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타인과 자기, 꿈과 현실, 환상과 실재 사이의 기묘한 거래 - 그림자를 판 사나이

글 입력 2024.04.25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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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아 프레티 작, 〈플라톤과 디오게네스〉

 

 

 

1.


 

우리는 그림자에 많은 가치를 부여해오지 않았다.

 

기술발달로 밝혀진 거리에서 그림자는 양쪽에서 쬐는 빛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 힘들다. 현대인은 빛과 같이 계몽되고 명확한 사고를 추구하며, 그러지 않은 잔여물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하물며 서양철학의 근간이 되고 아직 우리 정신세계에 깊이 박혀있는 플라톤의 동굴의 알레고리에 따르면, 그림자는 이데아의 환영에 지나지 않는가.

 

나는 가끔, 언젠가 그림에서 보았던 플라톤에게 등불을 들이대는 디오게네스의 모습을 상상한다. 디오게네스는 대낮에 도시 아테나를 돌아다니며 사람을 찾는다고 이야기한 인물이다. 나는 -그의 삶을 고려했을 때- 그가 들었던 것이 계몽의 등불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인간 속에서 인간을 찾는 행동, 빛 안에서 빛을 비추는 기묘한 행동은 플라톤의 이분법적 세계에서 말이 안 되는 행위다. 이제는 플라톤보다 더 플라톤스러워진 '플라톤주의'에서는 질서정연한 이데아의 세계를 현실과 분명하게 구분한다. 디오게네스는 그에게 등불을 비추며, 그의 가난하지만 비굴하지는 않았던 그와 인간의 삶에서 인간을 찾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가까이 비춘 등불은 플라톤의 모습을 밝고 그 그림자를 짙게 만든다. 그의 그림자는, 환영이나 모사가 아닌 그의 일부다. 그림자는 그의 몸 일부는 되지 못했지만, 그의 존재로부터 발생한 것이다. 나의 몸이라고 인정된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나라고 할 수 있는, 이 세계와 관계를 맺고 있는 일종의 확장된 몸이다. 그래서 그것은 분리된 것도, 계몽의 빛으로 쉬이 가려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2.


 

오늘 리뷰할 <그림자를 판 사나이>에서 그림자를 바라보는 방법이 이와 비슷하다. 이 작품의 주요주제를 가장 빠르게 파악하는 방법은 '어떤 것이 어떠한 가치를 가지고 교환되었는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주인공 정신세계에 슐레밀은 악마 같은 정신세계에 사람과 몇 번의 거래를 한다. 처음에는 가장 빛나는 것과 가장 하찮은 것을 교환한다. 짐작하겠지만, 가장 하찮은 것이 그림자고 가장 빛나는 것이 당시에나 지금이나 가장 높은 가치를 갖는 돈이다. 그는 자신의 그림자를 무한히 금화가 나오는 요술 주머니와 교환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통해 사실 그 가장 하찮은 것이 인간의 가장 중요한 일부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림자가 없는 그를 모든 사람이 비웃고 그를 하대한다. 그를 지키는 것은 진실한 우정을 가진 자신의 집사뿐이다. 집사의 애정이 어린 헌신 덕에 그는 기만적인 은둔 생활을 즐길 수 있었으나, 자신의 그림자가 없다는 사실을 들킬까 봐 고군분투한다. 어느 날 그는 순수한 여성과 사랑에 빠지지만, 자신의 그림자가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다른 남자에게 뺏길 위기에 처한다.

 

이때 악마가 다시 나타나 그에게 그림자를 돌려주는 조건으로 영혼을 팔 것을 제안한다. 하지만 슐레밀은 그것을 거부하고 방랑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런 그를 악마가 나그네로 변장하여 동행하며 집사의 역할을 대신한다. 악마는 슐레밀에게 주머니가 있는 한 자신과 연결되어있다는 이야기를 하자, 슐레밀은 요술주머니를 강가에 던져버린다. 가난하고 고독한 삶을 살게 된 슐레밀은 전 세계를 떠돌며 자연과학자로서 살아가게 된다. 슐레밀은 꿈에서 그림자가 없는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 춤추는 것을 보고, 자신의 체험을 자신의 가까운 친구 샤미소에게 알려준다.

 

<그림자를 판 사나이>는 짧으면서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놀라운 소설이다. 나는 이 소설을 슐레밀의 자전적 소설이라는 관점과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에서 다르게 읽었다. 이 글에서는 후자를 중심으로 깊이 해보려 한다. 전자의 해석 같은 경우에는 책의 '해체'에서 훌륭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해체를 읽는 것이 이 책을 즐기는 다른 방식이므로, 나의 글로 그 즐거움을 해치게 두고 싶지 않다.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은 이 우화를 한 명의 정신세계라고 생각하며 읽는 것이다.

 

어떤 관점을 취하든 두 관점에는 관통하는 두 가지 포인트가 있다. 첫째, 페터 슐레밀은 샤미소의 또 다른 자기의 모습이라는 것. 둘째, 사람들의 판단은 일상적이나, 기묘하게도 그림자는 인간이 인간으로 취급받는 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취급하는 부분에서는 비일상적이라는 것.

 

첫 번째 포인트, 즉 지나지 않는가 슐레밀이 샤미소 자아 일부라는 것은 주로 꿈을 통해 알 수 있다. 처음 그림자를 교환했을 때, 슐레밀은 자신의 절친한 친구-이자 이 소설의 청자-가 죽은 상태로 서재에 앉아있는 것을 본다. 그의 책상에는 샤미소의 책들이 놓여있다. 이러한 모습은 자신의 중요한 일부인 그림자를 잃어버린 사건이 자신의 진정한 자아의 죽음으로 경험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하게 한다.

 

죽은 샤미소의 이미지는 슐레밀이 주머니를 버리고 자립할 수 있을 때 반전된다. 샤미소와 슐레밀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림자 없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꿈은 그림자의 계약 자체에서 벗어나진 그의 정신적 상황을 나타낸다. 이외에도 주요 인물들의 이름을 샤미소의 실제 지인에서 따오는 등 샤미소가 페터 슐레밀이라는 뉘앙스는 반복해서 등장한다.

 

그렇다면 페터 슐레밀이 샤미소라면, 페터 슐레밀과 샤미소의 관계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나는 이 부분에서 이 작품의 재치가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에서 샤미소는 꿈 속 등장인물(슐레밀과 동일시된)이면서, 작중 현실의 페터 슐레밀의 아주 가까운 친구다. 꿈과 같은 이야기가 현실이고, 꿈속에 진짜 자신을 배치하는 재치는 아주 흥미롭다. 이 소설 자체가 현실의 페터 슐레밀의 이야기라고 말하는 작가의 서문과 추천사를 참고할 때 더 두드러진다.

 

기본적으로 이 책은 다양한 경계를 흩트려놓는다. 소설과 소설 밖, 작중 주인공과 현실 작가, 꿈과 현실은 제멋대로 뒤섞인다. 인물에 대한 묘사와 느낌도 혼란스럽게 전개된다. 사랑하는 여자의 부모님은 한때 금욕적이었다가 탐욕적으로 변하고, 회색빛 옷을 입은 악마도 잔혹한 압제자에서 현자나 파트너로 느껴지기도 한다. 책 속 인물들의 판단도 기묘하다. 책 전반에서 몇몇 환상적인 요소가 등장하더라도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대화나 판단으로 소설이 전개되는 반면, 그림자에 대해서는 비일상적인 판단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3.


 

내가 이 소설을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 인간의 깊은 심리를 다루고 있는 소설로 읽은 것도 이러한 맥락에 있다. 이 소설은 샤미소의 또 다른 환상 속 자아 파편, 페터 슐레밀의 이야기이고, 우리의 정신세계처럼 나와 타인, 좋음과 나쁨, 선과 악, 기쁨과 고통이 경계 없이 혼합되어 있다.

 

이분법을 부정하는 이 소설에서 묘사되는 '그림자'는 그래서 빛으로 표상되는 것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인 맥락에서는 문명과 계몽,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되어 가는 것인 동시에, 샤미소가 그의 삶에서 느껴왔던 다국적 정체성의 흐릿함이다.

 

나는 여기에 하나를 더해 보고 싶다. 그림자란, 나의 몸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나의 몸에 따라붙는 나의 확장된 몸으로써, 자아에 흡수되지 않고 나를 둘러싸고 있는 나의 조각들이다. 내가 인정하지 않고, 인지하지 못한, 무의식에 잠겨있는 나의 또 다른 모습들의 파편 말이다. 마지막 나의 해석은 앞에 있는 것들과 충돌하지 않는다.

 

우리에겐 우리 말이 안 되는 인정하지도 않은, 인지하지도 못한 많은 모습이 있다. 살아가면서 언제나 그것들은 우리 주변을 떠돌지만, 다양한 이유로 그것이 우리 자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수많은 무의식에 서 떠도는 나의 조각들은 한 인간을 구성한다. 인간의 생기와 풍성함은 모든 것이 인지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할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인지된 것만으로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반쪽짜리 인간으로 살 수 있을 것이다. 상상해보라, 내가 아는 나만이 전부라면 금은보화가 있다 한들 그것의 기쁨과 슬픔을 온전히 즐길 수 있겠는가?

 

소설에서 비극적인 주인공은 악마에게 자신의 그림자를 판매한다. 이 소설에서 금은보화의 쾌락은 처음 부잣집을 방문한 장면 외에는 거의 묘사되지 않는다. 풍요로움 속에서 끔찍한 기근을 겪으며, 그는 외롭고 불완전한 인간으로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이 소설의 중요한 다른 포인트는, 소설의 끝에서 그림자가 없는 자신의 상태를 극복한다는 데 있다. 주인공이 회복할 수 있게 된 계기는, 그가 그림자 없는 인간이라는 수치심을 그의 충직한 하인과 악마가 가려주었다는 데 있다. 악마는 마지막 동행 때 여전히 증오스럽기는 하지만 많은 것을 아는 자이자 시종으로서 동행한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요술 주머니를 버렸을 때, 말이 안 되는 악마는 따라붙지 않는다. 그림자가 없지만 자유로운 그에게, 전 세계를 마음대로 오갈 수 있는 마술 부츠가 생긴다.

 

나는 슐레밀의 성장이 악마와의 동행에 있다고 본다. 악마는 슐레밀의 시기심을 통해 처음 탄생한 것처럼 보인다. 처음 부잣집에서 슐레밀은 악마가 지나치게 공손한 태도로 부자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본다. 그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온갖 금은보화에 관심을 가진 슐레밀에게 악마가 다가와 거래를 제안한다. 악마가 슐레밀의 일부라면, 악마는 무엇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아름다운 부인을 매혹하고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고 싶은 욕망과, 그러한 욕망에 눈멀어 누구의 주머니에서 나오는지도 모르는 부잣집 손님들의 얄팍한 삶에 섞이고 싶지 않다는 거부감-일종의 도덕관념-이 섞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부유하고, 굽실거린다.

 

슐레밀 내면에 있는 욕망은 자신의 힘, 실재감을 불리고 싶었다. 그래서 그에게 그림자를 요구한 것이다. 아직 결정되지 않고 떠다니는 나 자신의 조각들을, 저 부자와 같이 뻔뻔하고 명확하게 완전히 억압하여 자신의 힘을 불리고자 한 것이다. 실제로 악마는 그것을 취함으로써 말이 안 되는 비굴하게 굴지 않는다. 악마는 이후 완전히 부유한 압제자로서 슐레밀의 영혼 전부를 요구하고 협박하기까지 한다.

 

슐레밀의 거부 이후, 모든 사람을 떠나보낸다. 완전히 빈궁해진 이 남자 앞에 악마는 현자의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 모든 수수께끼의 해결인 궁극적인 언어를 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자는 유창하게 완결과 완성을 갖춘 예술에 관해 이야기하고, 슐레밀은 그것에 몰두하여 고통을 잊는다. 슐레밀이 살찌고 비대해진, 가학적인 악마를 거부하자 철학자로서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는 악마를 완전히 받아들이지 않지만, 그와 동행하고 도움을 받음으로써 그 일부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악마는 그에게 그림자를 제공한다.

 

소설의 이런 묘사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악마란 결국 슐레밀의 일부이면서, 때로는 공격하고 때로는 조언자로서 함께 한다. 그는 그림자를 가져갔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악마라는 존재 자체가 아직 흡수되지 못한 그 자신이라는 점에서 그림자와 같다. 악마에게 몸을 넘긴다는 것은, 악마로 표상되는 나의 일부분에 완전히 복종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런 묘한 동행은 악마가 자신이 붙잡은 부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슐레밀이 요술 주머니를 완전히 버려버림으로써 끝난다. 여전히 그림자는 돌아오지 않지만, 대신 그는 아름다운 소년이 파는 요술부츠를 받아 전 세계를 떠돈다. 생기있는 아름다운 소년은 빈궁한 정신세계를 가진 그에게 젊음과 생기있는 자신의 부분으로써 그의 진정한 독립을 돕는 것이다. 그 결과, 그는 그림자 없이도 행복한 사람들을 꿈으로 꾸고 아래와 같이 이야기한다.

 

 

친구여, 자네가 사람들 사이에서 살고 싶다면, 무엇보다도 그림자를 중시하는 법을 배우게나. 돈은 그다음일세. 오로지 자네와 자네의 더 나은 자아를 위해서만 살고 싶다면, 오, 자네에게는 아무 충고도 필요없네.

 

 

 

4.


 

앞서 말했듯, 이 소설은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우화 같은 이 소설은 샤미소의 방랑 생활, 자본주의 사회의 태동, 꿈과 현실의 경계, 자아의 발견, 수치심과 열등감과 같은 다양한 키워드를 떠올리게 한다. 그림자가 그토록 많은 맥락에서 읽힐 수 있는 것처럼, 이 소설이 하고 싶은 이야기도 그럴 것이다. 이 소설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들이 모두 크고 작은 진리를 포함하고 있으며, 아직 읽히지 않은 부분까지 포함하여 때로는 그 몸이 되기도, 그림자가 되기도 할 것이다.

 

현대의 독자인 나에게도 그의 목소리는 충분히 와 닿았다. 아니 어쩌면, 오히려 더 잘 느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가 싶다. 당대 내가 샤미소의 친구였다면 '불쌍한 슐레밀'이라고 이야기했겠지만, 현대의 나는 그에게 -그래, 최소한 안타까운 어조로-'고결한 슐레밀'이라고 이야기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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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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