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너를 위한 글자"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동화같은 마나롤라
글 입력 2024.01.31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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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너를 위한 글자>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너를 위한 글자>는 이탈리아 발명가 ‘펠리그리노 투리’가 시각장애인인 캐롤리나 백작 부인을 위해 타자기를 만든 실화를 바탕으로 한 뮤지컬이다.


절벽이 아름다운 바닷가 마을 ‘마나롤라’를 배경으로 하는 이 극은 그 마을만큼이나 작고 아기자기하다. 심장을 조이는 엄청난 사건이나 계략도 없고 매혹적이거나 반감을 사는 짜릿한 악당도 없다. 혼자인 게 좋은 발명가 ‘투리’와 나답지 않단 비판을 받은 베스트셀러를 쓴 뒤 이런 양방향 평가에 고민하는 작가 ‘도미니코’, 로마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작가지망생 ‘캐롤리나’. 조금 별난 듯 평범한 셋은 늘 혼자라 믿던 세상을, 혼자 이겨내야 한다고 믿었던 삶을 조금씩 함께하고 의지하는 법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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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인사도 받아주지 않고 혼자 발명품을 만드는 투리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옆집 캐롤리나의 소음에 고통받는다. 캐롤리나는 아주 약간의 소음도 견디지 못하는 투리에게 항의하는 대신 대체로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한다. 우연히 카페에서 두꺼운 책을 들고 혼자만의 세계에 갇힌 투리를 보았을 때 캐롤리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투리를 이상하게 여기는 대신 ‘그게 투리다운 것’이라며 받아들인다.

 

캐롤리나의 벽간 소음으로 발명 중이던 조명이 빛을 발하게 된다. 이웃 없이 지내던 과거의 투리라면 진전을 겪기 어려웠을 것이다. 투리는 어둠을 두려워하는 캐롤리나에게 조명을 선물하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왜 발명을 처음 시작하게 되었는지 깨닫는다. 어머니가 그의 발명품을 보며 기뻐하고 고맙다고 말할 때마다 특별한 존재가 된 것 같아서. 결국 혼자가 편하다고 여긴 투리는 타인을 위해 발명을 해왔고 그 관계 속에서 행복을 느꼈다. 차츰 마음을 연 투리는 캐롤리나를 위해 더 선뜻 손을 내밀고 세상 밖으로 걸어나온다.


로마에 살지만 새 작품을 쓸 때마다 고향으로 돌아오는 도미니크는 남모를 고민이 있다. 투리와 말싸움 중 그가 말했듯이 ‘삼류 로맨스 소설이나 쓰는 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는 점이다. 과거 그는 문장이 아름다운 시를 썼다. 하지만 출판사 측에선 그의 시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고 출판사의 의견에 맞춰 로맨스 소설을 쓰자 많은 사랑을 받는 대신 그의 기존 글을 알던 사람들은 ‘변했다’, ‘도미니크답지 않다’며 실망한다. 캐롤리나는 도미니크의 소설 한 문장을 읊으면서 그의 글을 언제나 좋아했고 또 응원할 거라고 힘을 실어준다. 캐롤리나의 응원으로 도미니크는 새 작품을 쓸 수 있게 된다.


또, 추후 관계가 긍정적으로 발전한 투리에게 나는 ‘삼류 로맨스나 쓰는 놈’이 아니냐고 말하면 투리는 ‘그런 말을 하는 놈과는 교류하지 말라’며 화를 낸다. 도미니크는 사과 한 마디 없어도 미안해하는 그의 마음을 받아들인다. 내가 정말 누구인지, 내 글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고민하던 작가는 나의 모든 글을 사랑하는 캐롤리나 덕에 마음을 담은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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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긍정적이고 밝은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캐롤리나는 로마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은 반갑지만 점점 눈이 어두워지면서 가끔은 두렵기도 하다. 초인종과 문을 고쳐준 투리는 어둠이 두려운 캐롤리나를 위해 빛을 주고 또 집 안에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손을 내민다.


완전히 실명되면 더는 글을 쓸 수 없을까 봐 두려워진 캐롤리나가 ‘생애 한 작품만 더 쓸 수 있다면 무슨 글을 쓰고 싶냐?’고 묻자 도미니크는 ‘가장 나다운 글’이라고 답하며 꿈 이야기를 써보길 권한다. 꿈에선 말도 안 되고 개연성도 없는 일이 벌어지지만 그만큼 가장 숨김없는 나를 볼 수 있을 거라고. 이렇듯 투리가 외부의 문제를 같이 해결해 나간다면 도미니크는 내부의 문제를 도와준다.


캐롤리나가 완전히 실명되기 전 서로를 연적처럼 느끼던 투리와 도미니크는 ‘부탁하는 게 무척 자존심 상하지만 도움을 청할 사람이 너밖에 없어서’ 서로를 도우며 눈이 보이지 않아도 글을 쓸 수 있는 기계를 만들어 나간다. 투리가 캐롤리나의 권유로 런던에 떠나게 된 날, 또 도미니크가 캐롤리나의 응원으로 차기작을 완성한 날 타자기를 선물로 건넨다. 자판에는 알파벳이 튀어나와 있어 손끝으로 느낄 수 있고 누르면 같은 글자가 종이에 찍혀 꿈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기계. 오직 너를 위한 글자. 항상 서로를 위하는 다정한 마음은 끝까지 다정한 결과를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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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은 이렇듯 상냥하고 다정한 세계에 독자를 초대한다. 공연을 부드러운 동화 분위기로 만드는데 배우의 연기 외의 요소들도 한몫한다.


문학 모임의 두 번째 글감으로 ‘첫사랑’이 나왔을 때 캐롤리나의 글 속 주인공은 투리다. 초원에서 혼자 글을 읽고 있는 너를 보면서 나도 글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할 때 캐롤리나와 투리를 비추는 빛은 따스한 주황빛이다. 한편 캐롤리나와 함께 문학 모임을 하는 도미니크는 푸른 조명을 받으며 소외되는 느낌을 준다. 반면 도미니크가 첫사랑인 캐롤리나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글을 읽을 땐 그의 조명은 주황빛이 돌지만 다른 이들의 조명은 그렇지 않다. 누가 누굴 좋아하는지 철저하게 알려주는 동시에 ‘서브남주’(여주인공을 좋아하지만 이루어지지는 못하는 조연 캐릭터)를 볼 때 느끼는 안타까움에 시선이 가고 한다.


내내 밝던 캐롤리나 공간의 조명은 그가 시력을 잃으면서 흐릿해진다. 방 안의 흐릿한 빛과 손을 바라보는 캐롤리나의 안무는 무언가 일이 잘못된 듯 불길한 예감이 들게 한다. 겁에 질린 캐롤리나가 문을 열면 들리는 강렬한 파도 소리와 바람 소리. 무엇이든 잡아먹을 것처럼 거세서 보는 사람들도 공포를 느끼게 한다.


문이 닫히고 영원히 방 안에 숨을 것만 같던 캐롤리나가 다시 무대에 등장할 땐 촛불을 들고 있다. 어두운 무대에 홀로 빛을 밝히는 촛불은 강하게 내리쬐는 다른 조명에 비해 강렬하지도 않은데 극이 끝나고 나서도 오래 기억에 남는다. 눈이 보이지 않는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하지 못했던 꿈, 글이 그의 가슴 속에서 오래 빛을 발하는 것 같기도 하고 끝까지 캐롤리나를 도운 투리와 도미니크의 마음 같기도 하다. 이 작은 빛은 어떤 세상에서도 결코 혼자일 수는 없다고, 혼자 버텨야 한다고 되뇌는 캐롤리나와 투리를 부정하는 한편 관객에게 따뜻한 응원을 준다.


이 극의 또 하나의 매력은 자꾸만 실실 웃게 만드는 로맨스 라인에 있을 것이다. 캐롤리나의 시선을 끌기 위해 소나기가 내리는 과정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투리와 소나기라는 글감으로 쓴 이야기를 읊는 도미니크의 대결에서부터 캐롤리나의 집에 먼저 도착해 소풍 가자는 제안을 하기 위해 달리는 둘의 모습은 유치하면서 귀엽고 극 분위기를 밝게 만드는 데 일조한다. 커피를 싫어하고 이미 커피를 마셨으면서도 캐롤리나를 위해 카페에 가는 모습은 후반부 서로의 자존심을 구기면서도 협력해 타자기를 만드는 모습과 연결된다. 천천히 친해진 둘은 캐롤리나 없이도 가벼운 인사는 주고받을 정도로 가까워진다. 그렇게 캐롤리나는, 투리는, 도미니크는 혼자에서 벗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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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참 녹록지 않다. 내가 원하는 일을 제대로 이루지 못할 수도 있고 때론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나를 잃어버리고 방황할 수도 있고 속 시끄러운 소리에 귀를 막고 혼자가 편하다고 믿어버릴지도 모른다. 이 극 속 등장인물이 그러듯이.


그러나 어디에나 빛이 있고 나를 돕는 사람이 있다. 내가 무얼 해도 나답다고 응원해주고 내가 어떤 곤경에 처해있어도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이. 혼자 고민하지 말고 같이 힘내자고 응원하는 사람이. 동화처럼 따뜻한 <너를 위한 글자>는 세상에 지친 관객들에게도 다정한 손길을 내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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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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