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마음을 담은 섬세한 편지, 뮤지컬 '팬레터' [공연]

편지의 주인을 나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글 입력 2022.03.06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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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여름의 유튜브 알고리즘은 나를 뮤지컬 <팬레터>의 프레스콜 영상으로 이끌었다. 그게 내가 처음 <팬레터>를 만난 계기다. 나는 영상을 보고 흥미를 가졌고, 이후 그해 겨울 올라온 재연을 보기 위해 지금은 사라진 대학로 동숭아트센터로 갔으며, 곧바로 사랑에 빠졌다.

 

공연이 돌아올 때마다 매번 보러 갈 정도로 사랑하는 이 작품에 대한 마음을 언어로 담아내기에는 아직 스스로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일단 몇 자 적어보고자 한다. 후기 글의 성격을 띤 이상, 스포일러와 주관적 해석이 어느 정도 있다는 점 양해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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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외로움을 바라보며 위로를 얻는 두 사람



1935년 경성. 억압적인 가정환경 속에서 자란 세훈의 유일한 삶의 버팀목은 문학, 그중에서도 소설가 김해진의 작품이다. '히카루'라는 필명으로 세훈은 직접 글을 쓰기도 하고, 해진과 마음을 온전히 담아낸 편지를 주고받는다. 편지를 쓰고, 답장을 읽는 그 시간만큼은 세훈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순간이다.


 

선생이시여, 슬픔을 안고 계시나이까.

그렇다면 그 슬픔을 나누어 주소서.

그리고 거기 따르는 길을 지시하여 주소서.

 

 

해진 역시 세훈의, 히카루의 팬레터를 하루하루 기다리며 살아간다. 그는 어려서부터 한없이 외로운 감정을 머금으며 살아왔다. 그런 그에게 공감하는 편지를 보내는 히카루라는 존재는 단순히 팬이 아니다. 자신의 슬픔을 처음으로 온전히 바라보고 헤아린 사람. 자신과 같은 슬픔을 갖고 있는 사람. 그래서 함께 슬퍼할 수 있는 사람이다.

 

무엇보다 자신과 공감할 때 사람은 상대방에게 여지없이 빠져든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좋아하는 영화나 좋아하는 음악을 물을 때. 그 질문은 대부분 그 사람과의 공통점을 찾아 공감하기 위함이니 말이다. 단순히 같은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될 때에도 큰 기쁨을 느끼는데,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있음을 알게 될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하기 힘들 것이다. 그 기쁨은 서로의 결핍을 채울 수 있을 수 있는 존재는 서로 밖에 없다는, 그래서 우리의 사이는 특별하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평생을 자신에게 그런 빛과도 같은 존재가 찾아올 줄 몰랐던 이에게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오해가 자아낸 거짓말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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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훈은 순수문학 친목단체 '칠인회'의 작업실이기도 한 신문사 편집실에서 머물며 급사로 일하기 시작한다. 어느 날 칠인회에 해진이 가입하고, 세훈은 그를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으매 기뻐한다. 그러나 세훈은 해진이 히카루와 자신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며, 자신과 팬레터가 아닌 러브레터를 주고받고 있다 말하는 것을 듣고 놀란다. 세훈은 해진이 히카루를 여자라고, 여자이기를 바라고 있다고 생각한다.

 

오해로 인해 세훈이 히카루로서 해진에게 편지를 보내지 않자, 해진은 극도로 불안해한다. 그런 해진의 모습을 보며 세훈은 그를 도무지 실망시킬 수 없어 그가 바라는 히카루를 꾸며내기 위해 거짓말을 시작한다. 거짓말이 아니라고 자신까지 속여 가면서. 세훈은 히카루의 나이와 생일, 성격부터 외형, 가정환경까지 모든 것을 확고하게 지어내 해진에게 편지를 보낸다. 이제 히카루는 단순한 필명이 아니다. 정말로 살아있는 사람이자 해진과 편지를 주고받는 사람이다.

 

세훈은 자신까지 속였기에 충분히 상황을 제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세상은 자신이 생각한 대로만 돌아가지 않는다. 히카루가 지어내는 거짓말을 위한 거짓말은 한없이 이어지고, 눈덩이처럼 불어나며 하나의 독자적인 세계가 된다. 이제 세훈은 자신이 놓은 히카루의 덫에 걸려들어 휘둘린다.

 

히카루에게 휘둘리는 사람은 세훈뿐만이 아니다. 해진도 마찬가지다. 해진은 철저히 히카루가 원하는 대로 움직인다. 히카루를 통해 자기 자신이 슬픔의 그늘 아래서 벗어났기에 모든 걸 버릴지라도 그를 놓쳐서는 안 된다. 어느 순간 해진은 히카루를 만나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저 서로 글을 주고받기만 하면 그만이다.

 

여기서 세훈과 해진이 다른 점은, 세훈은 자신이 모르는 사이 휘둘려 갔다면 해진은 자신이 직접 기꺼이 휘둘려지기를 선택했다는 점이다.

 

극중 세훈의 나이는 18살이다. 자기 자신은 다 큰 것 같을지 몰라도 어른이 보기에는 수가 훤히 다 보이는, 아직 한없이 충동적인 아이일 뿐인 18살. 권위적인 가정환경에서 외로움을 파먹으면서 자란 세훈은 자신이 존경하는 해진이 히카루에게 의지하는 것을 알고, 한없이 그 자리에 안주하고 싶어 한다. 그러니 자기 자신조차 통제할 수 없는 히카루라는 충동적이고 대담한, 그래서 매력적인 자아에 한순간 끌려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해진은 다르다. 그는 어른이고, 늘 가까이서 자신을 지켜보는 세훈의 시선이 편지에서 느낀 히카루의 시선과 겹쳐 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애써 스스로가 이제까지 일궈놓은 이상을 위해 자신까지 속이려 하고, 그저 두 눈앞에 직접 보이는 히카루의 편지, 그리고 히카루의 글들만을 믿으려 한다. 평생 자신의 슬픔을 알아줄 이에 목말라해왔기에, 해진은 기꺼이 그 슬픔을 알아주는 세훈의 거짓말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두 사람은 결국 극단적으로 각자 자신의 세상을 위해 거짓말을 하고 거짓말을 눈감아준다는 점에서 맞닿아 있다. 영원한 거짓말은 없다는 듯, 스스로를 속이기 시작한 그들의 이야기는 여러 상황과 맞물려 끝내 파국으로 치닫는다.

 

 

 

상처를 치유하는 섬세한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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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팬레터>에 빠져들었던 가장 큰 이유는 모든 갈등을 봉합하는 넘버 [해진의 편지] 때문이었다. 세훈이 해진에게 자신이 히카루라는 것을 고백하고, 해진은 현실을 거부하며 세훈을 떠난다. 이후 시간이 흘러, 세훈은 이제는 세상에 없는 해진이 적은 마지막 편지의 존재를 알게 된다. 편지에는 항상 적혀있던 '히카루 전(前)'이라는 글자 대신, '세훈 전(前)'이라는 글자가 뚜렷하다.


 

새삼스레 말이 맴돈다

너의 말들로 그때를 내가 버티었다

그게 누구라도

편지의 주인을 나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편지가 상처를 내기도, 그리고 아물게도 하니 아이러니하다. 편지를 읽기 전 세훈은 자신의 거짓말이 해진을 죽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몰아세웠다. 만약 처음부터 솔직했었더라면, 아예 처음부터 편지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셀 수 없이 후회하고 상황을 돌이켜보기도 했을 것이다. 괜찮다고, 너의 탓이 아니라고, 너 덕에 내가 버텼다고 말해 줄 단 한 사람을 간절히 바랐을 것이다.

 

세훈이 해진의 편지를 읽은 순간, 이제 두 사람은 서로의 상처가 아니라 다시 서로의 위로가 되어준다. 순수한 애정이 어린 마음으로 서로 편지를 주고받았던 처음 그때처럼.

 

너무나도 큰 상처는 아물어도 완벽하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 대신 상처는 흉터를 남기고, 그 흉터에는 기억이 스며든다. 성장의 훈장이자 다시는 지난 과오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어떠한 흔적이다. 세훈은 해진의 위로를 머금고 이 흉터를 당당히 마주 볼 것이다. 해진 역시 편지를 쓰면서 세훈을 위로하고, 자기 자신의 상처까지 치유했을 것이다. 모든 등장인물의 성장을 보여주는 따뜻한 마무리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대사와 가사, 매력적이고 입체적인 캐릭터들의 향연, 그리고 이 모든 걸 납득하게 만드는 배우들의 연기. 사실 내가 <팬레터>를 사랑하는 이유를 전부 적자면 며칠 밤낮을 새야 할지도 모른다. 물론 완벽하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이 극에는 2017년부터 여전히 나의 마음을 흔드는 가사가 있고 대사가 있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계속 <팬레터>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은 서로 공감할 수 있는 상대에 여지없이 빠져들지 않는가.

 

 

[류지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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