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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죽음으로부터 삶으로 [도서/문학]

『이방인』의 뫼르소와 실존의 자각

by 서연화 에디터
2026.08.12 14:07

낯선 곳에서 낯선 존재가 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자신의 마음이 기댈 곳을 찾지 못한 낯선 풍경 속에서 어디에도 어울리지 않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지독한 고독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자신의 삶에서조차 이방인이 된다면, 과연 나의 영혼이 머물러야 할 곳은 어디일까.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사회에서도, 자신의 삶에서도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세 번의 죽음을 마주하면서 생과 사를 새롭게 고찰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확실성으로부터 오히려 생생한 실존의 감각으로 나아간다. 그런 의미에서 『이방인』은 자신의 삶에서조차 이방인이었던 뫼르소가 죽음을 통해 자신의 삶으로 돌아오는 실존의 여정을 담은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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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의 삶에서의 이방인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뫼르소는 마치 죽지 못해 살아가는 사람처럼 보였다. 사랑도, 결혼도, 직업도, 심지어 어머니의 죽음조차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시니컬한 인간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를 그렇게 단편적으로만 판단하기에는 그는 오히려 상당히 열정적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인물이다. 우울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지도 않고, 사회에 대해 특별히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지도 않으며, 허무주의자도 비관론자도 아니다. 그는 그저 자신의 하루를 충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다.


아무 이유 없이 화물차 뒤를 쫓아가거나, 마리와 해수욕을 하고 데이트를 즐기는 그의 모습에서는 오히려 즉각적이고 순수한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 드러난다. 그런 의미에서 뫼르소는 공허하거나 무감각한 인물이 아니라, 오로지 ‘살아 있음’ 그 자체에 집중하며 살아온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과거도, 머나먼 미래도 아닌 현재이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것이 곧 그의 삶 전체이다. 과거에 대한 후회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그의 의식 속에서 거의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사형을 앞둔 그는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한다. 뫼르소는 심리적으로 공허하거나 냉소적인 인물이 아니라, 현재의 순간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단순하고 즉각적인 인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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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는 동시에 매우 무관심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태도를 설명하며 “나는, 원래 육체적 욕구에 밀려 감정은 뒷전이 되는 그런 천성”이라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감정은 어떤 사건을 자신의 삶과 연결하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뫼르소에게는 자신의 감정과 그것을 체험하는 방식 사이에 일정한 거리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감정은 그를 스쳐 지나갈 뿐, 오랫동안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일상에서 흔히 경험하는 감정조차 그에게서는 쉽게 발견하기 어렵고, 그가 직접 말하듯 그의 의식에는 육체적 욕구와 현재의 감각이 더욱 강하게 자리한다.


그렇기에 뫼르소에게는 대부분의 것이 서로 큰 차이를 갖지 않는다. 그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사건과 자신의 행동을 언제나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는 듯한 중립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다. 이것과 저것, 이것이 아닌 것과 저것이 아닌 것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를 두지 않는다. 모든 것이 자신과 특별히 관계가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게 뫼르소는 사회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 속에서도 철저한 이방인으로 살아간다.

 

 

 

사회에서의 이방인


 

카뮈가 남긴 한 편지에 따르면 뫼르소는 ‘거짓말하지 않는 인간’이다. 처음에는 종잡을 수 없는 낯선 인물처럼 보였지만, 동시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뫼르소는 매우 매력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말을 따라가다 보면 그는 정말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도,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도 자신의 감정을 꾸며내거나 사실 이상을 말하지 않는다.


소설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서 마침내는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라는 구절은 이러한 뫼르소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뫼르소는 마치 돌이나 바람, 바다처럼 존재한다. 그는 거짓말하지 않고, 외부 세계를 끊임없이 판단하려 하지 않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에게는 너와 나 사이에 어떤 판단이나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 대신 ‘지금’이라는 순간이 존재한다. 그는 타인에 대해서도, 심지어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판단하지 않는다. 그저 존재하고, 느낄 뿐이다.

 

그러나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끊임없이 가면을 쓰고, 때로는 거짓말하며, 서로를 판단하고 또 판단받는 과정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사회가 요구하는 방식에 맞추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특정한 상황에서는 특정한 반응을 보여야 한다. 뫼르소는 바로 이러한 사회적 규범에 자연스럽게 편입되지 못한다. 그는 사회가 요구하는 감정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사회의 변두리에 놓인 이방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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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아랍인을 살해한 이후 열린 재판은 이러한 사회의 모습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재판에서 뫼르소는 태양과 육체적 감각에 의해 순간적으로 아랍인을 살해한 인물에서, 마치 처음부터 살인을 계획한 냉혹한 범죄자로 재구성된다. 특히 재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살인 자체만이 아니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사실, 장례식 다음 날 마리와 해수욕을 하고 영화를 보았다는 사실 등이 그의 인격을 판단하는 증거로 사용된다. 사회는 그가 실제로 어떤 인간인지보다 사회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행동했는지를 기준으로 그를 판단한다.

 

거짓말하지 않는 뫼르소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 자신의 진실과 무관한 방식으로 판단되고, 결국 사형이라는 결과를 맞이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재판은 우리 사회의 축소판으로 읽을 수 있다. 어쩌면 인간의 삶 자체가 하나의 긴 재판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끊임없이 판단하고 판단받으며 살아간다.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어느 순간 사회가 만들어낸 ‘판단된 삶’과 자신의 ‘진실한 삶’을 혼동하기도 한다.


그러나 판단의 잔인함은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에 반드시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데 있다. 뫼르소의 변호사는 재판을 두고 “이것이 이 재판의 모습입니다. 모든 것이 사실이라지만, 사실인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뫼르소가 실제의 자신과는 다른 방식으로 재판받고 사회가 만들어낸 논리에 따라 처단되는 모습은, 사회적 판단이 지닌 기만성을 드러낸다. 그런 의미에서 『이방인』의 재판에는 어쩌면 ‘타인을 함부로 재판하지 말라’는 질문이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이방인에서의 탈출


 

뫼르소는 철저한 이방인으로 살아왔다. 사회에서도, 자신의 삶에서도 무관심이 그의 삶을 지배한다. 그러나 자신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마주하게 되면서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인생 전체가 하나의 삶으로서 다가오는 경험을 한다.


모든 것에서 한 발짝 떨어져 관망하기만 하던 그는 죽음 앞에서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더 이상 도망칠 곳도, 피할 곳도 없는 순간, 억눌려 있던 감각과 생각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바로 그 지점에서 그의 실존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다. 단순하고 즉각적이기만 했던 그의 삶이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지평선과 맞닿는 순간, 그는 비로소 자신의 삶에 깊이 관여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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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앞두고서야 그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인식한다. 자신의 심장이 뛰고 있고, 과거의 날들이 실제로 존재했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의 삶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렇게 이방인이었던 그의 태도는 삶에 대한 애착과 함께 변화하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삶에서조차 이방인으로 남아 있었지만, 역설적으로 죽음을 통해 자신의 삶으로 돌아온다.

 

 

 

세 번의 죽음과 삶의 자각


 

이 소설은 처음과 중간, 그리고 끝에서 반복적으로 죽음을 이야기한다. 어머니의 죽음, 아랍인의 죽음, 그리고 자신의 죽음. 이 세 번의 죽음은 소설 전체를 구성하는 중요한 축이라고 할 수 있다. 어머니의 죽음과 자신의 죽음이 양 끝에 놓여 있다면, 그 사이에 놓인 아랍인의 죽음은 두 죽음을 연결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어머니의 죽음은 처음에는 뫼르소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떤 사건의 충격을 즉각적으로 경험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시간이 흐른 뒤 가랑비에 젖듯 천천히 그 의미를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다. 뫼르소는 후자에 가까운 인물처럼 보인다. 소설의 끝에 이르기까지 그는 어머니에 대한 생각을 문득 떠올린다. 자신의 감정을 깊이 들여다보려 하지 않기 때문에 그 의미를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삶에서 상당히 큰 부분을 차지했던 사람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통해 죽음이 그의 삶에 각인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머니의 죽음을 경험함으로써 죽음의 스산한 기운이 안개처럼 그의 삶 속으로 서서히 스며들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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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죽음과 타인의 죽음, 그리고 자신의 죽음은 느슨하지만 분명하게 연결되어 있다. 아랍인을 살해하기 직전 뫼르소는 장례식 때와 같은 태양을 의식한다. 이 장면에서 태양과 죽음의 기억이 강하게 결합되어 있으며, 이러한 감각적 경험이 그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읽을 수 있다. 또한 사형을 앞둔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어머니의 죽음을 다시 생각한다. 그는 어머니 역시 죽음을 앞두고 삶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얻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머니가 죽기 전에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마음을 가졌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이다. “아무도, 아무도 엄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라는 그의 말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어머니의 죽음을 통해 즉흥적이고 현재에만 집중하던 뫼르소의 의식에는 처음으로 미래에 대한 하나의 확실한 사실이 각인된다. 그것은 바로 삶과 죽음이다. 소설 전체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아무것도, 아무것도 중요한 것은 없다”와 “아무 의미가 없다”라는 말 역시 이러한 죽음의 자각과 연결된다. 그에게 죽음은 삶의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살아 있다는 사실과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에만 궁극적인 의미를 남긴다. 다시 말해, 자신의 생과 사를 제외한 나머지 것들은 더 이상 절대적인 중요성을 갖지 않는다.

 

 

 

죽음에서 삶으로


 

결국 뫼르소는 하나의 결론에 도달한다. 모든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는 점에서 잠재적인 사형수이다. 피할 수 없는 진실한 운명이 있다면 그것은 죽음이다. 그러나 이 운명의 종착지가 반드시 허무주의나 자살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죽음이 피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단 한 번뿐인 삶의 생명력을 더욱 치열하게 느끼며 살아가야 한다는 결론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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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죽을 존재인데 삶을 아등바등 살아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언젠가 죽을 존재이기 때문에 지금 주어진 삶을 더욱 소중하고 치열하게 살아갈 수도 있다. 삶과 죽음 중 어느 쪽에 의미를 부여할 것인지에 정해진 정답은 없다. 중요한 것은 죽음을 인식하는 방식에 따라 삶을 바라보는 방식 역시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뫼르소는 어둡고 컴컴한 죽음이 오히려 밝고 따뜻한 생을 더욱 눈부시게 만들어주는 존재임을 자신의 죽음을 통해 보여준다. 죽음은 삶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만드는 강력한 계기가 된다.

 

 

 

작가의 생애


 

알베르 카뮈는 1913년 11월 7일 알제리의 몽도비에서 아홉 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가 한 살이 되기도 전인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포도 농장 노동자였던 그의 아버지는 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카뮈는 17세였던 1930년 폐결핵에 걸리면서 처음으로 죽음의 위협을 직접적으로 경험한다. 이후에도 평생 여러 차례 결핵이 재발했고, 그때마다 건강상의 어려움을 겪었다. 이 때문에 대학교수 자격시험에 응시할 수 없었고, 이후 진로를 수정하여 진보적인 일간지에서 기자로 활동하게 된다.


1937년은 카뮈가 작가로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이 시기에 그는 첫 번째 결혼 생활의 실패와 공산당과의 결별을 경험했고, 건강상의 이유로 대학교수 자격시험에도 응시하지 못하면서 자신의 진로를 다시 고민하게 된다. 같은 해 8월에는 재발한 폐결핵의 치료와 요양을 위해 알프스 지방에 머문다. 그의 기록을 보면 이 시기의 경험이 그의 세계관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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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메모에서 그는 ‘결혼’과 ‘출세’ 등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중요하다고 여기는 삶의 목표와 자신이 얼마나 무관한지를 인식한다. 이러한 생각은 훗날 『이방인』의 뫼르소가 보여주는 삶의 태도와 연결된다.


1939년 전쟁이 발발하면서 그가 몸담았던 신문은 폐간되었고, 1940년 카뮈는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파리로 향한다. 햇빛으로 가득한 알제리의 바다에서 벗어나 음울하고 낯선 대도시 파리에 던져진 카뮈에게 파리는 실제로 이방인의 공간이었다. 그는 한 편지에서 알제와 오랑의 저녁, 그리고 바다를 바라보며 느꼈던 평온함을 그리워한다고 썼다.


이러한 점에서 『이방인』은 단순히 허구적인 인물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햇빛 찬란한 알제리의 바다와 작열하는 태양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에는, 자신이 익숙하게 속해 있던 공간에서 떨어져 나와 낯선 도시에서 이방인이 된 작가 자신의 경험과 그리움, 그리고 삶에 대한 사유가 일정 부분 녹아 있다고 볼 수 있다.

 

 

 

나가며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의 유명한 문장은 『이방인』의 주제와도 맞닿아 있다. 인간의 존재를 근원적으로 고찰하는 데 있어 죽음을 떼어놓고 생각하기란 어렵다. 살아 있기 때문에 죽음을 생각하고, 죽음을 의식하기 때문에 비로소 살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된다.


어차피 운명을 벗어날 수 없고 결국 죽음에 도달할 것이라면 삶에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방인』은 이 질문을 던지면서도, 반드시 허무주의적인 결론으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오히려 죽음이라는 확실성을 인식하기 때문에 단 한 번뿐인 삶을 더욱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뫼르소는 삶의 익숙함에 묻혀 자신의 삶에서조차 철저한 이방인으로 살아왔다. 그는 사회의 규범에도, 자신의 감정에도 깊이 관여하지 않은 채 삶을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보았다. 그러나 자신의 죽음을 생생하게 마주하는 순간, 그는 비로소 생의 아름다움과 생명력이 주는 광채를 발견한다. 사형을 앞둔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것과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수 있을 것만 같다’고 생각한다. 죽음의 음산한 기운 앞에서 그는 자신이 지나온 날들이 이미 활기로 가득 차 있었으며, 그 자체로 소중한 삶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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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라는 어두운 그림자는 소설 전체에 깊이 깔려 있다. 그러나 카뮈는 빛과 그림자를 병치함으로써, 살아 있다는 익숙함에 속아 죽음을 잊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오히려 생명의 빛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림자가 있기 때문에 빛은 더욱 밝게 보인다. 마찬가지로 죽음에 대한 자각은 삶의 의미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더욱 강렬하게 일깨울 수 있다.


꽃이 진 자리에 단단한 열매가 맺히듯, 삶이 꺼져가는 죽음의 순간에도 새로운 인식과 가능성이 피어날 수 있다. 결국 『이방인』은 단순히 사회에서 소외된 한 인간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삶으로부터조차 멀어져 있던 한 인간이 죽음을 통해 비로소 삶을 마주하게 되는 이야기이며, 동시에 자신의 존재로부터 소외된 현대의 이방인들에게 건네는 하나의 삶의 찬가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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