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의 발전이 빛의 속도만큼 빨라지고 있다. 작년만 해도 챗GPT로 내가 기획한 걸 한 번 검토받는 정도였는데, 어느샌가 기획 자체를 AI와 하고 있고, 이제는 코딩도 AI가 대신 해주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인공지능’하면 빠질 수 없는, 인간을 본 떠 만든 안드로이드나 인간성을 탑재한 휴머노이드처럼 상상 속에서나 마주할 만한 일들이 이젠 더 이상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느껴질 따름이다.
그럴 때마다 항상 드는 의문이 있다. 만약 누군가가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을 너무 그리워한 나머지, 그 사람의 인격이나 성격, 가치관, 정체성을 담은 AI나 안드로이드를 만들어 낸다면, 그 행위의 윤리성을 과연 어떤 잣대로 판단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존재는 원래의 사람을 대체할 수 있을까? 지금처럼 AI가 스스로 학습을 진행한다면 말이다.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을 줄 알았다―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 어떤 가족의 이야기. 사고로 아이를 잃은 부부가 아이를 대신해서 받아들인 것은 휴머노이드였다. 다시 흐르기 시작하는 가족의 시간. 그러나 이 가족을 기다리는 것은 상상을 초월한 '미래'였는데—.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선사하는 압도적인 인간 드라마 보이지 않는 것을 우리는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고레에다 감독의 그림 콘티 및 [[상자 속의 양]이 만들어지기까지] 수록
주인공 코모토 오토네와 켄스케는 건축가로 일하는 부부다. 두 사람은 2년 전 사고로 아들을 잃은 뒤, 여전히 그날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오토네는 갑자기 집에 찾아온 자신의 엄마 때문에, 켄스케는 파친코를 하다 시간을 놓친 탓에 사고가 벌어졌다고 여기며 각자의 죄책감에 갇혀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다른 가정의 휴머노이드를 마주한 두 사람은 아들을 다시 한번 만나보기로 결심한다.
차마 버리지 못했던 아들의 유품을 모아 휴머노이드 제작사에 보낸 두 사람은 마침내 아들 카케루와 다시 마주한다. 겉모습은 분명 자신들의 아이가 맞지만, 마음 한편에서 피어오르는 의구심을 좀처럼 잠재우기 어렵다. 도저히 메워지지 않는 이 간극을, 가족은 과연 어떻게 채워 나갈까.
도서 <상자 속의 양>은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쓴 시나리오북이다. 영화나 드라마 제작 전 배우들이 읽는 각본과 같은 형식의 책 은 처음 접했다. 보통 책은 세세한 묘사와 서술을 바탕으로 독자가 장면을 직접 상상하며 읽어 나간다. 그래서 대사 위주로 구성된 책만으로 과연 얼마나 많은 장면을 떠올릴 수 있을지 걱정부터 들었다. 하지만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간결한 배경 묘사와 대사만으로도 인물들이 어디에 있고,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충분히 그려졌다. 인물의 감정이 담긴 표정까지 완벽하게 상상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들을 제외하면, 아마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일본 감독 중 한 명이지 않을까 싶다. 어렸을 적 언니를 따라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아무 생각 없이 본 적이 있다. 성인이 된 뒤 문득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 한 번 더 감상했고, 그때부터 나 역시 이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게 되었다. 분명 소재와 이야기만 보면 눈물이 나지 않을 수 없는데도, 관객을 억지로 울리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 좋았다.
가족애를 워낙 잘 다루는 감독이기에 이야기 자체에는 군말할 데가 없었다. 다만 소재가 다소 흔하게 느껴진 점은 아쉬웠다. 2006년에 이미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란 영화가 역시 인간과 기계의 경계를 다룬 작품이니 말이다. 갑작스러운 장면 전환도 다소 당혹스럽게 느껴졌다. 장면이 바뀐 뒤 카케루를 비롯한 여러 휴머노이드와 아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지만, 이에 대한 별도의 부연 설명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미처 이해하지 못한 채 책장을 넘겼을 수도 있다.
책의 제목인 '상자 속의 양'은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등장하는 표현으로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어린 왕자>에서 화자인 '나'는 어린 왕자의 부탁을 받고 양을 여러 번 그려주지만, 어린 왕자는 그림을 볼 때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을 지적한다. 결국 '나'는 상자 하나만을 그려 준 뒤, 어린 왕자가 원하는 양은 그 안에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어린 왕자는 오히려 이 그림을 가장 마음에 들어 한다. 상자 안에 자신이 원하던 양이 '분명히' 들어 있다고 믿으면서 말이다.
이 이야기를 떠올리며 작품의 제목이 왜 <상자 속의 양>인지 계속 생각해 보았다. '나'가 그린 상자 안에 정말 양이 있는지는 누구도 확인할 수 없다. 애초에 그림일 뿐이니, 현실적으로는 양이 없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어린 왕자는 그 안에 자신이 원하는 양이 들어 있다고 굳게 믿는다. 그림 속 상자는 직접 열어 볼 수도 없으니, 그 믿음이 깨질 일도 없을 것이다.
주인공 부부가 다시 만난 아들은 어쩌면 상자 밖으로 꺼내진 양이 아니었을까. 휴머노이드로 되살리기 전까지 아들 카케루는 부부의 기억과 기대 속에 존재하는 '상자 속의 양'이었다. 그러나 상자 밖으로 나온 현실의 양은 그들이 상상하던 모습과 달랐다. 아들의 얼굴과 외형, 기억을 지니고 있었지만 결코 죽기 전의 아들과 동일한 존재는 아니었다. 그 사실을 부부도, 기계로 다시 태어난 아들 카케루 자신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상자 안에 실제로 양이 있는지 없는지가 아닐지도 모른다. 어린 왕자에게 상자 속의 양이 분명히 존재했듯, 코모토 부부에게도 기억 속 카케루는 의심할 여지 없이 자신들의 아들이었다. 상자 안에 있는 동안에는 보고 싶은 모습으로 마음껏 상상할 수 있었고, 그 믿음이 현실과 부딪혀 깨질 일도 없었다. 하지만 상자를 열어 양을 현실로 꺼내는 순간, 믿음만으로 완성되어 있던 존재는 구체적인 몸과 말, 행동을 갖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때부터 현실의 카케루는 부부가 기억하던 아들과 조금씩 어긋날 수밖에 없다.
<상자 속의 양>은 죽은 사람을 현대의 기술로 되살릴 수 있는지를 묻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억 속에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던 사람을 현실로 다시 불러냈을 때, 그가 더 이상 우리의 기억과 같지 않더라도 여전히 같은 사람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는지를 묻는 작품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상자 속의 양은 상자 안에 있을 때 가장 완전한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