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엔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있어.”
어릴 적부터 어머니가 자주 하시던 말이다.
학부 시절 조선일보에 기고한 글이 실리기도 했던 어머니는, 언젠가부터 그림책에 매료되어 공부하시고, 아이들의 동화책 튜터로 활동하시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 집엔 ‘그림책의 대가’라 불리는 앤서니 브라운의 책이 제법 여러 권 꽂혀 있다.
어버이날, 어머니와 함께 앤서니 브라운의 전시가 열린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을 찾았다.
그림책을 ‘거기서 거기’라 여겨온 나와, 그림책을 애정하는 어머니. 조금은 빳빳한 자세와 오래된 애정이 나란히 앤서니 브라운展 앞에 섰다. 우리는 함께, ‘이야기의 힘’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앤서니 브라운 展: 마스터 오브 스토리텔링>은 아시아 최초 공개 신작을 포함해, 데뷔 초부터 최근작까지의 여정을 담은 260여 점의 원화를 선보인다. 단순한 회고전이 아닌, 작가의 창작 여정을 따라가며 그의 내면과 철학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구성된 점이 인상 깊다. 전시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포함한 총 10개의 섹션으로, 장면마다 대표 작품과 작가의 메모, 창작 에피소드, 당시의 스케치가 함께 소개되어 있어 단순히 '책'이 아니라 '그림책'이 가진 힘이 무엇인지 톺아볼 수 있었다.
글과 그림 사이, 천재 이야기꾼 앤서니 브라운
그림책이라고 얕보지 마시라. (과거의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앤서니 브라운은 단순히 글과 그림을 잘 짓는 작가가 아니다. 언어와 이미지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점묘화처럼 각각의 요소를 점 찍어 하나의 거대한 작품으로 직조하는 천재적인 이야기꾼이다. 예를 들어, 《거울 속으로》는 이야기보다 그림을 먼저 그리는 방식으로 작업 되어 일반적인 창작 순서를 뒤집었다. 이 실험적 접근은 결과적으로 더욱 입체적인 상상력을 품은 독특한 작품을 탄생시켰다.
그의 그림책에서 ‘그림’은 단지 글을 보조하는 역할에 머무르지 않는다. 오히려 텍스트가 말하지 않는 이야기들을 그림이 대신 전하고, 때로는 텍스트보다 더 많은 서사를 품는다. 《헨젤과 그레텔》, 《고릴라》 같은 작품들은 이러한 시각적 내러티브의 힘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의도적으로 남긴 여백, 그림 속에 숨겨진 디테일, 관찰자의 시선에 따라 새로운 의미가 생성되는 구성 등은 ‘읽는 그림’이 얼마나 다층적인지를 증명한다.
《돼지책》은 한국에서도 큰 사랑을 받은 작품이다. 가부장적 가족 문화에 대한 비판을 유머와 풍자로 풀어낸 이 책은, 집안일을 도맡던 엄마가 어느 날 “너희는 돼지야”라는 말만 남기고 집을 나가면서 시작된다. 작가는 벽의 그림자, 벽지, 꽃병 등에 돼지 이미지를 슬쩍슬쩍 숨겨 놓았다. 그것들은 가족 구성원의 ‘변화’를 예고하는 상징이 되었다가, 엄마가 돌아온 후 하나둘 사라진다. 마치 영화 속 이스터에그처럼, 독자는 그림을 해석하며 작품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이제부터 변할 거란다》, 《동물원》 같은 작품들에서도 그림은 단순한 배경을 넘어 이야기의 중심축으로 작동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원작 텍스트에 앤서니 브라운의 삽화만 더해져 출간되었을 정도로, 그는 그림만으로도 깊은 서사를 담아내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내는 능력을 가졌다. 그에게 그림은 단지 보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장치다.
그의 책은 텍스트와 이미지가 독립적이면서도 긴밀하게 엮여 있어, 아이에게는 즐거운 이야기로, 어른에게는 현실에 대한 통찰로 다가온다. 이러한 이중 구조 덕분에 그의 작품은 세대를 초월해 끊임없이 사랑받는다. 그림책이란 장르의 예술성과 확장성, 그리고 그 중심에 선 앤서니 브라운의 위상을 다시금 실감한 전시였다.
《앤서니 브라운 展》, 또 하나의 그림책이 되다
이번 전시는 그 자체로 하나의 ‘그림책’ 같았다.
책장을 넘기듯 전시 공간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작가의 상상 속을 직접 탐험하는 기분이 들었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포함한 10개의 챕터로 짜인 동선은 실제 책의 구성처럼 순차적이고 정교하게 설계되어 새로운 그림책을 읽는 경험처럼 느껴졌다. 그 책의 제목은, 《앤서니 브라운展》.
공간 곳곳엔 작가의 상징들이 유기적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단순한 소품이나 장식이 아니라, 관람객이 작품 세계를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이끄는 장치였다.
예컨대, 천장에는 ‘윌리’ 모형이 사선으로 설치되어 있었는데, “윌리는 꿈을 꿉니다. 독자도 꿈을 꾸고, 작가도 꿈을 꿉니다. 윌리는 꿈입니다…”라는 문구 위로 비상하는 모습은 ‘꿈’이라는 키워드에 감정적 깊이를 더해주었다. 또 다른 공간에서는 《터널》 속 소녀가 어두운 통로를 지나가는 장면이 실제 전시 벽면 아래 뚫려 재현되었는데, 마치 내가 그녀의 여정을 따라가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점은, 이 전시가 ‘보는 전시’를 넘어 ‘참여하는 전시’였다는 것이다. 앤서니 브라운은 우정, 성장, 가족, 사랑 등 인간의 보편적 정서를 다루며 감정적 몰입을 유도하는데, 전시는 이를 극대화하기 위한 체험형 콘텐츠들을 다채롭게 마련해두었다.
“두 그림을 비교해보세요”라는 문구 아래 놓인 작품 속 장면들을 관찰하며 작가가 의도한 분위기 차이를 느껴보기도 하고, 《겁쟁이 빌리》를 모티브로 한 ‘걱정인형 보드’에 나만의 걱정인형을 붙이거나, 《엄청나게 커다란 소원》과 연결된 셰이프 게임, 《가족 시리즈》의 메시지를 담은 ‘함께 포옹하는 공간’ 등도 마련되어 있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삽화는 애니메이션으로 재구성되어 새로운 미디어 콘텐츠로 재탄생했고, 《킹콩 시네마》 섹션에서는 영상이 함께 상영되어 감상의 깊이를 더했다.
모든 콘텐츠는 작가의 대표작들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관람객 스스로 이야기를 완성해가는 주인공처럼 느껴졌다.
The Three Wishes2022 ©Anthony Browne
마치 그림책 한 권을 천천히 읽어 내려가듯, 나는 이 전시를 오래간 거닐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다른 세계가 펼쳐지는 것처럼, 전시장 곳곳엔 앤서니 브라운만의 상상과 은유, 따뜻함이 정교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의 작품은 늘 어른과 아이 사이의 어딘가에서, 말로 다 담기 어려운 감정을 건드린다. 이번 전시는 그 감정을 단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느끼고, 직접 그려보고, 마음으로 오래 기억하게 만들었다.
그림책은 짧지만, 결코 얕지 않다.
때로는 가장 단순한 형식이 가장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다는 것을, 비로소 인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