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선문에서 시작된 생각
파리의 상징 하면 떠오르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그중 나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개선문이었다. 국가를 위해 죽어간 전사자들을 기리는 조형물인 만큼, 그들이 바친 목숨이 아깝지 않도록, 전사자에 걸맞은 예우를 다하는 화려함이었다.

친구와 개선문을 구경하고 나오는 길에, 그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했다. 불의에 저항하다 스러진 군인 개개인에 대한 애도라면, 그 정성이 아무리 과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개선문과 같은 상징물이 과연 그 영역에만 머무르고 있는가? 벽에 새겨진 개개인의 이름이 개별 인간의 삶과 죽음을 대표할 수 있는가? ‘아니’라는 답이 나온다. 영광된 죽음, 아름다운 희생, ‘영웅’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는 문화예술은 전쟁의 참담함, 잔혹성, 부조리성을 가린다.
그러나 동시에, 전쟁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것 역시 문화의 역할이다. 어떠한 작품은 서로를 적대시하는 시스템 안에서 개인의 정의란 사실상 무의미해질 수 있다는 것을, 그 안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여신님이 보고 계셔>가 조명하는 ‘전쟁 이념’의 허구성
2013년 대학로에서 초연한 <여신님이 보고 계셔>는 오랜 시간 관객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6.25 전쟁 당시, 남한군과 북한군이 서로 처음에는 적대하다, 무인도에 떨어지며 인간적으로 가까워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첫 번째 넘버 ‘누구를 위해’에서 나타났듯, 서로를 적대하지만, 그 적대감이 근본적으로 어디에서부터 기인하였는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명확히 알지 못한다.
이야기의 결말에서도 이 ‘편 가르기’란 아주 허구적인 것임이 드러난다. 국군 주인공 영범은 ‘누가 우리 편이냐’라는 후임의 질문에, ‘모르겠다, 이기는 편이 우리 편인가?’라고 대답하며, 본인의 소속인 남한과 함께 지내던 북한 군인 중 누가 ‘우리’ 집단에 더 가까운지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 우리 집단, 우리 편, 상대편, 이러한 구분은 근본적이고 영원한 것이 아니며, 가변적이고 얄팍한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전쟁의 명분을 흔든다. ‘우리’와 ‘너희’가 ‘어떠한 것’을 위해 서로 싸우는 것이 전쟁의 본질일진대, 우리와 너희를 가르는 선도 명확하지 않을뿐더러 ‘어떠한 것’의 정체조차 모호하다면, 전쟁은 누군가의 청춘을 바칠 가치가 있는 일인가?
<무빙>에서 ‘국가 영웅’을 그리는 방법
디즈니플러스 드라마 <무빙>에서는 이러한 서사가 조금 더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이 드라마는 전쟁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남북의 권력 줄다리기를 위해 이용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 세계에서는 초능력자들이 존재하고, 이 초능력자들은 대부분 대북 요원으로 길러진다. 그들에게는 선택권이라고 보기 힘든 선택권이 주어지고, 무엇이라 말하기 힘든 국가 권력을 수호하기 위해 인생을 바치길 강요당한다.

그렇게 인생을 바친 초능력자 영웅들에게는 ‘예우’가 주어진다. 작중 초능력자로 선발되어 군에 인생을 바쳐야 하게 생긴 사람에게 높으신 분은 ‘너에게는 영광과 예우가 주어질 것이다’고 말한다.
그러나 초능력자들은 모두 그 예우와 권력을 바라지 않는다. 예우라는 것은 허울뿐인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도구로서 사용되는 대가로 받는 예우는 필요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의 인생은 도구로서 사용되었을지라도, 그들의 자식 대까지 그 폭력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 한다. 그것은 작중 대치 관계에 놓인 남북의 초능력자 모두의 염원이다.
전쟁과 영웅을 그리는 방식에 대하여
이 두 작품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전쟁을 정당화하는 이념은 거창한 가치가 아닌, 권력과 이익에 기반한 얄팍한 욕망이라는 점이다. 둘째, 전장에서 죽어간 이들에게 주어지는 ‘영광’과 ‘예우’ 역시 그들의 삶을 온전히 보상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이다. 희생을 기리고 기억하려는 노력 자체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나, 그러나 그것이 개인의 전쟁에서의 죽음을 미화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잊을 수 없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전쟁은 현재진행형이다. 인류는 이미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수많은 전쟁의 역사를 겪었고, 그 비극을 성찰하는 수많은 문화예술 작품 역시 만들어져 왔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전쟁과 갈등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얼마나 쉽게 만들어지는지, 또 얼마나 허약한 기반 위에 서 있는지를 배워왔다. 지금의 전쟁이 이념조차 잃어버린 단순한 '돈놀음'에 불과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여전히 반복된다. 그리고 그때마다 전쟁을 다시 정당화하려는 서사 역시 등장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대에 문화예술은 무엇을 해야 할까. 최소한 전쟁을 낭만화하거나 영웅의 서사로 포장하는 대신, 전쟁의 모순과 폭력을 드러내는 역할을 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문화예술을 향유하는 우리는 작품을 소비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안에 담긴 서사가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가리고 있는지 끊임없이 경계하며 바라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