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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연극을 본 것이 참 오랜만이었다. 마음 한구석에 언젠가 다시 극장을 찾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바쁜 일상 속에서는 늘 후순위로 밀리곤 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공연 실황이 CGV에서 상영된다는 소식을 접했다. 처음에는 조금 망설였다. 과연 극장에서 연극을 영화처럼 보는 경험이 만족스러울까? 고민 끝에 상영 스케줄을 찾아보니, 종영까지 단 이틀만이 남아 있었고, 볼 수 있는 시간은 이미 매진이었다. 마지막 희망으로 취소표를 기다렸고, 다행히 빈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오랜만에 어두운 객석에 앉아 3시간이라는 긴 러닝타임을 마주하게 되었다. 시간이 길다고 해서 지루할까 걱정했지만, 연극이 끝나고 나서는 오히려 아쉬움이 남았다. '정말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고, 하나하나 꺼내어 다시 들여다보고 싶은 이야기들이 마음 한구석에 고요하게 쌓여갔다. 그리고 희곡 또한 찾아 읽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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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빵야>

 

 

 

장총의 이야기, 한국의 이야기: 사물에 감정이 깃들 때

 

연극 〈빵야〉는 99식 소총이라는 사물에 감정을 부여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처음에는 이 설정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러나 극이 진행될수록, 이 사물이야말로 한국 근현대사를 가장 끈질기게 살아남은 생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총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었다. 사람들의 손을 거치고, 시대의 폭력과 변화를 몸으로 겪어내며 존재해온 또 하나의 증언자였다.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이 연극이 철저히 이분법을 거부한다는 점이었다. 조선인과 일본인, 인민군과 해방투사, 빨갱이와 국군. 보통이라면 쉽게 선과 악을 나누고 싶어질 대립 구도 앞에서도, 이 극은 끝까지 분명한 편을 들지 않았다. 그렇게 적과 아군,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는 점점 흐려졌고, 오히려 이 모호한 지점이야말로 우리의 역사와 현실을 더 정확하게 비추는 것처럼 느껴졌다.


극 중에 또 다른 극이 겹쳐지고, 다시 그 안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뻗어나가는 복잡한 구조인 그 다층적인 흐름을 따라가며 머릿속에서 퍼즐을 맞추듯 역사의 조각들을 붙여나가는 과정을 겪는다. 〈빵야〉는 소총이라는 특이한 소재를 넘어, 시대의 고통과 생존, 그리고 인간의 모순을 사물의 기억 속에 절묘하게 녹여낸 작품이다.

 

 

 

기록과 증언, 글을 쓰는 이의 불안한 양심

 

극 중 나나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깊은 갈등을 겪는다. “기록하고 기억하고 증언하는 사명이라는 거짓말로 우선 써보자”는 나나의 혼잣말은, 처음 들었을 때부터 마음에 단단히 박혔다. 글을 쓴다는 것은 어쩌면 늘 그런 불안과 기만을 동반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과연 내가 쓰는 이 기록이 진실에 다가가는 것인지, 아니면 자기 위안을 위한 행위에 불과한 것인지. 그런 두려움 앞에 나는 종종 멈춰 서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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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한국사 1급 자격증을 따고도,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버린 역사 지식들이 이번 연극을 보는 내내 부끄러움을 안겼다. 공부할 때는 쉽게 아군과 적군을 나누며 암기했지만, 〈빵야〉는 그런 단순한 구분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 경계가 지워질 때, 나는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가. 나나는 그러한 혼란 속에서도 글을 써 내려가고자 한다. 나나는 그런 갈등과 불안을 안고서도 글을 쓴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진짜 ‘기록’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흔들리고, 의심하고, 아파하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것. 글을 쓰는 이의 양심은 그렇게 매 순간 불안하게, 그러나 집요하게 자신을 흔들며 앞으로 나아간다.

 

 

 

음악의 본질, 악기의 슬픈 고백

 

연극 〈빵야〉를 보면서 가장 가슴 아팠던 장면 중 하나는, 전쟁 중 아군이 악기를 이용해 귀순을 유도하는 장면이었다. 산속에 숨어 있는 적을 꾀어내기 위해 연주되는 음악.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음악이 사람을 살리고 치유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다. 전쟁 속 평화를 불러오는 음악의 힘을 주제로 한 예술 작품들이 넘쳐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극은 그 믿음을 교묘하게 비튼다.

 

악기의 입장에서 보면, 그 연주는 영락없는 ‘악용’이었다. 사람들을 감동시키기 위해,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태어난 소리가, 전쟁터에서 상대를 속이고 이용하는 데 쓰였다. 악기들은 원하지 않는 임무를 수행하며 모욕감을 느꼈고, 본질을 잃어버린 자신을 한탄한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며 문득, 우리가 순수하다고 믿었던 것들조차 얼마나 쉽게 목적에 맞게 변형되고 소비되는지를 떠올렸다. 예술도, 언어도, 신념도 마찬가지다. 평화를 노래하던 악기가 전쟁의 수단이 되는 순간, 음악은 음악이기를 포기당한 것이다.

 

이 장면은 나에게 깊은 울림을 남겼다. 음악은 원래 사람을 감동시키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음악은 음악 그 자체로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음악을 수단으로 삼았다. 악기에게는 얼마나 모욕적이고 슬픈 일이었을까. 전쟁터에서 쓰이고 싶지 않았을 악기들. 그들의 본질은 지켜지지 못했다. 음악의 힘을 믿고 사랑해왔던 나로서는, 그 장면이 가슴 깊은 곳을 찌르는 듯했다. 이 연극은 이렇게 사물과 존재들의 목소리를 빌려,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것들을 의심하고 다시 바라보게 만든다.

 

 

 

총으로서 살아간 존재, 쓸모와 비극 사이

 

극의 후반부, 장총은 스스로의 이야기를 하는 클라이막스 장면이 연결된다. 누군가에게 소중한 선물이었던 기억, 또 다른 누군가의 손에서 죽음의 도구가 되었던 기억. 사랑받던 순간들과 저항할 수 없이 폭력의 주체가 되어야 했던 시간들이 교차한다. 장총은 자신을 정당화하지도, 변명하지도 않는다. 다만 담담히 자신이 겪어온 시간들을 돌아본다. 그러나 그 잔인한 침묵 속에서, 보는 이들은 더 깊은 슬픔과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 쓸모 있었기에, 그리고 필요했기에, 그렇게 수많은 죽음을 거들어야 했던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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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습은 99식 소총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 역시, 사회 역시, 국가 역시 필요와 쓸모라는 이름 아래 스스로를 변질시켜왔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는 쉽게 지워버리고, 인정하기 싫은 책임은 외면하면서. 장총은 우리에게 그 비극의 초상을 들이민다. 나는 수많은 폭력에 대한 물음이 끊이지 않고, 사실 아직도 이러한 방산 산업의 의미가 무엇인지, 긍정적으로 볼 관점을 얻지 못했다.


*

 

3시간 동안 펼쳐진 〈빵야〉의 세계는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게 만드는 데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그리고 앞으로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묻고 있었다.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기록하며 살아갈 것인가. 그리고 우리의 손끝에 쥔 트리거를 어디를 향해 당길 것인가.


연극이 끝난 후, 극장을 나서며 나는 오래도록 생각했다. 기록한다는 것은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희망일 수도 있겠지. 기억한다는 것은 과거를 짊어지는 일이지만, 그것이야말로 미래로 나아가는 첫 걸음일 수 있겠지. 〈빵야〉는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 각자에게 조용한 질문을 남긴다. 방아쇠를 쥔 손, 그 손은 결국 우리 스스로의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매 순간 무엇을 향해 당길지를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다.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기록할 것인가. 그리고 그 손 끝에 쥔 트리거를 어디를 향해 당길 것인가. 결국 그것은 지금을 살아가는 나에게도 던져진 질문이었다. 연극이 끝나고 극장을 나서며, 나는 막연하게나마 알 것 같았다. 기록한다는 것은, 기억한다는 것은, 책임이자 고통이며, 동시에 유일한 희망일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각자는 저마다의 트리거를 손에 쥐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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