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연극이라는 시공간, 작가-주체와 대상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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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고 창작하는 존재인 작가와 그 작가의 묘사 대상이자 일종의 ‘뮤즈’가 등장하는 세 편의 연극 작품들이 있다. 이 작품들은 비슷하면서도 각기 다른데, 창작의 과정을 통해 두 존재가 만나고 가까워지는 과정이 무대 위에서 이루어진다. 또한 연극이 자기 자신 혹은 하나의 드라마를 재현하고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의심하게 되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메타-연극의 성격을 가진다고 볼 수도 있다. 이 글에서 다룰 세 연극 작품은 엠비제트컴퍼니가 제작한 창작 연극 <빵야>, 쇼노트의 라이선스 작품 <테베랜드>, 연극열전의 라이선스 작품 <마우스피스>이다.
연극 <빵야>
연극 <빵야>는 성공과는 거리가 멀어진 드라마 작가 나나가 일제 시대에 만들어진 99식 소총 ‘빵야’를 만나게 되면서 시작된다. 빵야는 일종의 의인화된 총 캐릭터로, 극 중에서 등장하는 것처럼 일본군이 만든 총으로 서로를 겨눈 남과 북의 청년들의 모습에서 알 수 있듯 한국이 겪어야 할 근대의 모순을 반영한 캐릭터이며 기나긴 근현대사의 아픔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또한 빵야의 첫번째 주인이자 조선인이지만 일제의 군인이었던 친일파 기무라가 광복 이후 한국의 군인으로 편입되고, 후반부에 (대부분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다른 빵야의 주인들과 다르게) 군인 생활을 하다가 건설회사 회장으로 호의호식하고 있는 것이 드러나며 청산되지 못한 역사적 과오의 문제까지 건드린다.
이 작품은 ‘나나’가 빵야, 즉 빵야를 거쳐온 주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이를 글로 쓰기까지의 과정과 그 대본을 영상 매체로 만들기위해 ‘계약’을 따내야 하는 것 두 가지의 이중구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빵야를 소재로 한 대본은 계약을 거치며 상업자본의 영역에서 통용되는 대중성의 논리, 사실상 자본의 논리로 인한 수많은 수정과 타협을 거치게 된다. 예를 들어 빵야의 두번째 주인인 팔로군 전사였던 선녀 캐릭터를 독립군으로 바꾸라는 요청이나, 복잡함과 입체성의 서사적 재현에 대한 깊은 고찰 대신 단순하고 이분법적인 구도, 그리고 길남의 이야기 속에서 애착 대상인 강아지 살구를 여자로 바꾸라고 요청할 정도로 (이성애) 로맨스를 무리하게 넣으라는 압력을 겪게 되는 것이다. 결국 대본이 수정되고 흥행을 위한 스타 캐스팅과 제작비라는 형식적 제약 속에서 나나가 쓴 대본의 진정성, 그리고 그 진정성이 함의하는 급진성은 점점 침식된다. 대본의 판권을 스타 작가에게 팔라는 제안을 거절한 이후 프로젝트는 실현되지 못하고, 빵야를 소재로 한 대본이 실제 작품으로 나오지 못한 상황에서 ‘나나’는 악기가 되고 싶다던 빵야의 소원의 첫 단계를 이뤄주기 위해 빵야를 ‘발사’함으로써 그를 해체한다. 그리고 이 장면은 마치 인간이 숨을 멈추는 것처럼 연출된다.
연극 <빵야>는 현재 한국 상업 연극이라는 장르 내에서 제법 ‘잘 만들어진’ 창작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먼저 미시사의 측면에서 다사다난한 한국 역사의 굴곡 속 민중들이 겪었던 삶을 충실히 묘사하며, 일제 강점기 제국주의의 폐해나 광복 이후 이념 갈등으로 인한 전쟁과 학살 같은 역사의 비극적인 사건들을 다룸으로써 그동안 조명되지 못했던 영역에 빛을 비춘다. 또한 권총인 빵야의 주인이 바뀌는 일종의 에피소드 형식으로 극적 호흡을 잘 조절한다. 무엇보다 총을 의인화한다는 발상은 왜 내가 먼저 그 생각을 해내지 못했는지 부러우면서 질투날 정도의 신선함을 준다. 빵야의 주인으로 등장했던 여러 인물들, 길남- 살구, 원교 - 아미, 선녀, 설화, 무근이 가지고 있던 이야기가 총 한 자루에 담겨 있으면서 여러 편의 드라마는 한 편의 이야기로 짜여진다. 그리고 또 다른 주인이었지만 결코 선인이라고 말할 수 없는 친일파 기무라(박만대)나 공산당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차 학살에 가담했던 서북청년단 신출의 행동을 정당화하지 않지만, 그들의 삶과 심리를 자세하게 묘사함으로써 시대상 속에서 입체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캐릭터를 만듦과 동시에 그들이 행했던 선택의 폭력성과 부조리를 조명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 연극에서 흥미로운 점은 이 작품에서는 쓰는 나나(‘나’)의 ‘진정한’ 재현을 지속적으로 방해하는 것 같은 일종의 ‘드라마 판’(매체)의 이원화된 구도가 부각되는데, 빵야가 무기로써의 수명을 다 한 이후 전쟁 영화와 드라마의 소품이 되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매체 대 나나의 ‘글’이라는 이항대립과 연극이라는 형식 속에서 나나의 대본과 이 연극은 쉽게 등치된다. 즉 거대한 상업자본 세계의 위력과 폐해라는 작품의 반동적 힘은 빵야와의 소통 과정에서 만들어진 대본의 진정성과 무결함을 보증하는 이원화된 구도의 반대 항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마치 ‘무기’와 ‘악기’라는 이분화된 소재가 상징하는 이미지처럼, 빵야와의 애착 형성을 통해 빵야의 이야기를 ‘사용’할 권한을 얻는 작가-주체로서의 나나의 모습이나, 빵야의 이야기가 담긴 대본과 그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는 이 연극 그 자체의 무결함은 이 작품 내에서는 절대 의심되지 않는 하나의 전제다. 하지만 (‘매체 판’보다는 좀 더 사정이 나을 수도 있겠지만) 이 연극을 포함하여 연극의 세계 역시 똑같이 상업 자본의 영역과 그로 인한 여러 가지 문제들에게서 자유로울 수 없지 않은가?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말을 하는 존재이자 사실상 서사의 중심축을 이끌어가는 나나는 흔히 비극적인 역사를 재현해야 하는 창작가의 입장에서 흔히 하는 고민이자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적인 질문을 극중에서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전달한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나나는 관객과 가장 거리가 가까운 캐릭터이자 그들이 가장 동일시하기 쉬운 캐릭터이다. 하지만 이러한 관객의 몰입이 유도된 나나의 내적갈등이자 서사의 갈등인 타자, 혹은 역사를 재현함으로써 동시에 예술적으로 대상화하는 자신의 위치에 대한 성찰과 ‘써야 하는’ 현실의 (극적) 괴리는 ‘빵야’를 해체하여 악기로 만들어주는 것으로 손쉽게 해소된다. ‘내게 재현할 자격이 있는가? 그래도 정당한가?’라는 질문을 직면했을 때 이에 깊이 천착하기보다는 빵야의 소원을 해결해주는 것으로 처리되지 않은 문제를 쉽게 해소하며 작품은 나나의 글쓰기(재현), 그리고 이 모든 광경이 펼쳐지는 연극의 순간을 절대화하는 문학주의적 환상으로 귀결된다. ‘쓰는 행위’의 불가능성을 의심하지 않는 이 작품은 ‘빵야’가 상징하는 (대문자 아닌) 역사와의 대화와 이에 대한 작가의 재현을 물신화할 위험의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연극 <테베랜드>
연극 <테베랜드>는 우루과이(스페인어권) 출신의 극작가인 세르히오 블랑코(Sergio Blanco)의 연극을 제작사 쇼노트(shownote)가 수입해 한국에서 라이선스 초연을 올린 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극작가 S와 친부를 죽여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마르틴과 마르틴을 연기할 페데리코라는 배우가 등장한다. S는 마르틴을 통해 연극을 만들 생각으로 교도소 농구 코트를 방문하고, 마르틴을 직접 연극에 세우는 것이 좌절되자 페데리코라는 배우를 뽑는다. 마르틴과 페데리코는 같은 배우가 맡는데, 작품 내내 이 1인 2역은 ‘원본’과 ‘모방본’의 관계를 의심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가 된다. 마르틴이 소지하고 있던 묵주의 향, 마르틴과 페데리코가 신고 있는 유사한 신발(마르틴은 ‘가짜’ 나이키), 마르틴이 봤다는 불의 고리라는 환각 등의 요소를 통해 이 작품은 현실과 비-현실, 연극과 허구의 경계를 심문한다. 공연 시간이 시작되기 전부터 농구 코트를 본딴 무대 위에서 마르틴/페데리코 역을 맡은 배우는 농구를 하고, 극작가 S는 객석을 가로질러 등장할 정도로 이 작품은 노골적으로 메타 연극임을 보여준다.
뇌전증을 앓는 마르틴은 어린시절부터 아버지에게 가정폭력을 당해 왔고, 똑같이 폭력의 피해자였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일찌감치 학교에서 튕겨져 나와 성 산업에 종사하면서 살게 된 존재다. 결국 자신에게 폭언을 하던 아버지를 죽인 마르틴은 감시와 ‘치료’의 대상으로 전락해 의료 권력과 교육 권력에게서 동시에 배제된 존재다. 응시의 대상이 된 마르틴의 모습과 마르틴을 학교에서 적응하지 못하게 해 결국 ‘남창’으로, 그리고 ‘수감자’로 전락시켰던 그의 정신적 이상 증세를 서술한 대사들은 미셸 푸코의 폭력적 근대성에 대한 논의(『감시와 처벌』, 『광기의 역사』)를 연상시킨다. ‘총체적 기관’으로 꼽히는 대표적인 장소가 학교와 감옥이라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마르틴이 그 공간에서 겪어야 했던 심리적이고 신체화된 위축을 서술하는 대사들은 꽤나 의미심장하다.
페데리코가 마르틴 자신을 연기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한 S에게 마르틴은 “왜 한번도 나를 보지 않고 어떻게 나를 연기하냐”고 묻는다. 그리고 S는 다음 장면에서 페데리코에게 현실을 예술로 만드는 것은 재연과 모방이 아니라 ‘재현’이라고 말한다. 롤랑 바르트가 개념화한 ‘저자의 죽음’이 보편적인 이야기가 된 지금, S는 현대 예술 기준으로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마르틴의 말은 다른 방식으로도 해석되거나 새로운 의문을 던져준다. 마르틴을 소재로 한 작품에서 재현 대상인 진짜 마르틴을 누락시킨다면 이는 재현 대상이 곧 재현의 주체의 예술적 자원으로 전락하게 된다는 의미 아닐까? 물론 이러한 재현의 형식 자체가 그러한 혐의를 늘상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는 것은 좀 다른 문제다. 마르틴의 재현 방식에 대한 주도권에 있어서, 마르틴은 결코 사회와 유리될 수 없는 철학과 미학의 언어로 구성된 예술적 언어가 부재했기 때문에 S와의 관계에서 교섭력을 상실했다고 볼 수 있다. 언어가 없는 마르틴이 S와의 재현과 관계된 주도권 싸움에서 활용할 수 있는 장치는 원본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일종의 낡은 개념인 ‘모방’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논의의 연장선 속에서, 명백히 사회경제적 격차가 존재하며 그것이 예술적 위계로 이어지는 s와 마르틴의 관계, 마르틴과 페데리코의 관계에 있어서 이 연극이 목표로 했던 ‘타자와의 만남’이라는 주제는 꽤나 의심스러워진다. 다소 거칠게 설명하자면, S와 마르틴의 만남은 평등한 두 주체의 만남이 아니다.
2인극치고는 짧지 않은 러닝타임 내에 여러 주제가 서로 얽힌 채 마구잡이로 뒤섞여 있어서 마치 이 작품을 해석하는 것은 미친듯이 꼬여 있는 실뭉치를 풀어야 하는 것과 같다. ‘모르겠어요’와 ‘모든 게 다 뒤섞여버려요’라는 마르틴/페데리코의 대사는 이러한 복잡한 텍스트를 마주한 사람들의 심정을 정확히 반영하는 것 같이 느껴진다. 쉽게 답을 내려주지 않는 애매모호함은 s와 마르틴, 페데리코라는 삼자 관계의 역학을 통해 작품에 더욱 극적 긴장감을 부여하지만, 동시에 그 관계 속 여러 겹의 위계에 대한 의문마저 그러한 깊은 텍스트의 모호함 속에 굴러 떨어진다. 기호와 상징들의 향연과 아이러니가 생산하는 기표들의 유희 역시 마찬가지다. 이러한 애매함이 기존의 지배적인 규범이나 미학적 형식에 대해 혼종적인 차이를 생산해내며 성찰적 태도와 전복성으로 이어질지, 아니면 영국의 사회학자 스콧 래쉬(Scott Lash)가 (‘유기적 포스트모더니즘’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단지 신마르크스주의자들이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흔히 비판하는 논리처럼 “공허한 포스트모더니즘”(spectral postmodernism)으로 이름 붙인 것으로 귀결될지는 확언할 수 없다.
또한 오이디푸스가 서구 문화에서 상징하는 바 역시 이중적인데, 친부 라이오스를 죽이고 친모 이오카스테와 결혼한 오이디푸스 신화는 주류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에 의해 거세 공포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원형이 되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욕망의 좌절을 통해 상징계에 진입하고 이는 ‘성장’이다!) 상징계에 ‘아버지의 이름’을 붙인 라캉 역시 정신분석학에서 프로이트의 연속선상에 있다. 하지만 들뢰즈-가타리는 이러한 ‘오이디푸스 욕망’이 내포한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정상성과 보편성을 의문시하며 『안티 오이디푸스』를 저술했고, 라캉이 개념화한 오이디푸스 가족 삼각형은 사회를 질서화하고 안정화하는 규범적 힘의 근간이라는 점에서 이에 대한 탈주선을 강조했다. 또한 퀴어 이론가들은 프로이트와 라캉의 남성 중심성과 이성애 중심성을 비판하며 사회적 재생산에 ‘오이디푸스적 대물림’이라고 이름 붙였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제대로 겪는다는 것은 ‘보편적으로 규범화된 성인 남성’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마르틴은 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일까? 그렇다면 S는 유사 아버지인가? ‘테베랜드’가 모두가 가지고 있는 모호한 영역을 의미하는데, 그렇다면 ‘보편적 원형’으로서의 오이디푸스 이미지를 전제하는 것은 사회 구조의 재생산을 ‘주체의 성장’의 필요조건으로 상정할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결말 부분에서 프랑스로 떠나가는 S와 계속해서 언급되던 그리스 비극 『오이디푸스 왕』(소포클레스 저) 도입부를 읽는 마르틴의 모습, 혹은 그를 연기하는 페데리코의 모습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S와 마르틴의 관계와 그 유대에서 흐르는 감정적, 그리고 물리적 교류의 성격이 완전히 탈성애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렇기에 이 연극은 s와 마르틴의 의미심장한 관계를 통해 동성애 금기와 근친상간 금기를 통해서 작동하는 남성 호모소셜의 규범성을 전유하면서 동시에 어느 정도 긍정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관건은 이것이다. 이 작품은 그러한 (젠더와 계급의) 사회적 대물림을 전복하는가? 아니면 단순히 반복하는가? 이에 대한 답을 내리는 것은 이 작품을 하나로 요약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그렇다면 시스젠더 이성애자 남성 중심으로 생산이 이루어지는 시장인 한국 공연예술계에서 올라온 <테베랜드>의 한국 라이선스 공연은 어떠한 맥락에 있을까? 이건 ‘연극’의 젠더를 실험함으로써 균열을 내고 전복하는 극인가? 아니면 단순히 현재의 젠더 구조를 반복하는 글인가? 적어도 현재 한국에서는 후자라고 생각한다. 규범성에 균열을 내기 위해서 ‘서사의 젠더’를 의문시하고 실험을 시도할 수 있는 직접적인 방법 중 하나인 젠더프리 등의 장치를 사용하거나, 의도했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마르틴/페데리코와 S를 더욱 가까워지게 하는 하나의 소재로 등장하는 음악인 로베르투 카를로스의 ‘Amada Amante’를 휘트니 휴스턴의 ‘I have nothing’으로 바꾸어버린 영국 버전처럼 ‘더욱 퀴어하게’ 각색하지 않는 이상. (그렇지만 이 예시는 남미와 스페인어권의 고유 문화라는 중요한 맥락이 탈락되고 영미권의 문화예술 담론으로 수렴된다고 볼 수도 있기에, 역시 쉬운 건 없다.)
연극 <마우스피스>
연극 <마우스피스>는 스코틀랜드 작가 키이란 헐리(Kieran Hurley)의 작품으로, 한국에서는 연극열전의 라이선스 작품으로 올라오고 있다. 이 작품은 창작에 대한 환멸에 빠져 있는 중년 여성 작가 리비와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10대 소년 데클란의 이야기다. 리비와 데클란은 영국 에든버러*에 있는 솔즈베리 언덕에서의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가까워지고, 나이 차이와 계급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은 데클란의 그림 등의 요소로 예술적 교류를 나눈다. 둘 사이의 예술적 교류는 감정적 교류와 병치되고 데클란은 자신의 불우한 가정사(가정폭력을 일삼는 새아버지, 그리고 엄마와 여동생)를 고백한다. 데클란의 집에 방문한 리비는 어둡고 진솔한 분위기 속에서 데클란과 키스하고 잠자리까지 가려다 리비의 의지로 불발되게 된다. 하지만 이 이후 리비는 데클란에게 선을 긋기 시작하는데, 리비의 연극 초안 속 데클란을 바탕으로 한 캐릭터가 자살을 택하는 것을 알고 데클란이 분노하면서 두 사람 사이의 관계의 국면은 급격히 전환되기 시작한다. 이후 리비는 데클란의 연락을 끊어버리고, 데클란의 엄마와 여동생이 새아버지를 따라 가면서 기존에 살던 집에는 아무도 남지 않고, 데클란은 사회적으로 고립되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결말 부분이다. 리비의 연극이 끝나고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난입한 데클란은 이 연극이 자신을 모티브로 한 것이라며 폭로하고 리비를 위협하며 돈을 요구한다. 그 이후의 장면에서 두 캐릭터의 이야기가 갈린다. 리비는 자신이 데클란을 소재로 쓴 연극 ‘마우스피스’처럼 데클란이 자살하는 결말을 들려주지만, 데클란은 그들이 처음 만났던 솔즈베리 언덕으로 향하는 것을 택하며 그림을 찢어버리고 관객을 보며 다음 이야기는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말한다. 이때, 리비의 연극 속 ‘관객과의 대화’ 이후로 객석에 불은 켜져 있는데 이는 이 모든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관객들마저 이 연극에, 그리고 이 연극이 조망하는 예술의 영역에서 작동하는 배제의 질서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폭로하는 장치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도덕적인’ (것처럼 보이는) 예술 작품의 ‘소비’만으로 저절로 도덕적, 윤리적 존재가 된다고 생각하는 소비주의적 환상 역시 문화의 장(場) 역시 자본주의의 규범적 질서와 긴밀히 연결되어 작동하는 현실 속에서 소비 주체의 자기기만에 불과하다는 것을 내포한다. 이러한 측면의 연장선상에서, 이 연극은 ‘아비투스’라는 용어로 개인이 향유하는 (체화된) 예술적 취향이 문화자본에 영향을 받고, 이러한 문화자본이 계급 구조로 인한 사회적 불평등과 연관된다는 측면에 주목했던 사회학자 부르디외의 논의가 직접적으로 연상된다. 한 예시로, 데클란을 소재로 한 연극이 공연되는 공연장에서 예술에 지불되어야 하는 돈 때문에 데클란의 출입이 어려워지는 역설적 장면은 예술과 계급의 규범적 상호연관성이라는 측면을 충실히 증명해주고 있다.
또한 리비는 데클란을 모티브로 한 작품을 만들면서 정작 데클란의 ‘불행’을 자신의 연극의 한 요소로 전락시키며 그 과정 속에서 당사자의 동의없는 녹음 같은 기본적인 창작 윤리를 어기는 모습도 작품 속에 드러나기도 한다. 목소리 없는 존재를 대리하여 말해준다는 착각과 타자를 대상화하지 않는 재현의 불가능성 속에서, 이 연극은 재현의 폭력성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내고 연극의 기본적인 형식과 재현 방식이 문화 자본의 질서와 유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정확히 직시한다.
연극 <마우스피스>는 리비와 데클란의 비대칭하고 불균형한 관계를 주요 주제로 명시하고 있다. 데클란의 불안장애, 불우한 환경과 가정폭력 같은 요소들은 <테베랜드>의 마르틴을 닮았고, 리비의 작가(예술가)라는 직업과 실패로 인해 슬럼프에 빠져 있는 모습은 <빵야>의 나나가 연상되지만 <마우스피스>는 앞서 언급했던 두 작품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된다. 데클란의 이야기를, 그 속 사회적인 소외의 불행을 ‘대신’ 전달하고자 하는 재현자의 역할을 자처한 리비의 예술은 사실 데클란에 대한 타자화와 기만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 드러난다. 그렇기 때문에 데클란과 리비 사이의 묘한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성적인) 텐션이나 키스신은 여러 방면으로 비대칭한 둘 사이 관계의 위태롭고 일시적인 안정과 필연적인 어긋남, 그리고 리비가 데클란에게 행하는 ‘착취’를 암시하는 장치이고, 실제로 키스신을 국면으로 서사의 국면은 180도 변하게 된다. 앞선 두 작품이 두 캐릭터 상의 관계에서 로맨틱한 유대나 성애적 텐션이 암시되지만 절대 명시되지는 않는 것과 대조적이다.
정리하자면, <마우스피스>는 연극의 탈-낭만화를 시도하는 메타연극인 셈이다. 연극에서 연극이라는 장르의 형식 자체를, 예술에 있어서 재현이라는 형식 자체를 의문시하는 것은 내가 밟고 있는 땅을 디디고 서 있지 않는 것과 같다. 소통과 전달의 수단인 언어를 신뢰하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부정하며 ‘탈영토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연극 <마우스피스>는 무대라는 영역의 가능성을 물신화하기보다는 차라리 의문과 환멸이라는 부정성을 택하는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데클란은 자신만의 결말에서 마지막으로 말한다. 진짜 결말은 없으며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고.
* 에든버러는 영국의 주요 4가지 영토 중 하나인 스코틀랜드의 수도이며, 문화예술의 중심지다.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이 열리는 지역이기도 하다. 이 연극의 공간적 배경이 에든버러인 이유는 작가의 출신지이기도 하지만 공연예술을 포함한 예술 작품이나 시설이 집결된 곳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 공간의 의미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다연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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