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오카 마코토는 귀여운 것을 좋아한다. 레이스가 달린 옷, 아기자기한 소품, 일명 ‘여자아이 취향’으로 분류돼 온 것들. 그는 자신의 취향을 숨기지도, 적극적으로 설명하지도 않는다. 그저 좋아할 뿐이다. 그러나 사회는 그 ‘그저’라는 상태를 끝내 견디지 못한다.
우리는 타인을 만날 때 너무 빠르게 질문을 시작한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어떤 취향을 가졌는지, 정상의 범주 안에 들어오는지. 이 질문들은 이해를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상대를 분류하기 위한 절차에 가깝다. 특히 좋아하는 방식이 규범에서 벗어날수록, 질문은 해명의 형태가 된다.

애니메이션 <선배는 남자아이>는 이 해명의 구조를 드러내는 작품이다. 이 애니메이션에서 중요한 것은 마코토가 자신의 젠더를 어떻게 정의하는가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정의하지 않기를 선택한다. 우리는 흔히 젠더 정체성을 ‘밝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작품에서 그 누구도 자신을 트랜스젠더나 논바이너리, 혹은 크로스드레서라고 규정하지 않는다. 이름 붙이기를 거부하는 태도, 그것이 이 작품이 취하는 정체성의 방식이다.
그러나 이 침묵은 자유로 보장되지 않는다. 마코토는 설명하고 싶지 않은 주체이지만, 사회는 그에게 끊임없이 설명을 요구한다. 학교와 가정,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이라는 이름의 권력은 마코토를 이해하려 하기보다 해명하도록 몰아넣는다. 이 지점에서 정체성은 선택이 아니라 부담이 된다. 말하지 않으면 의심받고, 말하면 규정되어 비판받는 상태이다.
‘남자다움’이라는 규범
<선배는 남자아이>에서 마코토의 여장은 단순한 취향의 표출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가 설정한 ‘남자다움’이라는 기준에 대한 조용한 불복종에 가깝다. 남성은 이래야 한다는 규범, 남자는 이런 옷을 입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규칙 앞에서 마코토의 선택은 늘 문제로 호출된다. 이 작품에서 여장은 개성의 문제가 아니라, 허용된 남성성의 범위를 벗어났다는 이유로 감시당하는 행위다.

흥미로운 점은 마코토에게 교복이 수행하는 역할이다. 여학생 교복은 한편으로는 시선을 피하기 위한 가면이자, 동시에 가장 솔직한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수단이다. 그는 교복을 입음으로써 더 큰 오해를 감수하지만, 그만큼 자기 자신에 가까워진다. 이 모순은 분명하다.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가면이, 역설적으로 가장 진실한 자아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교복은 정체성 갈등의 상징이 된다.
오늘날 유니섹스와 젠더리스 옷들이 무척 많아졌다. 남성과 여성의 구분을 흐리는 디자인은 더 이상 낯설지 않고, 젠더리스 콘셉트를 내세운 브랜드 역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 확장은 언제나 조건부다. 마른 몸, 중성적인 얼굴, 혹은 패션으로 소비될 수 있는 안전한 범위 안에서만 허용된다.
교복이 특별한 이유는, 그것이 여성과 남성을 명확히 나누기 위해 설계된 옷이기 때문이다. 교복은 취향의 영역이 아니라 제도의 언어에 속한다. 남학생과 여학생을 구분하고, 몸을 특정한 성별 위치에 배치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렇기에 마코토의 여학생 교복은 단순한 변장이 아니라, 사회가 설정한 젠더 배치에서 벗어나는 행위가 된다.
명명되지 않은 감정
작품은 사키와 류지를 통해 이 규범의 균열을 다른 방식으로 드러낸다. 이야기는 사랑과 우정의 영역으로 확장되지만, 이는 로맨스를 강화하기 위함이 아니라 규범의 한계를 시험하기 위한 장치에 가깝다.

여자를 동경했던 사키는 마코토가 남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에도 감정을 멈추지 않는다. 사키의 태도는 명확하다. “선배가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다”는 말은 단순한 순정의 표현이 아니라, 관계를 성별로 분류하는 사고방식 자체를 건너뛰겠다는 선언에 가깝다.
그녀는 상대의 성별을 확인한 뒤 감정을 재조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별이라는 정보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듯 행동한다. 이는 인간을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으로 먼저 읽어내는 사회적 관습에 균열을 낸다. 그녀의 행동은 사랑이 성별이라는 검문소를 통과해야만 유효해지는 감정인지 되묻게 만든다.

류지는 또 다른 관계와 규범에서 흔들린다. 그는 어릴 적부터 마코토를 향한 자신의 감정이 단순한 우정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름을 붙이기에는 조심스럽고, 어디에 위치시켜야 하는지 알지 못해 무작정 회피한다. 류지는 성별과 우정, 남성성의 경계에서 헤맨다. 여장한 마코토가 아니라, 마코토 그 자체에서 느끼는 설렘의 감정. 사람에게 허용된 감정의 범위는 협소하다. 우리는 종종 사랑을 우정이라 넘기고, 우정을 사랑이라 착각하며, 모든 감정을 젠더에 기대어 안정을 얻어왔다.
마코토와 사키, 그리고 류지의 관계는 한 문장으로 정의되기 어렵다. 손을 잡고, 얼굴을 붉히고, 질투하고, 사귀기도 한다. 겉으로 보자면 분명 ‘연애의 문법’을 따르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이들의 행동은 끝내 사랑이라는 말 하나로 환원되지 않는다. 감정은 늘 조금씩 어긋나 있고, 관계는 분명한 이름을 거부한다.
이 감각은 정보라의 단편집 <작은 종말>에 실린 <지향>을 떠올리게 한다. 함께 데모하던 동지를 잃은 무성애자의 회고 속에서, 화자는 그 감정을 끝내 사랑이나 우정으로 명명하지 않는다. 그저 아꼈다고, 함께였다고 말할 뿐이다. 그러나 그 애도의 밀도는 어떤 연애 서사보다 깊다. 이처럼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은 불완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솔직한 형태일 수 있다.
퀴어 이론이 말하는 것은 단지 성적 지향의 다양성이 아니다. 그것은 관계를 분류하고 위계화하려는 사회적 규범에 관한 질문이다. 이 감정을 무엇인지, 이 관계는 어떤 이름을 가져야 하는 것인지. 작품은 끝내 답을 내리지 않고 사회 쪽으로 돌려놓는다.
질문하지 않는 존중
작품 속 주변 인물들의 반응은 노골적인 폭력보다 훨씬 일상적인 방식으로 다가온다. 복도에서의 수군거림, 힐끔거리는 시선, ‘이상하다’는 속삭임. 이는 소수자가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미시적 공격에 가깝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폭력은 개인에게 끊임없는 자기검열을 요구한다.

“나랑 같이 다니면, 너도 이상하다는 얘기를 듣게 될 거야.”
이 질문은 마코토의 엄마를 통해 더욱 분명해진다. 엄마는 마코토가 여장하고 다닌다는 걸 알게 된 후, 무너진다. 그러면서 ‘사람들의 시선에 네가 상처받게 둘 수 없었다며’ 걱정의 얼굴을 한다. 보호의 언어로 포장된 문장은 결국 ‘사회의 기준에 네가 맞지 않다’는 말을 내포한다.
페미니즘은 오래전부터 이 ‘걱정’의 언어가 어떻게 차별을 재생산하는지를 지적해 왔다. 상처받지 않게 하겠다는 말은 종종, 다치지 않기 위해 너 자신을 바꾸라는 요구로 이어진다. 마코토가 설득해야 하는 것은 엄마 개인이 아니라, 엄마를 통해 말하는 사회 전체다.
반면 마코토의 아버지는 마코토의 취향을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그저 “좋아하는 건 사과할 일이 아니다”라고 말할 뿐이다. 마코토는 ‘나답게 살고 싶다’라고 말한다. 이 태도는 해석을 내려놓은 존중에 가깝다. 아버지는 규범을 설명하지 않음으로써, 마코토에게 설명하지 않을 권리를 남겨준다.
외할아버지의 존재는 이 이야기에 시간의 깊이를 더한다. 한때 여장을 즐겼다는 이유로 가족과 단절되었던 그는, ‘남자도 여자도 아닌 삶’이 새롭게 등장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마코토는 그와 함께 지내는 며칠 동안, 행복을 위해라도 자기 자신대로 살기를 선택한다.
“그냥 스스로 어울린다고 생각해. 그럼 어울리게 되는 거야.”

<선배는 남자아이>가 보여주는 세계는 따뜻하면서도 잔인하다. 마코토는 자신의 행복을 거리낌없이 누리지 못한다. 좋아하는 것을 누리고자 하는 단순한 사실조차, 타인의 시선을 고려하며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 진정한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해 그는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해명하고, 변명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은 노골적인 혐오가 아니라, 조건부 이해와 선의로 포장된 편견이다. ‘설명해 주면 이해할 수 있다’는 태도는 결국 이해받기 위한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한다.
그럼에도 작품은 완전한 고립을 선택하지 않는다. 마코토, 사키, 류지가 서로를 긍정하며 만들어가는 관계는 ‘이해’보다 ‘연대’에 가깝다. 서로를 완전히 설명하지 않아도 곁에 머무는 선택, 그것이 이들이 구축하는 관계의 핵심이다. 이 연대는 사회적 낙인을 즉각적으로 제거하지는 못하지만, 정체성을 지켜낼 최소한의 공간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기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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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하지 않아도 되는 감정이 있다. 설명하지 않아도 존중받아야 할 정체성이 있고, 사랑은 반드시 특정한 형태를 가져야만 하는 것이 아니며, 감정의 진정성은 규범에 대한 적합성으로 증명되지 않는다.
우리가 불편해하는 것은 이들이 아니라, 좋아하는 것을 설명할 수 없게 만드는 정체성의 자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