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에세이] 시대의 미감으로부터 도망쳐 나와

1992년의 지현 씨처럼, 일흔의 할머니처럼, 서촌의 횟집 사장님처럼

by 김그린 에디터
2026.08.12 14:07

[크기변환]시대의 미감.jpg

 

 

저 간판들이랑 SNS 화면이랑 좀 닮은 것 같지 않아?


하루는 누군가 그런 말을 꺼냈다. 거리를 가득 메운 번잡하고 피로한 형형색색의 간판들을 보며 감상을 나누던 와중이었다. 조잡한 유행어로 만들어진 입간판, 누가 더 크고 요란한지 대결이라도 하려는 듯 건물의 외벽을 잡아먹은 수많은 네온사인과 간판들. 거기에 적힌 글자들은 눈을 어지럽게 했고, 그 글자들이 담아내고 있는 특유의 정서는 - 말하자면 미(美)에 관한 사회적 압박, 학벌에 대한 선망, 모든 것을 수익화하려는 자본주의의 면면 등은 - 그 배로 마음을 어지럽게 했다. 누군가에겐 일상적인 풍경이요 누군가에겐 신선하고 이국적인 장면일지도 모르나 나는 이런 간판들이 선사하는 광경을 몹시도 싫어했다.


그러니까, 저 간판들이나 인스타그램 탐색 탭이나 유튜브 메인 화면이나 다 똑같은 느낌이라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 말에는 과연 맞는 구석이 있었다. 자극적인 언어로 이루어진 빨갛고 노랗고 파란 원색의 자막들. 요란한 썸네일들. 출처도 저의도 의심스러운 신조어를 빌려 만든 제목들. 그리고 그 너머의 한없이 가벼운 내용물들. 정돈되지 않은 거리의 간판들과, 아무런 조작을 가하지 않았을 때 나타나는 인스타그램의 탐색 탭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조작을 가하지 않았을 때 나타나는 유튜브 메인 화면의 느낌은 어느 정도 닮아 있었다. 그뿐일까. 마찬가지로 자극적인 썸네일로 가득한 웹툰이며 콘텐츠 플랫폼의 화면도, 가십으로 가득한 인터넷 뉴스 기사며 언론사 메인의 화면도 결은 같았다. 친구는 이를 일컬어 ‘시대의 미감’이라고 했다. 이 시대가 지닌 감수성. 이 시대의 미감. 그 까끌까끌한 단어를 입 안에서 굴려 보면 약간의 절망을 맛볼 수 있었다.


어지럽기 짝이 없는 간판들을 싫어하듯, 어지럽기 짝이 없는 SNS 화면 역시도 나는 매한가지로 싫어했다. 인스타그램의 팔로잉 목록이나 유튜브 구독 목록 따위의 것들은 좋게 말하면 개인의 취향이 드러나되 나쁘게 말하면 개인의 치부가 드러나는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런 조작을 가하지 않았을 때 드러나는 ‘시대의 미감’이 너무나도 싫어서, 내가 싫어하지 않을 수 있는 대상만이 화면에 남도록 알고리즘을 철저히 관리했다. 시대의 미감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서, 보다 따뜻하고 깨끗하고 올곧은 것들에 둘러싸이고 싶어서 의도적으로 그런 것들만을 찾아 바구니에 담았더랬다.


저열한 악의에 의해 벌어진 사건사고들을 마주할 때마다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악의에 맞서는 사람들’의 흔적을 찾았다. 사고의 여파를 수습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는 NGO들, 의로운 관심을 호소하는 시민단체와 모임들, 또는 분연히 일어나는 한 명의 시민이 남긴 글 같은 것들. 암만 악의는 강성하고 선의는 미약해 보인대도, 사람이 세상에 난 이래 억겁의 시간을 지나는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악이 선의 씨를 완전히 말려 버린 적은 없지 않느냐는 말을 상기하려 노력했다.* 올곧은 그들은 해학과 유머러스함의 미덕까지 갖추고 있어서, 댓글로 또는 메시지로 쏟아지는 저급한 공격에도 굴하지 않으며 유쾌하고 트렌디한 맞이 콘텐츠로 응수했다. 주눅들지 않고 선을 이어 나가는 그들의 흔적이 나는 너무나도 고마웠다.


우연히 시야에 흘러들어온 ‘과거의 낭만을 기록하는 사람들’은 또 다른 고마운 존재들이었다. 책의 앞날개며 뒷날개에 친구의 생일을 축하하는 글귀를 적어 선물한 1992년의 지현 씨. 민중의 사랑에 연연하지 말고 네 시를 씩씩하게 써 나가라는 편지를 적은 1998년의 정연 씨. 1988년은 진원이 너의 해가 될 것이라 호언장담하는 이름 모를 사람. 언제나 기타를 창 삼아 스틱을 각목 삼아 저항하기를 멈추지 말 것을 후배들에게 부탁하는 1980년의 까마득한 옛 동아리 선배. 연약한 종이에 펜으로, 연필로 적어낸 덕에 아이러니하게도 굳건히 세월을 가로질러 올 수 있었던 온기들이 퍽이나 마음에 들었다. 잊힐 뻔했던 오래된 이야기를 끄집어내어 먼지를 털고 모두의 앞에 멋지게 내보여 준 그 사람들에게도 나는 마찬가지로 깊은 고마움을 느꼈다.


과거의 이야기를 글로 모아 내보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지금 이 순간의 이야기들을 정성껏 모아 내보여 주는 사람들 또한 있었다. 거리의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담백한 콘텐츠가 내게는 현세의 단비처럼 느껴졌다. 아이들도 편지를 쓰는 사람으로 자라났으면 해서, 일흔 번째 생일에 편지를 받는 대신 손녀들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다는 한 할머니. 부모님의 반대로 하지 못했던 사학 공부를 예순이 넘어 다시 시작하며 딸과 매일같이 역사를 주제로 수다를 떤다는 할아버지. 다 쓴 달력 뒤에 시를 필사해 매달 바꾸어 붙여 둔다는 서촌의 한 횟집 사장님과, 독서 모임에 자신을 초대해 주면 회를 나누어 주겠다는 횟집 사장님의 부탁을 받아들여 대단히 낭만 있는 책을 읽는 날 사장님을 초대하려 한다는 서점의 사장님.

 

한없이 가볍고 한없이 악독한 이미지와 활자와 영상 따위가 사방에 넘쳐흐르는 와중에 정말 우연히 이런 정갈한 이야기들을 마주할 때면, 괜스레 질척한 해변가에서 진주 한 알을 찾은 것만 같은 즐거움과 안도감을 느꼈다. 책갈피를 꽂아 두듯 그런 이야기들을 따로 모아 두며 어쩌면 이런 일화들 또한 시대의 미감은 아닐까 하고 스스로를 달래어 보았다. 얼핏 잘 보이지 않는다 뿐이지 분명히 곁에 살아 숨쉬고 있는, 내가 견디지 못하는 시대의 미감 반대편의 또 다른 시대의 미감.


앞으로도 나는 이런 올곧음과 깨끗함과 따뜻함을 찾아 헤맬 것이다. 정보의, 자극의, 원초적 쾌감의 홍수 속에서 개의치 않고 물살을 거스르며 진주 같은 이야기들을 아득바득 그러모을 것이다. 한때 누구에게 비는지조차 모르면서 몸을 묻고 간절히 빌었던 내용대로, 내가 영영 사랑하지 못할 것들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쳐 내가 사랑할 만한 것들로만 주위를 채울 수 있게 발버둥칠 것이다. 내가 미워해 마지않는 시대의 미감으로부터 도망쳐 내가 사랑해 마지않을 시대의 미감을 조각조각 모아 볼 것이다. 

 

분연히 일어나는 시민의 손을 잡아 함께 의로운 관심을 던질 것이다. 1992년의 지현 씨처럼 책의 앞날개에 축하한다는 장문의 글을 적어 생일을 맞은 이에게 선물할 것이다. 일흔의 할머니처럼 아끼는 누군가를 향해 계속 편지를 써 줄 것이다. 다 쓴 달력 뒤에 시를 필사하는 사장님이 계시는 서촌의 횟집에 방문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장님을 초대하려 하신다는 또 다른 사장님이 계신, 간판 없는 서촌의 서점에 언젠가 꼭 들러 볼 것이다.

 

 

* <미래의 골동품 가게> 발췌.

 

 

김그린 에디터의 인기글

많이 읽힌 글 3편
  1. 01 [Opinion] 아무도 잠들지 말라, 이 순간은 오직 당신만 목격할 수 있으니 - 슬립노모어 서울 [공연]
  2. 02 [Opinion] 바야흐로, 밴드의 시대 [음악]
  3. 03 [Opinion] 이번에는 정말 다를 것만 같은 사랑 이야기, 뮤지컬 '하데스타운' [공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