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부터 마이아트뮤지엄의 전시를 꾸준히 챙겨보고 있다. 전시장에서 구매한 굿즈는 방 한 켠에 걸어두었고, 이는 내 일상 속에서 예술을 가까이 느끼는 매개가 되었다. 옷을 갈아입는 순간조차도 무심코 그림을 바라보며, 그날의 전시장에서 받았던 감정과 기억을 다시금 떠올리곤 한다. 대부분의 전시는 퇴근 후나 주말에 방문했기에 도슨트 해설을 들을 기회가 없었다는 점이 항상 아쉬움으로 남았다. 그래서 이번 전시만큼은 꼭 해설을 들어야겠다는 결심으로 반차를 내고 삼성역으로 향했다. 마침 날씨마저 화창해, 기분 좋은 예감 속에 전시장을 찾았다.
평일 낮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관람객들이 도슨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작품 앞에서 진지한 태도로 전시에 임하는 사람들을 보며, 예술이 얼마나 다양한 이들에게 에너지를 불어넣는지 실감했다. 한지원 도슨트님은 무하의 작품을 비잔틴, 아르누보, 슬라브 민족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보길 권유했고, 이는 무하의 예술 세계 전반을 꿰뚫는 핵심 축으로 다가왔다.
운명을 만든 포스터
1894년, 무명의 삽화가였던 무하는 전설적인 배우 사라 베르나르의 요청으로 연극 『지스몽다』의 포스터를 제작하게 된다. 이 포스터는 기존의 단순하고 강렬한 디자인과 달리, 세로형 구성과 섬세한 장식, 신비로운 여성상을 통해 파리 시민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이로 인해 무하는 단숨에 파리 예술계의 중심에 선다. 이후 그는 사라의 전속 포스터 작가로 활동하며, 『햄릿』 등 다양한 그녀의 연극 포스터를 제작했고, 연극 프로그램과 무대 장식, 의상 디자인까지 맡으며 예술적 영역을 확장해나갔다.
이 시기의 무하는 무하 스타일(Le Style Mucha)의 정립을 통해 아르누보의 대표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한다. 장식적이고 상징적인 구성, 신비로운 여성상, 그리고 감정의 결을 섬세하게 드러내는 포스터는 연극의 정서를 시각적으로 극대화하며, 무하와 사라의 협업은 단순한 상업적 계약을 넘어 예술적 동반자 관계로 발전했다.
무하의 포스터를 보며 느낀 점은 파스텔톤의 색채가 주는 잔잔한 감동이다. 일반적으로 강렬한 원색보다 흐릿한 색감이 마음을 잔잔히 적신다. 하지만 무하의 포스터는 이처럼 부드러운 색조 속에서도 강렬한 존재감을 품고 있다. 작품마다 사라 베르나르의 캐릭터성이 뚜렷하게 드러나며, 때로는 비극적으로, 때로는 힘차게, 혹은 나약하게 묘사된다. 특히 『햄릿』 포스터는 한 여인의 비극적 감정을 섬세하게 시각화하며, 연극을 직접 보고 싶게 만드는 힘이 있다.
광고로써 예술하기
1895년 이후, 무하는 연극계를 넘어 상업 예술 전반으로 활동 반경을 넓힌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던 당시 유럽에서, 광고 포스터는 단순한 마케팅 도구를 넘어 문화적 풍경을 형성하는 예술 장르로 자리잡고 있었다. 무하의 포스터는 제품의 기능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브랜드가 추구하는 감성과 정체성을 시각화함으로써 소비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특히 무하 스타일의 여성상은 단순한 모델을 넘어 브랜드의 상징으로 기능하며, 광고의 품격 자체를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다.
이 시기 무하는 『욥』 담배지, 『모엣 & 샹동』 샴페인, 향수, 치약, 심지어 아기 식품과 보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제품의 광고 포스터를 제작하며 대중과 소통했다. 그는 예술을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아닌, 모두가 향유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기 위해 대량 생산을 택했다. 이는 가정이나 공공장소 어디서든 감상할 수 있는 예술로 자리 잡았으며, 현대적 의미의 브랜딩과 시각 디자인 개념의 시초로 평가받는다.
전시장에서 다양한 광고 포스터를 마주했을 때, 문득 '지금 서울 한복판 미술관에 동네 마트 전단지, 회사 홍보 포스터, 성형외과 광고지, 버스 정류장에 붙어있는 대형 팜플렛들이 모여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그런 광고물들을 모아두면 참 웃기고 황당한 전시회일텐데 무하의 포스터들은 전혀 상업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는 매력이 있음을 깨달았다.
치약 광고, 담배지 포스터, 보험 홍보물까지 언뜻 보면 상업적 산물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 담긴 미적 감각과 예술적 해석은 결코 가볍지 않다. 무하의 예술은 바로 그 지점에서 빛난다.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값비싸지 않은 예술. 아름답고도 대중적인 그의 철학이 시대를 넘어 오늘날까지 감동을 전한다.
무하는 예술이 단지 미술관에 갇힌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예술가였다. 그의 재치는 작품 속 세부에서도 드러난다. 말 사육 표창장 같은 자료는 단순한 인증서가 아닌 하나의 작품으로 재탄생한다. 농업 위원회의 표창장 속 근엄한 말들과 위풍당당한 사육자는 그 자체로 미적 대상이 되었고, 유머와 품격을 동시에 담아낸 무하의 감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전시를 관람하며 가장 오래 시선을 붙잡은 작품 중 하나는 바로 알폰스 무하의 연작 「사계」였다. 사계절을 네 명의 여인으로 의인화한 이 시리즈는 그 자체로 하나의 시처럼 다가왔다. 각 계절은 눈에 띄는 상징물 없이도 그 분위기만으로도 충분히 느껴졌고, 무하 특유의 유려한 선과 섬세한 장식성이 더해져 감각적으로 구현되어 있었다.
봄의 여인은 생명을 깨우는 듯한 부드러운 색감 속에서 가녀린 꽃 사이를 거닐고, 여름은 풍요로운 햇살 아래 활짝 핀 자연과 함께 생동하는 아름다움으로 가득했다. 가을의 여인은 성숙하고 풍성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익어가는 열매처럼 깊은 인상을 남겼다. 겨울의 여인은 차분하고 내밀한 분위기 속에서 오히려 강한 존재감으로 다가왔다. 이 네 명의 여인은 단순히 계절의 외양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계절이 품은 정서와 감각을 오롯이 전달하며 감상자의 내면에 잔잔한 파동을 일으켰다.
작품의 중심에는 언제나 여인이 있었다. 무하는 여인을 단순한 미의 상징으로 그리는 것을 넘어, 자연의 시간성과 조화, 생명의 리듬을 여성의 몸짓과 표정, 주변의 식물들로 조화롭게 엮어냈다. 이는 마치 계절이 자연의 한 장면을 넘어 인간의 삶과 닮아 있음을 보여주려는 듯했다. 그 안에 피어난 꽃들은 계절마다 다른 생동감을 지니며, 보는 이의 감각을 풍요롭게 자극한다.
무하의 「사계」는 단순히 ‘예쁘다’는 인상을 넘어, 집 안의 한 자리를 차지하며 일상을 풍요롭게 해줄 것 같은, 강한 ‘소장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그의 세계에서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순환하며 피어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늘 감각적이면서도 정신적인 아름다움을 품은 여인이 있다. 이 작품 앞에서 나는 계절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인간의 감정과 자연의 조화를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민족의 혼을 담은 선으로 체코인의 긍지를 그리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무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의뢰를 받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관을 장식했으며, 이 작업을 통해 슬라브 민족의 역사와 정체성을 시각화하고자 했다. 이후 그는 제국으로부터 훈장을 받았지만, 제국이 슬라브 민족을 억압하는 현실에 대한 갈등을 느끼며, 이러한 경험은 후일 슬라브 서사시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또한, 1898년 프리메이슨에 가입한 그는 정신적, 철학적 탐구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고, 이를 반영한 작품으로 삽화집 『르 파테』를 발표하며 예술적 세계관을 넓혔다.
무하는 계속해서 다양한 예술적 시도를 이어갔으며, 주얼리 디자인과 『장식자료집』 출간을 통해 예술 언어를 체계화했다. 그러나 과도한 상업적 의뢰는 그에게 정신적, 예술적 갈등을 일으켰고, 1904년에는 새로운 도전을 위해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 미국에서 그는 슬라브 민족의 독립과 문화를 위해 슬라브 서사시 프로젝트를 실현하게 되었으며, 찰스 리처드 크레인의 후원을 받으며 이 작업은 점차 구체화된다.
수많은 상업적 의뢰는 그에게 커다란 부담과 자신의 이상과 배치되는 모순으로 돌변했다. 예술적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갈망과 상업적 성공 사이에서의 갈등은 예술가들에게 불가피한 현실일까. 무하도 이 모순 속에서 갈등하며, 결국 자신의 이상을 추구하기 위해 새로운 도전을 택하게 되었다. 그는 상업적 성공과 예술적 순수성 사이에서 불가피한 균형을 잡으려 했지만, 결국 자신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예술적 이상을 우선시하게 되었다. 이 과정은 그에게 예술적 성취 이상의 의미를 안겨주었고, 그의 작업에 민족적 정체성을 담는 방향으로 이어졌다.
참 모순적이다. 상업적으로 돈을 많이 벌어야 넉넉하게 자신의 예술 활동을 펼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은 오히려 어긋나기도 하고, 가난하여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생활에서도 계속 예술 활동을 해나가고 역작을 탄생시키는 수많은 예술가들의 이 아이러니가 참 마음에 아프다.
무하도 그런 상황에 놓인 것이다. 예술적 이상과 상업적 성공의 거리가 점점 멀어져 갈등하고, 결국 새로운 도전을 위해 다른 나라를 택한다. 미국으로 떠나 자신의 민족적 가치를 도화지에 담는다.
특히, 무하가 미국으로 떠나면서 시작된 슬라브 서사시 프로젝트는 단순히 개인적인 예술적 표현을 넘어서, 민족과 문화의 독립적 가치를 담은 중요한 작업이었다. 그는 예술을 통해 슬라브 민족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그들의 독립과 자유를 기념하고자 했다. 그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민족적 아이덴티티와 문화적 자부심은 단순히 미적인 아름다움을 넘어서, 사회적, 정치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중요한 매개체로 작용하였다. 무하의 예술에서 느껴지는 내적 갈등은 단지 개인적인 차원에 그치지 않았고, 더 넓은 사회적, 문화적 차원의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갈등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에서 무하는 예술의 진정성과 사회적 의미를 고양시켰으며, 그의 작품은 그 자체로 시대와 사회를 뛰어넘는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무하의 예술이 가진 중요한 의미는, 그가 예술을 통해 사회적 책임을 다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더욱 깊이 다가온다. 그는 예술적 이상을 추구하면서도, 자신이 속한 민족과 국가의 미래를 위해 예술을 바쳤다. 그의 예술은 단순히 미적인 성취에 그치지 않았고, 사회적 메시지를 전하며 민족적 단결과 독립을 고취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점에서, 무하의 작품은 예술이 단지 개인적인 창작을 넘어서 사회와 역사에 실질적인 기여를 할 수 있다는 중요한 교훈을 주었다.
무하의 작품을 통해 예술은 단순한 감상의 대상으로 끝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예술은 사회적, 역사적 의미를 담아내며, 그 시대를 대표하는 강력한 메시지로 작용할 수 있다. 그의 작업은 그 당시의 사회적, 정치적 상황을 반영하며, 예술이 사회와 어떻게 상호작용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남아 있다. 예술이 미적인 가치만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더 넓은 사회적, 역사적 맥락을 담을 수 있다는 사실을 무하는 그의 삶과 작품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하였다.
슬라브 민족을 위한 예술적 기여
무하는 1910년, 미국에서 슬라브 서사시 프로젝트에 대한 후원을 얻은 후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 이후, 새로운 국가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국가 지폐와 우표 디자인, 그리고 프라하 성 내 성비투스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제작하며, 무하는 자신의 예술적 언어를 통해 민족의 독립과 단결을 표현하였다. 이러한 공공 작업은 그가 개인의 예술적 성취를 넘어, 민족적 사명감을 가지고 활동한 예술가임을 입증한다.
1939년, 나치 독일의 점령 하에 무하는 감시 대상이 되었고, 결국 체포되었으나 건강이 악화된 상태에서 석방되었다. 무하의 죽음은 체코 국민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그의 장례식에는 10만 명이 참석하여 그의 예술과 정신을 애도했다. 그의 작품은 시대를 넘어서는 예술적 가치를 지니며, 사회와 역사에 기여할 수 있는 예술의 본질을 여전히 보여주고 있다.
무하의 마지막 시기는 그의 예술적 사명감과 민족적 독립의 메시지를 결합한 중요한 시기였다. 그는 예술을 통해 자신의 민족과 국가의 정체성을 고양시키며, 그가 추구한 단결과 독립의 가치를 대중에게 강력하게 전달했다. 무하의 예술은 단순히 미적인 경험을 넘어, 사회적, 역사적 맥락을 담아내며 시대를 초월한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의 작품을 통해 예술이 어떻게 사회와 역사에 기여할 수 있는지를 실질적으로 보여준 점이 특히 인상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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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를 통해 무하의 예술적 여정과 그의 내적 갈등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었다. 특히, 무하가 예술적 이상과 상업적 성공 사이에서 겪은 갈등, 그리고 그가 이를 어떻게 극복하며 새로운 도전을 추구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많은 인사이트를 제공했다. 예술가로서의 내적 갈등과 그로 인한 정신적 고뇌가 결국 그의 예술적 방향을 결정짓게 되었고, 이는 무하의 예술에 더욱 큰 깊이와 의미를 부여하게 만들었다. 그는 개인적 창작의 경계를 넘어서, 민족적 정체성과 독립을 예술로 표현하며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다. 그가 예술을 통해 사회와 역사에 기여할 수 있음을 명확하게 보여준 점이 특히 인상 깊었다.
무하의 삶은 예술적 성취가 단지 개인적인 것을 넘어, 사회적, 민족적 의미를 담을 수 있다는 중요한 교훈을 준다. 그는 예술을 통해 민족의 독립과 자유, 그리고 문화적 자부심을 고양시키려 했으며, 이를 통해 예술이 어떻게 사회적 변화와 역사적 흐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무하의 작품은 단순히 미적인 성취를 넘어서, 사회적, 역사적 맥락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예술이 어떻게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그 시대의 중요한 문제를 반영할 수 있는지에 대해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번 전시에서 도슨트님이 언급하신 ‘인생의 3가지 일생일대 기회’에 관한 이야기는 매우 특별했다. 도슨트님은 무하에게도 그런 기회가 있었다고 하셨고, 그 중 첫 번째 기회는 미술을 배우기 위해 대학 자금을 지원하기로 한 후원자가 생긴 순간이었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가 그 기회를 얻었을 때, 무하가 이미 27살이었다는 사실은 나에게 매우 기억에 남는다. 예술계에서 보통 신동이라고 불리는 예술가들은 대개 10대, 심지어 5살에서 9살 사이에 두각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27살이라는 나이에 그 기회를 얻었다는 사실이 나에게 살짝의 충격이였다.
사실 예술계가 아니라고 해도, 27살이라고 하면, 이미 신동 나이는 지났고 30대를 바라보고 현실에 안주하게 되는 그저 평범한 나이라고 생각했다. 도슨트님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나도 지금 그 나이를 지나고 있기에, 어쩌면 나에게도 아직 인생의 중요한 기회가 올 수 있다고, 아니면 이미 놓쳤다고 자책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오지 않은 것이니까.
무하도 성실하게 주어진 기회를 잡고자 평상시에 착실히 해낸 덕분에 그 기회가 왔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앞으로 올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준비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이제는 내가 성실함을 가장 큰 장점으로 생각해온 지난 시간들이 너무 익숙해져서, 그것이 더 이상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는 순간이 오기도 했다. 일상에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고, 성실함이 기본적인 자질이 되다 보니, 그 중요성이나 특별함에 대해 점점 무감각해져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번 전시와 도슨트님의 이야기를 통해 다시 마음을 다잡게 되었다. 나에게도 그런 기회가 올 수 있을 것이며, 그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준비하고 성실히 나아가야 한다고 믿는다.
이 외에도 도슨트님은 무하의 두 번째, 세 번째 기회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셨다. 그 부분은 직접 마이아트뮤지엄에 방문하여 한지원 도슨트님께 들으면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전시를 통해 얻은 교훈은 단순히 예술에 대한 이해를 넘어, 내 삶에 대한 성찰과 다짐을 하게 만드는 소중한 경험이 되었다.
무하의 예술적 여정을 따라가며, 나는 나의 삶과 앞으로의 목표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되었다. 예술이 그저 미적인 성취를 넘어서, 사회와 역사에 영향을 미치는 힘이 될 수 있음을 깨닫고, 그와 같은 여정을 나 역시 준비해나가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