.04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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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돌담길을 연인끼리 같이 걸으면 헤어진다는 이야기 있잖아요. 진짜일까요.


미팅이 끝나고 걸어가는 길이었다. 일 이야기 말고도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오가는 시간. 내가 던진 말에 한 홍보팀 차장이 답했다.


옛날엔 덕수궁 가는 길에 가정법원이 있었어요. 가정법원에선 결국 헤어지게 되니까, 그래서 그런 소문이 생긴 것 같아요. 우습죠. 어떤 심경으로 걸었는진 아무도 관심이 없지만 끝이 어떻게 됐는지만 떠들잖아요. 이젠 교대 쪽으로 가정법원이 옮겨갔으니 덕수궁을 걷는다고 해서 헤어지진 않을텐데 여전히 소문은 남아있네요.


좋아하는 길이라 누군가와 함께 걷고 싶을 때마다 불쑥 떠오르는 말이었는데 이렇게 쉽게 해소될 일이라니. 세상에 완벽한 정답은 없지만 각자 자신을 위해 정해놓은 모범답안은 있을 것이다. 불행하지 않기 위한 마음의 방패 같은 것들. 징크스에 대한 정의는 따로 있지만 나는 걱정되는 불행에 미리 세운 바리케이드를 징크스라고 부른다.


내가 쉽게 무너지지 않고 쉽게 불안해지지 않고 쉽게 아파하지 않을 정도의 단단한 바리케이드. 대개는 유치한 공식으로 점철된 것이라 굳이 누군가에게 설명하진 않는다.


하나만 소개해보자면 역시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일기장에 이름을 제외한 것들을 적는다.


이름을 적는 순간 어떤 방식으로든 그 사람과 어그러지기 때문. 어떤 사람을 좋아하다보면 마침내 이 사람의 이야기를 내 수많은 기록에 끼워넣을 수 있겠다는 확신이 생길 때가 있는데, 일기에 이름이 적히면 한 달을 못 채우고 관계가 끝났다.


내가 너무 늦었던 것일지, 상대가 너무 빨랐던 것일지. 누구의 탓을 하기도 애매하니 결국엔 애꿎은 일기장이 그 죄를 대신 뒤집어썼다. 그렇게 종이를 엮은 실이 나달나달해질 만큼 많은 종이를 찢어내고서야 나는 명료하게 해답을 찾았다.


이름을 적지 않으면 되는구나. 데스노트도 아니고 애인 이름을 일기에 못 적는 게 말이 되냐고. 일기장이 그런 비난들을 받아야 하는 시간이 있었다.


일기를 원망하는 일은 오래가지 못했다. 단순히 타이밍 탓을 하기에는 절묘하리만치 명확하게 쌓이는 데이터를 무시하기는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시작은 그래, 어떻게든 내 탓으로 이 관계가 끝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하고 서툰 마음이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불안이 먼지처럼 쌓였다. 더 간절하게 사랑하는 이의 마음의 바닥에는 두려움이 자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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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마음을 받은 이들은 결국 모두 이름을 잃은 무명씨가 됐다.


눈썰미 좋은 지은이가 이 부분을 짚어내서 얼마 전에 처음으로 이 이야기를 토해냈다.


사실은 그랬단다. 진짜 유치하고 말도 안되는데 늘 그렇더라.

 

말이 안되는 게 어딨어. 그냥 언니가 그 관계들에 대해서 얼마나 기대를 많이 했는지 느껴질 뿐이야. 그 징크스가 통하지 않는 사람이 나타나면 좋겠다. 징크스를 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확신이 드는 사람이 언니한테 나타나주면 좋겠어.


말할수록 힘을 잃는 것들이 있다. 무서움에 대한 이야기, 미워하는 마음, 비밀 같은 것들. 징크스도 말할수록 힘이 사라지는 걸까. 여름이 시작할 때쯤 징크스에 대해 말할 사람이 또 생겼다. 처음부터 끝까지 적고 싶은 이야기뿐이라 꽁꽁 참다 아, 안되겠다 하고 일기장을 폈을 때 전화가 왔다. 나올 수 있냐는 말에 대충 옷가지에 몸을 끼고 나갔다가 해가 뜨기 직전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결국 그 날은 일기를 쓰지 못했지. 돌아와서 그 애한테 징크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앞으로도 영영 네 이름은 일기에 쓰지 말아야지 말하는 내게 엄청 쓰고 싶은 날이 올 거 아니야. 라는 답을 한 그 애의 카톡을 보면서 나는 지금 얼굴을 마주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붉어진 얼굴은 밤이 깊어도 보일 만큼 붉었다. 일기장 하나가 꼬박 너의 이야기로 찬 동안 우리는 여전히 함께다.


겨울엔 너랑 덕수궁 돌담길을 걷고 싶다. 내가 가진 불안을 두려움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만들어줄 수 있는 그 애의 앞에서 붉어진 얼굴을 들키는 건 부끄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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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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