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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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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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 북(Green Book)’. 1960년대 미국, 흑인 여행자가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숙박시설과 식당을 적어둔 가이드북의 이름에서 이 영화가 인종차별의 폭력성을 다루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62년, 백악관에 초청될 만큼 명성 높은 천재 피아니스트 돈 셜리는 위험이 도사리는 미국 남부 투어를 결심하고, 다혈질의 이탈리아계 백인 토니 발레롱가를 운전기사로 고용한다. 흑인 고용주와 백인 운전기사. 영화의 설정은 낯설고도 전복적인 설정으로 시작한다. 그 낯섦은 곧 우리 내면 깊숙이 무뎌진 채 자리 잡은 오래된 편견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것을 관객은 자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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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리는 부와 명예를 쌓았어도 계속되는 피부색을 향한 차별 속에서 고통을 삼키는 법만 배워야 했다. 그러나 혐오에 익숙해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저 상처가 흉터로 변하기를 기다리며 그 상처가 오늘 하루만 망칠 수 있게 조용히 바랄 뿐이다. 무대 위에서는 박수를 받지만, 무대 밖에서는 식당에 들어갈 수도, 화장실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도 없는 삶. 자신의 노력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듯이 구는 차갑고 단단한 구조 속에서 분노는 스스로를 지치게만 만들 뿐이고, 결국 침묵이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라고 결론짓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꽤 비참하고 슬프다.

 

토니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온 사람이다. 그는 내일을 맞이하기 위해 오늘 쌓인 감정은 오늘 당장 풀어야 직성이 풀린다. 부당한 일을 보면 곧장 반응하고, 모욕을 참기보다 되받아친다. 그래야 맛있는 저녁을 먹고, 두 다리 뻗고 잠들 수 있고, 내일을 잘 살아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셜리가 내일을 지키기 위해 감정을 조용히 누르는 사람이라면, 토니는 내일을 위해 오늘의 감정을 전부 다 터뜨리고 지나가야 하는 사람이다.

 

체념에 익숙해진 셜리에게 토니의 거침없는 태도는 애써 잔잔하게 잠재워둔 수면 위로 돌멩이를 계속 던져 거슬리게 느껴진다. 포기하는 법을 먼저 배운 이에게 “왜?”라는 질문만큼 성가신 것도 없다. 질문하지 않아도 대답은 이미 그려지고, 그 대답은 내가 당장 해결할 수 없는 것일 때가 많다. 답답함은 곧 분노가 되고, 감당하기 어려운 분노 앞에서 가장 빠르고 쉬운 선택은 포기였다. 포기는 외부적으로는 ‘선택’으로 포장되지만 실은 명령과 비슷하다. 삶에는 왜 일어나는지 알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고, 그 모든 일에 이유를 묻는 것은 삶에 조금 더 여유가 있는 사람들의 습관처럼 보인다. 그들의 “왜?”라는 짧고 단순한 질문이 포기를 완전히 그들의 선택으로 만들어버리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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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토니는 계속 묻는다. 왜 참아야 하냐고. 왜 당연한 듯 받아들여야 하냐고. 그는 닫힌 문을 마구 두드리며 셜리가 오래 눌러둔 감정을 건드린다. 거칠고 투박하지만, 그 방식은 때로 셜리에게 그 빌미로 억눌린 감정을 터트릴 수 있게 해주는 짧고 강렬한 해방감이 되어주었다. 예측할 수 없는 혐오 속에 숨죽여 살아온 셜리에게 토니는 사소한 짜증을 시작으로 기어이 갖가지 감정을 꺼내게 만들고, 어느덧 셜리는 그저 부여된 삶을 견디는 사람에서 스스로 살아가고 생동하는 존재로 변해간다. 

 

토니 역시 셜리의 곁에서 생경한 감정을 느끼면서 서서히 달라진다. 처음의 토니는 자신의 욱하는 성질을 이기지 못해 싸우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여정이 이어질수록 그는 자신의 감정보다 셜리의 표정을 먼저 살피기 시작한다. 무엇이 셜리를 불편하게 하는지, 침묵 속에서 혼자 어떤 걸 이겨내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시끄럽게 부딪히는 데 익숙했던 사람이 점점 말하지 않는 마음을 읽어간다. 그리고 나중에는 셜리가 삼켜낸 분노를 대신 터뜨리며 순간을 모면하는 것 이상으로, 그의 존엄이 함부로 짓밟히지 않도록 지키면서 곁에 서는 법을 배워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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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가 아내에게 쓰는 편지를 셜리가 고쳐주는 장면은 두 사람의 교감을 가장 따뜻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초반부 토니의 편지는 자신이 무엇을 먹고, 어디에 있고, 무엇을 했는지를 건조하게 나열하는 일일 보고서를 적기 바빴다. 떨어져 있으니 자신의 하루를 전하려는 말들이었지만, 그 안에는 마음을 꺼내는 법을 몰라 맴도는 서툶이 있다.

 

그러나 셜리의 문장이 더해지며 토니의 편지는 조금씩 달라진다. 글은 말과 행동이 다 담아내지 못한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조용하고 적나라한 방식이다. 특히 사랑을 표현할 때 편지는 마음 깊은 곳에서 일렁이는 감정을 누군가에게 가장 적확하게 묘사할 수 있는 도구가 되어준다. 셜리는 누른 감정을 조용히 배출하는 글에 익숙했지만, 토니에게는 시끄러운 배출이 쉬웠기 때문에 진심을 조용히 섬세하게 표현하는 일은 낯설 수밖에 없다. 특히, 단 한 사람에게만 차오르는 감정이라 가장 강렬하고, 그래서 더 어려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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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리의 로맨틱함이 묻은 문장을 토니는 기쁘게 받아 적는다. 그보다 더 큰 사랑이 이미 토니의 마음에 존재했기 때문에 그는 그 문장들을 전혀 과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토니의 마음을 표현하기에는 그럼에도 부족했다. 아내는 남편의 편지에서 셜리의 흔적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감동했던 이유는, 계속해서 썼다 지운 수많은 연필 자국과 끝에 붙여진 'P.S.애들에게 키스해줘.'에서 모든 문장이 전부 자신의 마음속에서 지어진 게 맞다고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셜리의 문장을 빌려 토니 안에 이미 있었지만 꺼내는 법을 몰랐던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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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가 잘하지 못했던 것들을 배워간다. 셜리는 참는 것만이 품위는 아니라는 것을, 토니는 감정을 터뜨리는 것만이 솔직함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갔다. 한 사람은 침묵에서 조금씩 걸어 나오고, 다른 한 사람은 소란에서 한 걸음 물러선다. 서로의 세계에 스며든다는 것은 서로를 완전히 바꿔놓는 것보다 이미 존재했지만 닫혀있던 문을 열어주고 누군가를 드나들게 허용해주는 것이었다.

 

편견은 문화와 환경 속에서 자연스레 뿌리내린다. 같은 정체성과 가치관을 공유하며 결속을 다지고 적대감을 키워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지키는 무기가 되어 주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고 믿었던 생각이 어느덧 내 곁의 누군가를 해치고 있을 때, 그 생각은 더 이상 무기가 아니라 흉기였다. 내가 가볍게 품고 있던 혐오가 나 한 명의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의 것이었고, 그냥 휘둘렀던 가벼운 손짓이 하나둘 모여 어느덧 거센 칼날이 되어 누군가 실제로 피를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마주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그 혐오를 단순한 습관처럼 품고 있을 수 없게 된다.

 

처음 토니는 흑인 노동자가 입을 댄 물컵조차 더럽게 여기고 버린다. 그러나 여정의 끝에 이르면 친구들의 대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는 혐오 섞인 농담에 발끈한다. 셜리 역시 토니가 권하는 프라이드치킨을 처음에는 비위생적이고 기름진 음식처럼 바라본다. 하지만 한입을 먹고, 이어 두 입을 먹고, 뼈를 창밖으로 던지며 웃는 순간 그는 아주 잠깐 자신을 가두고 있던 단단한 격식에서 풀려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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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끝에 다시 한번 편견을 건드린다. 크리스마스이브의 밤, 눈보라를 헤치며 뉴욕으로 향하던 두 사람의 차 뒤로 경찰차의 붉은 불빛이 번진다. 앞서 경찰에게 모욕과 폭력을 겪었던 기억이 있기에, 토니와 셜리는 곧장 몸을 굳힌다. 토니는 짧은 욕설을 삼키듯 내뱉고, 셜리는 차분하게 “무슨 문제 있습니까, 경관님?” 하고 묻는다. 관객 역시 그 순간 두 사람과 같은 의심 위에 선다. 또다시 차별이 시작되고, 또다시 권력을 가진 사람이 그들을 멈춰 세우고 폭력을 휘두를 것이라 짐작한다.

 

그러나 경찰은 다른 태도를 보인다. 차가 한쪽으로 기울어져 보였고, 뒷타이어가 펑크 난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는 토니가 눈보라 속에서 타이어를 교체하는 동안 도로의 차들을 피해 가게 해주고, 마지막에는 조심히 가라며 메리 크리스마스를 건넨다. 토니가 “감사합니다, 경관님” 하고 답한 뒤 다시 차를 몰고 가는 장면은, 또다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편견은 정말 사라질 수 있는지. 

우리는 하나의 편견을 깨기 위해 또 다른 편견을 만들고 있는 건 아닌지.

 

과거의 상처는 자연스럽게 경계를 만든다. 그러나 그 경계가 어느 순간 또 다른 누군가를 미리 판단하는 마음이 되는 것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그린 북》은 이 장면을 통해 편견이 특정한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상처받은 사람과 그 곁에 있는 사람,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는 관객 안에서 어떻게 허물어지고, 어떻게 교묘하게 다시 자리 잡는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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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편견은 하나의 큰 사건으로 단번에 사라지기보다, 함께 차를 타고, 같은 음식을 먹고, 서로의 하루를 함께 채우는 시간 속에서 점점 옅어진다. 투어를 마친 뒤 평생 익숙했던 고요를 낯설게 느끼며 토니의 집을 찾아간 셜리와, 시끌벅적한 가족들 사이에서도 홀로 있을 셜리를 계속 걱정하던 토니. 그리고 서로를 다시 마주한 순간, 비로소 편안한 웃음을 지으며 따뜻하게 마주 안는 두 사람은 첫 장면에서 풍기던 인상과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이 영화는 차별의 시대를 살아가는 두 남자의 연대기인 동시에, 서로의 세계를 침범하고 스며드는 과정을 그려낸다. 혼자서 단단하게 지어왔다고 믿었던 삶이 사실은 어딘가 위태롭게 버티고 있었음을 깨닫는 순간, 세계는 깨어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깨짐은 파괴가 아니다. 더 넓은 세계를 지을 수 있는 확장이고 더 단단하게 구축할 수 있는 보수였다. 눈보라 치던 차가운 도로를 지나 따뜻한 크리스마스의 풍경으로 끝을 맺듯, 영화는 차별과 혐오로 얼어붙은 시대 속에서 생겨난 각자만의 억눌린 틈새마다 따스한 바람을 불어넣으며 막을 내린다. 


《그린 북》은 개봉 이후 백인이 흑인을 구원하는 듯한 서사 구조로 날 선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지닌 가치를 그 비판 아래에 묻어두기에는 분명 간과할 수 없는 성취가 존재한다. 영화는 인종차별을 고발하는 데만 집중하기보다,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투박한 두 사람이 어떻게 오해와 충돌을 넘어 이해로 다가서는지 그 내밀한 변화의 과정에 주목한다. 흡인력 있는 전개와 밀도 높은 연출, 그리고 두 배우의 탄탄한 앙상블은 그 변화를 설득력 있게 쌓아 올리고, 작품이 가지는 가치를 몰입감있게 증명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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