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생명과 인구 사이의 긴장 - 시녀이야기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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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가 보여주지 못하는 것들
현재 한국의 합계 출생률은 0.72명이다. 출생률이 0.72명이라는 것은 의미 없는 수치일 수 있겠다. 매년, 분기마다 수치는 내려가기만 하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기자들은 정기적으로 ‘아이를 낳지 않는 이유’, 혹은 ‘아이를 낳게 할 방안’에 대한 기사들을 써낸다. 출생률은 인구구조, 부양 의존도, 노동력의 상대적인 비율을 결정한다. 따라서 인구정책을 제대로 구성하는 것은 분명 국민국가 운영에 있어 필수적인 일일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하나의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생명이 인구라는 개념으로 정책화될 때 여러 문제가 발생한다. 아이를 출산하고 양육하는 것은 개별 여성 혹은 출산자의 선택이어야 한다. 그러나 국가의 경제나 환경 미래 등을 고려했을 때 원하는 적정 인구 수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러니 생명과 인구는 언제나 긴장 상태이다. 생명과 인구는 이렇게나 긴장하는 개념이지만 이 세계는 염치없게도 생명의 귀중함에 대해 역설(力說)하며 인구문제를 이야기하는 역설(逆說)을 자주 보이곤 한다.
사실 긴장 상태라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여성의 재생산권을 이야기하는 동시에, 국민국가 수준에서 공동체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인구정책>(역사적으로 인구정책이란 늘 존재해 왔으나, 동시에 그 존재가 모호한 것이었다. 한국에 국한한다면 인구정책이라는 이름으로 시행된 것들의 정책 효과는 미비했다고 평가할 수도 있겠다.)이란 무엇이며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논의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길리어드는 이런 긴장이 허락되지 않는 사회의 모습이다. 모든 것이 진리로서 명백하며 생명의 존중을 이야기하며 살아 있는 그 누구의 생명도 존중받지 못하는 공간이다. 이러한 디스토피아적 미래가 현재 한국에 던져주는 질문이란 무엇일까.
길리어드라는 세계
길리어드라는 전체주의 국가는 지구적 전쟁과 환경 오염 속에서 급격히 낮아진 출생률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출산 능력이 있는 여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을 분류하고 출산 능력이 있는 여성이 출산할 수 있는 환경을 시녀라는 이름으로 강제한다. 출산 능력이 없다면 출산 능력이 있는 여성의 출산을 지원하거나 비여성으로 분류하여 사회에서 배제한다. 이러한 길리어드의 체제는 사회에 있는 인력 자원을 오직 재생산을 위해 총동원하는 형상으로 비친다.
그러나 길리어드를 면밀히 살펴보면 길리어드가 그다지 출생률을 효율적으로 높이지 못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성관계에 참여하는 남성은 너무나 늙었거나 늙은 동시에 생식 능력이 부족하다. 길리어드는 출산 능력을 기준으로 여성을 엄격하게 분류하고 통제·관리한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남성에 대해서는 그런 통제·관리를 전혀 진행하지 않는다. 여성의 경우 한 인간의 가치 전체가 그 신체의 건강함과 생식 능력으로 함몰되어 버렸지만, 남성의 경우 신분이 재생산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의 기준이 되었다. 시녀와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 자체가 하나의 신분화된 생활 양식이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실제로 생식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남성 대부분은 늙었으며 동시에 생식 능력이 없는 확률이 높다. 그럼에도 불임의 원인이 남성에게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일 뿐 적극적으로 관리되지 못한다. 화자에게 의사가 아무도 모르게 아이를 갖게 해주겠다는 은밀한 제안을 한 것이 우연이 아닌 까닭이다.
둘째, 시녀는 각 가정에 한 명씩 배정되며 ‘의례’를 통한 자연 임신만을 시도한다. 시녀는 순환 근무를 하기는 하나 기본적으로 2년간은 한 가정에만 머무르며 의례는 정해진 사람과만 시도한다. 아이가 태어날 때 우리는 그 아이의 어머니는 손쉽게 특정할 수 있다. 하지만 아버지가 누구인가는 오로지 아이를 낳은 어머니만이 알 수 있는 영역이다. 그렇기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버지를 특정할 수 있게 하려는 시도는 계속되어 왔으며 다수의 시도는 여성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길리어드의 시녀 체제 역시 이에 대한 연속선상의 시도임을 이해해 볼 수 있다. 한 가지 더 특이한 점은 임신 출산 과정에서 어떠한 과학기술의 개입도 거부하는 것이다. 길리어드는 과학기술이 상당히 발전한 미래로 추정됨에도 기본적인 태아 검사마저 거부되며 임신 중절마저 불가하다. 정말로 ‘건강한’ 아이를 많이 출산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비효율적이기 짝이 없는 선택들이다. 이는 성관계를 의례로 호명하며 섹스-임신-출산 과정 전반을 하나의 의례로 만들어버린 체제의 선택이 반영된 모습이라는 생각을 했다. 하나의 성스러운 의식으로 체제를 정당화해 주는 것이다. 한편 재생산 전반을 일종의 ‘외주화’를 맡기는 선택을 했음에도 정상적인 가족 규범-부부와 자녀로 구성되는-이 여전히 유지된다는 점도 주목할 지점이다.
셋째, 출생률이 낮아진 근본적인 원인 해결에 별 뜻이 없다. 임신도 어렵지만 임신하더라도 그중 4분의 1만이 태어날 수 있는 시대이다. 그렇게 된 이유에는 급격하게 변화한 지구 환경이 존재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길리어드는 전쟁 중이며 외부와 전쟁 중이라는 사실은 내부 통치에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길리어드인지 길리어드 내부의 시민들을 알지 못할 정도이지만 지도부는 전쟁을 멈출 생각이 보이지 않는다.
사실 바라는 것은 생명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런 주장도 충분히 가능해지는 것 아닐까. ‘길리어드는 사실 아이를 낳고 싶은 것이 아니다.’ 즉 그들이 원하는 것은 인간 재생산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보다는 그들이 지향하는 인간 재생산의 체제가 유지되기를 바란다. 통제의 역사 위에서 그들이 원하는 재생산의 특정한 양식이 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재생산이 한 사회를 유지/존속하는 기제임을, 언제나 철저하게 관리되어 왔지만, 그 어떤 것보다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져 왔음을 보여 준다. 그것은 때때로 자연의 이름으로, 모성의 이름으로 개별 수준에서 정당화되어 왔을 뿐 사회를 지탱하는 힘이라는 사실은 의도적으로 지워졌었다. 길리어드가 원하는 사회의 모습이 있다. 그리고 그 사회를 위한 재생산의 모습이 있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인구정책이 지향하는 것 역시 단지 아이의 출산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회가 원하는 모습이란 여성과 남성이 만나 결혼이라는 사회계약을 맺고, 건강한 아이를 낳아서 유능하게 기르는 것 아니겠는가. 그들이 말하는 인구나 출산 장려 정책이라는 개념의 진의란 이런 것이며, 우리는 이 모습이 실제 ‘자연스러운’ 인구 재생산과 얼마나 먼 모습인지 안다. 대표적인 예시라 할 수 있는 주거 정책과 미혼모 정책을 살펴보자. 주거 정책의 기본 목표는 적정 주거권의 보장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주거 정책은, 주거를 권리로 보장하는 것이 아닌 하나의 유인책과 같이 활용한다. 예를 들어 청약 당첨에 있어 결혼과 자녀 있음은 가산점이 된다. 신혼부부를 위한 각종 대출과 주거 정책들은 다른 주거 정책들보다 혜택이 좋다. 어떤 형태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 사회적 자원을 배분하겠다는 약속은 그 자체로 사회가 지향하는 가족의 형태를 강제하며 동시에 그런 형태를 벗어나 있는 다수의 사람을 간단히 무시해 버리는 선택이다.
그렇다면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으면 어떨까. 국가는 여성이 홀로 아이를 낳는 것(아버지를 특정할 수 없는 출산)에 실존적 두려움을 느끼는 것으로 보인다. 1951년부터 2012년까지 한국에서 미국으로 입양 간 아동의 수는 11만 1,148명이다. 그들 중 90퍼센트는 미혼모의 아이라고 한다. 미혼모가 낳은 아이가 입양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재생산권이 보장된다는 것은 낳을 권리와 키울 권리가 개별적으로 인정된다는 것을 뜻하고 당연히 낳았지만 기르지 않을 권리 역시 있기 때문에 아이를 출산한 여성이 자신의 여러 상황을 복합적으로 고려하여 아이 양육을 하지 않는 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너무나도 많은 수의 미혼모의 아이가 입양 보내진다는 것은 이성애적 가족 규범에서 벗어난 아이 출산이 사회적으로 전혀 환영받지 못한 역사를 보여준다.
2011년 이전까지 입양기관 부설 미혼모 시설은 입양 보낼 것을 약속하지 않으면 미혼모의 입소를 받지 않았다. 입양 보낼 것을 출산 이전부터 약속해야만 입소하여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해당 입양촉진법은 이후 전면 개정되긴 하였다. 개정 입양법은 아이 출생 후 일주일간 숙려기간을 주어 출생 즉시 입양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개정 입양법에 따르면 아이의 출생신고를 해야 입양을 볼 수 있는데 아이를 출산한 흔적이 남지 않길 원하는 미혼모들이 아이를 유기하게 된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비밀출산제’를 보장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까지 나왔다.
그런데 미혼모와 그가 출산한 자녀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출산을 비밀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 사회는 얼마나 실제 생명과 재생산 전반에 무지하단 말인가. 이런 현실들은 우리가 말해온 생명의 권리라는 것이 얼마나 얄팍한지 보여준다. 재구성의 역사 위에서 그들이 원하는 재생산이라는 것이 아이의 출산만이 아니라는 역사적이고 명료하며 공고하다. 우리는 지금보다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게 될까. 우리가 읽는 것은 결국 화자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희망을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시녀 이야기』는 화자가 기록한 이야기이다. 화자를 둘러싼 환경은 화자가 길리어드 체제에 대한 아주 작은 반격이나 비판마저 허락하지 않은 사회였다. 지금처럼 되지 않았다면 그 사회는 정말 끔찍했을 것이라고 리디아 아주머니는 계속 말한다. 체제 내에서 화자는 함부로 말할 수도 글을 읽을 수도 있는 동료와 의견을 교환할 수도 없었다.
누군가는 듣게 될 이야기
“하지만 아무리 내 머릿속으로만 하는 이야기라 해도, 이야기인 이상 누군가 듣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화자는 말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아니 멈출 수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멈추지 않으면서도 화자는 자신이 스스로 하는 말마저 충분히 신뢰하지 않음을 계속해서 보인다. 그래서 자기가 하는 이야기가 다 지어낸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자기 확신을 어디에서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자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이렇게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드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말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는 것. 충분히 ‘논리적이거나 이성적이지 못하여도’ 나에게 주어진 상황을 나의 판단으로 재단하기를 멈추지 않는 것은 페미니즘이 긴 역사에서 계속해 온 일이기도 할 것이다.
결국 화자의 기록은 책의 마지막 장에서 역사적 주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후대에 전해지게 됨을 확인할 수 있다. 화자의 생애 내에서 세계가 변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말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사람들이 쌓여 길리어드 체제는 무너졌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그 역사적 주해가 논의되는 시대도 성차별적인 세계가 아닌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언제나 통제와 탄압 위에서 우리의 이야기를 그들의 기준이 아닌 우리의 기준으로 재구성해 왔고, 그것은 세계를 때때로 바꾸었다. 그 유산 위에서 우리는 또다시 주어진 이야기들을 끊임없이 재구성하며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길리어드가 무너져도 그다지 완벽한 세계가 들어서지 않았다는 것이 오히려 현재 한국 사회의 문제를 비판하고 변화시키고자 할 때 희망을 준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바꾸어 나가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니까. 그러니 괜찮다.
[진세민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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