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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화 〈상자 속의 양〉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선택할 수 있다면
최근, AI로 죽은 사람의 생전 모습을 복원해서 유족에게 보여주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무대 위 고인은 살아 돌아온 것처럼 움직였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유족들은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그 영상을 차마 끝까지 보지 못하고 멈췄던 기억이 있다. 죽은 사람을 다시 만난다는 일이 누군가에게 그토록 간절한 일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섭다는 마음이 드는 이유를 그때는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상자 속의 양》 각본집을 읽으면서 그 영상이 떠올랐다. 책 후반에 감독이 직접 밝힌 비하인드에 따르면, 이 영화의 시작은 “생성형 AI로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이야기”였다고 한다. 감독은 인터넷에서 본 중국의 기사 하나에서 이 아이디어가 시작되었다고 말했는데, 그 기사는 컴퓨터 화면상에서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비즈니스가 인기를 얻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만약 정말로 AI 기술을 통해 그리운 사람을 다시 볼 수 있다면, 나는 그 기술을 기꺼이 이용하기를 택할까? 그 기술로 복원한 모습이 외양과 목소리는 같다고 해도, 그 상대를 과연 내가 알던 사람과 겹쳐 볼 수 있을까? 각본집 《상자 속의 양》은 바로 이 질문에서 시작된다.
영화에서 사고로 아이를 잃은 부부 오토네(아내)와 켄스케(남편)는 죽은 사람의 부재를 채워주기 위해 만들어진 AI 휴머노이드 서비스를 통해 죽은 아들과 똑 닮은 ‘카케루’를 데려온다. 이 아이를 받아들이는 부부의 태도는 사뭇 다르다.
오토네는 카케루를 데려온 첫날부터 아이를 껴안고 잠들며, 휴머노이드인 카케루에게 상처가 될 만한 말들을 켄스케에게 단속하는 모습을 보인다. 마치 ‘진짜’ 카케루를 대하듯이.
켄스케: 저녁밥 어쩔래?
(갑자기 표정이 바뀌는 오토네)
오토네: 지금 밥 얘기는 하지 마.
켄스케: ?
(오토네, 카케루의 귀를 두 손으로 막는다.)
오토네: (작은 목소리로) 카케루는 못 먹으니까…
반면, 켄스케는 카케루에게 본인을 아빠 대신 아저씨라 부르라고 말한다. 이렇게 카케루를 자신의 ‘진짜’ 아들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심지어는 카케루에게 주입된 기억 정보를 통해 자신이 과거 아들을 잃었을 때의 사건을 조사하려는 무모한 시도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 켄스케 역시 생전 아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드는 카케루를 보며 조금씩 마음을 연다. 그렇게 두 사람은 타인의 시선과 죄책감 사이에서 흔들리던 마음을 추스르고, 카케루를 돌려보내지 않고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 들이기로 결정한다.
각본은 등장인물의 대사와 지문으로만 이루어져 있기에,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죽은 아이의 기억으로 만들어진 카케루가 ‘전원’이 들어온 뒤에 두 사람과 시간을 보내기 시작한다면, 그는 여전히 죽은 아이의 복제품에 불과할까, 혹은 이미 다른 존재가 되었다고 보아야 할까. 두 사람은 카케루를 돌려보내지 않기로 결정한 밤, 어떤 마음으로 카케루와 함께 살아가겠다고 다짐했을까.
두 번째 안녕은 '진짜'로 안녕
《상자 속의 양》은 단순한 AI와 인간의 공존 가능성을 넘어, 가족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해 성찰해보도록 만든다. 영화에서 오토네, 켄스케와 카케루 이 셋의 관계만큼이나 인상적이었던 관계는 바로 오토네와 그의 엄마, 노부요의 관계였다. 어린 시절 오토네는 노부요에게 “엄마 역할 관둘래”라는 말을 듣는다. 그 말은 오토네에게 오랜 상처로 남았고, 오토네는 자신은 절대 노부요 같은 엄마가 되지 않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느 날 아들에게 똑같은 말을 해버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각본집에서는 노부요가 어린 오토네에게 어떤 마음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오토네가 왜 그 말을 자신의 아들에게 했는지 또한. 이 대목의 불친절함이 그 대사를 오래도록 곱씹도록 만들었다.
이 장면은 개인적으로 가족 관계에서 받은 상처가 얼마나 오랜 시간 지속되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느껴졌다. 여기서 흥미롭게 다가왔던 것은 휴머노이드와 인간이 의외의 지점에서 서로 겹쳐 보인다는 점이었다. 카케루가 과거 기억을 데이터 삼아 태어나 그 기억을 토대로 사고하고 행동한다면, 오토네 또한 벗어나고 싶었던 자신의 과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현재를 살아간다.
비슷한 면이 있는 두 존재는 시간이 지나면서 각기 다른 선택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엄마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싶은 오토네는 쉽사리 그렇게 되지 못한다. 반대로 카케루는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에게 주입했던 기억에서 멀어지며 동료 휴머노이드와 다른 인간 친구를 만나 새로운 경험을 쌓아간다. 카케루는 오로지 과거의 기억으로만 만들어진 존재임에도, 과거로부터 먼저 벗어나는 쪽은 카케루이다.
영화 후반, 카케루는 결국 오토네와 켄스케의 곁을 떠난다. 다른 AI 휴머노이드와 인간 동료 들과 함께 숲속에 자신의 집을 짓는다. 죽은 아이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가 결국 다시 부모의 곁을 떠나는 셈이다.
다만 처음의 이별과 두 번째 이별은 다르다. 처음에는 예상치 못한 사고로 아이를 잃었지만, 이번에는 카케루가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살고 싶어 했기 때문에 보내준다. 한 번 잃었던 아이를 휴머노이드로 만들면서까지 애써 받아들인 두 사람에게 어쩌면 두 번째 이별은 더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카케루가 자신들이 기억하는 아이와 다른 존재가 되어 가는 것을 받아들이고 끝내 떠나는 것을 허락하는 것까지가 두 사람이 카케루를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상자 속의 양》이라는 제목은 《어린 왕자》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각본집에서도 오토네가 카케루에게 이 책을 읽어주고 이야기하는 대목이 나온다. 영화에서 언급하는 대목은 비행사가 상자 하나를 그린 뒤 어린 왕자에게 그가 원하는 양이 그 상자 안에 있다고 말하는 장면이다.
상자 속의 양은 눈에 보이지 않기에 보는 사람이 원하는 모습대로 상상할 수 있다. 오토네와 켄스케, 두 사람에게 카케루도 처음에는 그런 존재였을지 모른다. 자신들이 기억하는 아이의 모습만이 담긴 존재, 죽은 아이의 빈자리를 채워줄 존재. 하지만 카케루는 결국 그들이 만들어 놓은 상자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부모를 떠나고, 자신이 살아갈 집을 직접 짓는다.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는 죽은 사람을 AI로 되살릴 수 있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지를 생각했다. 그러나 이야기가 끝난 뒤에는 다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되었다. 그리워했던 사람을 똑 닮은 존재로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그 존재가 내가 기억하고 규정하던 사람과 다르게 느껴진다 해도 나는 그 존재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어쩌면 가족이 된다는 것은 그 사람을 내가 바라는 모습으로 두기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모습으로 변해 가는 것까지 이해하고 품는 일인 것 같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두 번째 이별은 첫 번째 이별과는 다르다. 카케루를 자신들의 곁에 두면서 상실을 채우는 대신, 아이가 선택한 삶을 존중하고 보내주는 것. 어쩌면 두 사람과 한 휴머노이드는 그때 진정한 가족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