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이 작품을 보러 극장으로 향하던 내 표정은 설렘과는 거리가 있었다. 혜화역으로 가는 길에, 하고 있는 일을 이번 달까지만 하고 그만두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머릿속에는 이따 볼 작품에 대한 기대보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할지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했다. 극장에 도착해서 티켓을 수령하고, 객석에 앉아 공연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순간에도 불안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찾아왔다. 어느새 극장의 불이 꺼졌고, 그 생각들을 애써 누른 채 일단 이 공연에 집중해 보자고 마음먹었다.

암전이 끝나고 환한 조명이 무대를 비추었다. 그리고 걸판여고 연극부원 6명이 마치 기차처럼 일렬로 선 채 앞사람의 어깨를 잡고 발랄하게 등장했다. 오늘은 선생님이 연극부가 새롭게 공연할 작품의 제목을 발표하는 날이다. 부푼 기대를 안고 기다린 다음 작품은, 바로 ‘빨간 머리 앤’이었다. 너도나도 ‘앤’ 역할을 하겠다고 소란인 가운데, 선생님은 말한다. 앤 역할을 ‘돌아가면서’ 맡아보자고.
그렇게 본격적으로 극이 시작된다. 부원들은 “누가 앤이야? 앤은 누구야?”라고 노래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첫 번째로 앤을 맡을 부원이 정해지고, 무대 위에는 빨간 머리 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제 이름은 앤이에요! A, N, N, E, 앤! 끝에 꼭 E가 붙은 앤으로 불러주세요!”
고아원 출신의 앤은 입양 과정에서의 착오로 남자아이를 원하던 에이번리의 초록 지붕 집에 도착하게 된다. 그 집에 사는 ‘마릴라’는 앤을 고아원으로 돌려보내려고 한다. 하지만 발랄한 앤으로 인해 웃음이 많아진 오라버니 ‘매슈’를 보며 앤을 결국 가족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한다.
앤은 말 그대로 앤(N) 성향이었다. ‘상상’하는 것은 앤의 취미이자, 힘든 순간도 버텨낼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그러한 상상력을 이용하여 앤은 자신을 반기지 않는 에이번리에서 적응하기 시작한다. 낯설기만 한 그곳에 도착한 후 처음 보이는 길을 ‘기쁨의 하얀 길’, 호수를 ‘반짝이는 호수’로 이름 붙이기도 하고, 슬플 때마다 물이나 거울에 비친 자기 자신을 친구로 삼아, 이름을 붙여주고 대화하며 외로움을 떨쳐내기도 한다. 이후 앤은 엉뚱하고 화를 잘 못 참는 성격으로 마을 사람들과 갈등을 일으키거나 사고를 친다. 그러나 특유의 밝고 똑똑한 면모로 그러한 위기를 극복하고 성장해나간다.
그렇게 자라 어엿한 어른이 된 앤은 졸업 콘서트에서 연설을 한다. 앤이 처음 에이번리에 왔을 때 그곳은 앤에게 낯설고, 환영받지 못했던 곳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에이번리가 자신을 기다리는 곳이며, 사랑하고 사랑 받는 곳임을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부르는 넘버가 “저 길모퉁이 앤”이다.
이제는 길이 끝난다 해도 두렵지 않습니다
난 믿을 겁니다
저 모퉁이를 돌면 분명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분명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 거라고요
맞아요 저 길모퉁이를 돌면 또 다른 슬픔이 있을 거라고
상상했었죠 그래서 두려웠었죠
하지만 이제 알아요 살아가려면 저 길모퉁이를
언젠가 만나게 돼 있죠 피할 수 없어요
저 길모퉁이를 돌면 분명 좋은 일이 펼쳐질 거라고
이제 난 믿어요 용기를 내어봐요
나는 이 넘버에서 그만 펑펑 울어버리고 말았다. 나 또한 앤처럼 새로운 길모퉁이 앞에 서 있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그 길모퉁이를 도는 것이 무섭고 겁이 나 잔뜩 움츠러든 채 그저 발걸음을 멈춰 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앤은 그런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살아가려면 저 길모퉁이를 언젠가 돌아야 한다고. 그러니 또 다른 슬픔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알더라도, 저 길모퉁이를 돌면 분명 좋은 일이 펼쳐질 거라고 상상해 보라고.
그렇게 눈물을 쏟고 나니 정말로 앤처럼 명랑하게 길모퉁이를 돌아볼 자신이 생기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다짐했다. 그애처럼 새롭게 도착한 곳에서 내 이름 철자 하나하나를 당당하게 외칠 수 있는 대담함을 가져보겠다고.

앞서 언급했듯, 연극부 선생님은 앤 역할을 돌아가면서 해보자고 한다. 그래서 걸판여고 연극부는 ‘빨간 머리 앤’의 스토리를 세 부분으로 나눈다. 그리고 3명의 앤이 각각 맡아서 한다. 이에 따라 뮤지컬 <앤ANNE>의 배역 중에는 ‘앤1’, ‘앤2’, ‘앤3’이 있다.
이 극에서 앤을 상징하는 소품은 ‘밀짚모자’이다. 그래서 앤1에서 앤2로, 앤2에서 앤3으로 앤 역할을 맡는 부원이 바뀔 때, 앤은 밀짚모자를 그다음 앤에게 넘긴다. 이렇게 돌아가면서 앤을 맡는 설정은 "앤은 누구나 될 수 있다"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극의 커튼콜에서 모든 등장인물들은 손을 모아 객석을 향해 들며 이렇게 노래한다. “내가 앤이야, 우리 다 앤이야!” 그렇게 연극부는 나에게 말했다. 이제는 네가 앤을 맡아보라고. 이제는 네가 밝고 용감하게 길모퉁이를 돌아볼 차례라고. 이처럼 뮤지컬 <앤ANNE>은 관객 모두에게 밀짚모자를 건네는 작품이다.


(윗쪽 사진의 송영미 배우는 앤3이고(맨 왼쪽), 아랫쪽 사진의 송영미 배우는 앤1이다.(가운데))
이 작품은 배우 캐스팅이 좀 독특하다. 바로 ‘앤1’ 배역을 맡은 ‘송영미’ 배우가 ‘앤3’ 배역 또한 맡는다. 그리고 ‘앤2’ 배역을 맡은 ‘정아인’ 배우도 ‘앤3’ 배역 또한 맡는다. 이렇게 한 배우가 공연 회차에 따라 다양한 앤을 연기함으로써, “모두가 앤이 될 수 있다”라는 작품의 메시지를 더욱 강화한다.
이렇게 뮤지컬 <앤ANNE>은 극중극에서 앤을 돌아가면서 맡는 설정과, 실제로 배우들이 여러 앤을 연기하는 특성으로, 그 누구라도 용기 있는 앤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즉 관객에게 ‘앤4’라는 새로운 역할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새로운 길모퉁이 앞에 서 있는, 다양한 머리 색의 앤들에게, 이 작품을 보라고 기꺼이 권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