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흔한 이름은 흔한 인생을 부른다 上

이름에 대한 이야기
글 입력 2022.05.16 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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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롤라인, 너처럼 이름이 평범하면 평생 평범한 인간 취급받는다더라.

 

이것은 영화 <코렐라인>에 등장하는 대사다. 와이본은 처음 만난 코렐라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약 내가 코렐라인이었다면 그대로 손을 들어 와이본의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거나, 바로 앞의 절벽으로 곧장 내 몸을 날렸을 거다.

 

아무래도 후자가 더 그럴싸하게 들린다. 나는 언제나 그렇듯 나를 할퀸 타인보다는 무른 나 자신을 더 쉽게 미워하곤 하니 말이다. 아무튼 와이본이 저지른 실수는 단 하나다. 이름과 평범을 동시에 논한 것. 그건 나의 가장 크고 오래된 아킬레스건이었다.

 

내 이름은 화할 민(旼)에 뜻 지(支) 자를 쓴 '민지'다. 솔직히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감도 안 잡힌다. 이 미적지근한 함의는 둘째 치더라도 내 이름이 싫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세상에는 내가 아니더라도 이미 수많은 '민지'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굳이 그 군중 속으로 뛰어들어 익명이 되길 자처하는 건 단 한 번도 원한 적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내가 이렇게 재미없는 사람으로 낡아가는 건 모두 다 이 평범하기 짝이 없는 망할 이름 탓 같았다.

 

말마따나 그런 어마어마한 저주를 지닌 이름 치고는 상상 이상으로 대단히 흔하다. 장담하건대 코끼리코 스무 바퀴를 돌고 내 삶의 어느 부분을 무작위로 가리켜도 그곳엔 늘 두 명 이상의 '민지'가 있을 것이다. 학교, 학원, 길거리를 포함해서 정말 어디든지. 덕분에 난 '큰 민지', '작은 민지' 아니면 '그때 그 민지', '이 민지 말고 다른 애' 정도로 곧잘 불렸다.

 

거추장스럽고 번거롭더라도 수식 없이는 구분이 어렵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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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이름을 부르면 꼭 두 세명이 동시에 손을 들고 멋쩍은 웃음을 흘리는 상황이 펼쳐졌다. 진저리가 났다. 의자를 '의자', 책상을 '책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혼란을 막기 위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 이름은 자갈밭을 굴러다니는 48957번째 돌멩이와 다름없었다.

 

그러니까 정말 있으나 마나 부르나 마나 한 것이다. 오직 개성이 뚜렷하고 인기가 많은 소수의 '민지'들만이 제 이름으로 불릴 수 있었다. 하필이면 나는 성격도 소심해 빠진 탓에 이름을 건 경쟁에서 늘 밀려나기 일쑤였다. 분명히 나를 부르기 위해 고심해서 지어진 이름일텐데도 불구하고 그 이름은 언제나 오직 나만을 지명하진 못했다.

 

억울하고 불공평하다고 생각했지만 어쨌든 세상은 그런 식으로 돌아간다. 제일 큰 파이를 차지해야 진정으로 그것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으며 모두에게 공평히 선대의 선택으로 붙여지는 이름이 나에겐 하필 부스러기 같은 것이었을 뿐이다.

 

꼭 나 자신이 가판대에 널린 싸구려 주얼리 같았다. 이름 붙여봐야 거기서 거기인 구식 모조품. 누군가 어쩌다 한 번쯤은 들여다볼 만큼 퍽 정교하게 본떴지만 그래봤자 '진짜'는 될 수 없는 존재. 이렇게 이도저도 아닌 것을 보고 우리는 '평범하다'고 말한다. 즉 평범하다는 건 특별하거나 유일하지 않다는 것이고, 지나치게 복제되어 색다름의 가치를 잃었다는 뜻이다.

 

흔한 이름은 그렇게 서서히 평범함을 나의 흉측한 허물로 만들었다.

 

 

[고민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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