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
MBTI가 N인 저는 이런저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을 많이 하곤 합니다. 지나가던 억만장자가 제 생김새를 보고 불쌍해 보여서 깨끗한 돈 몇 억을 줬으면 한다거나, 출근길 지하철에서 갑자기 좀비 바이러스가 퍼져 아포칼립스 상황이 일어난다거나 하는 상상이요. 그래서 그런지 둘 중 고르기 힘든 밸런스 게임도 재밌고요.
그러다 보니, 단순히 어떤 상황이 일어나는 게 아니라 '나'에게 믿지 못할 능력이나 힘이 생기는 상상도 가끔 듭니다. 블록버스터 영화를 보면서 마치 제가 저 자리에 있는 것처럼요. 물론 영화에서는 주로 주인공이 승리하고 영웅으로 칭송받아서 앞날이 창창한 편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 엄청난 힘을 내가 원한 것도 아니었고, 누군가에 의해 억지로, 강제로 나쁜 일에 써야 된다면 어떨까요? 나의 앞길은 과연 괜찮은 걸까요?
신과 인간의 기로에서 우리가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로맨스판타지 웹툰 <저무는 해, 시린 눈>입니다.
STORY
모르메라타 왕국과의 오랜 전쟁 끝에 패한 북부.
왕국을 승리로 이끈 주역에는 신의 가호를 받은 전설적인 영웅, '태양의 마녀'가 있었다.
한편, 전쟁으로 부모를 여원 북부인 청년 '에르킨'은 해박한 약초지식을 활용해 왕국의 수도에서 일하고 있다.
어느 날, 왕실 기사단에서 찾아와 비밀스러운 성의 약제사로서 일하기를 제안하고,
에르킨은 이들을 따라가면 복수를 꿈꾸던 국왕과 부모님의 원수, 태양의 마녀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제안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찾아간 성에서 마주한 건 어딘가 엉뚱하고 속을 알 수 없는 시녀, '카야'였다.
에르킨과 카야, 두 사람은 정체와 복수심을 뒤로 숨긴 채 가까워지기 시작하는데....
신화와 전쟁, 가호와 저주, 사랑과 복수 그리고 음모....
비극적으로 얽힌 운명, 이 여정의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당신이라면 칼을 거둘 수 있을까?
주인공 에르킨은 북부 출신의 약제사입니다. 다정다감한 엄마아빠 밑에서 착하고 올바르게 자라던 에르킨은, 모르메타라 왕국과 북부와의 전쟁 속에서 부모님을 잃게 됩니다. 부모님의 사인이 분사라는 것을 알게 된 에르킨은 전쟁 영웅으로 칭송받는 태양의 마녀, 힐데가르에 대한 원한을 품고 자라게 돼요.
그렇게 성인이 되어 부모님께 물려받은 약초 지식으로 왕궁 수도에서 일하던 에르킨은 어느 날, 왕실 기사단으로부터 입성入城 제안을 받습니다. 약간의 강요와 협박이 가미된 제안을요. 오히려 이를 기회 삼아 자신의 부모님을 죽게 만든 힐데가르에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에르킨은 위험한 제안을 받아들이고 성에 들어가게 됩니다.
쉽지 않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성 안에서 마녀의 머리털 끝은 볼 수가 없었고 대신에 웬 이상한 시녀 한 명을 보게 됩니다. 시녀의 이름은 ‘카야’. 성의 주인인 힐데가르의 전속 시녀인 카야는 시녀치고는 곱고 시녀답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에르킨은 점점 카야에게 마음을 열게 돼요. 카야도 상냥한 에르킨이 마냥 싫지는 않았고요.
사실 시녀 카야의 정체는 에르킨이 증오해 마지않는 태양의 마녀 힐데가르였습니다. 성 안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게 시녀 차림으로 돌아다니던 힐데가르는 우연찮게 성 안에서 에르킨을 만나게 되었고, 쉽게 정체를 밝힐 수 없어 카야라는 가명을 쓰게 돼요. 그렇게 둘은 서로의 속마음을 감춘 채 점점 가까워져 갑니다. 하지만 서로가 숨기고 있는 비밀은 자꾸만 불어나 더 이상 감출 수가 없어만 지는데…
카야는, 힐데가르는 과연 에르킨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힐 수 있을까요? 카야의 정체를 알게 된 에르킨은 과연 어떤 선택을 내릴까요?
COMMENT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 이 웹툰은 반드시 봐야 합니다! 오랜 세월 참 많은 웹툰을 봤지만, 이렇게까지 찬양하게 되는 작품은 정말 많지 않거든요. <저무는 해, 시린 눈>은 스토리, 개연성, 작화, 설정 등등등 그냥 쉽게 말해 하나도 놓칠 것이 없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의 평점은 95점입니다. 오점이 없거든요.
<저무는 해, 시린 눈>의 결말까지 함께 달려가면,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어요. 사람이 사람으로서 이 땅에 서서 살아갈 때, 주어진 삶을 개척해 나갈 수 있는 힘을 얻고 자주적인 인물로 성장할 수 있다고 말이죠. 신이라는 불멸자가 아닌,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주체적인 필멸자의 삶에도 가치가 있음을요.
무병불사의 회복력과 광열의 마법을 쓸 수 있는 태양의 힘을 가지게 된 힐데가르는 관념적으로 ‘인간’이라는 종족에서 멀어지게 돼요. 내 옆에 있는 사람들과 같은 삶을 살 수 없다는 건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나라는 사람은 분명 인간인데, 다른 사람들은 나를 인간으로 봐주질 않으니까요.
그 와중에 육신은 또 평범한 사람이었기에 신에 필적하는 힘은 그 반동으로 힐데가르의 생명을 좀먹어 갔습니다. 또, 태양의 힘을 전쟁에 사용함으로써 '영웅'이라는 명예와,‘마녀’라는 악명도 함께 얻게 되었고요. 웃긴 건, 그들이 칭송하는 태양의 힘도 월석과 삶에 대한 의지가 없어지면 한없이 무력해집니다. 신의 힘이라고 부르고는 있지만, 결코 신은 아닌 거죠.
물론 그 힘을 이용해서 이룰 수 있는 것도 많았을 거예요. 작중 내에서 힐데가르는 그 힘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도 했고, 맹목적으로 그 힘을 숭배하려는 사람도 있었으니, 힐데가르의 천성이 나빴더라면 세계 정복도 가능했을 겁니다.
하지만 카야는 초월적인 힘을 이용해서 전쟁통을 살아가는 게 아니라,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 살고 싶었어요. 그렇게 살 수 없다면 차라리 죽음을 원했죠.원치 않는 힘을 가짐으로써 원치 않는 죽음을 보고, 잃은 것도 너무 많고, 항상 누군가에게 휘둘리는 삶만 살아왔으니까요. ‘나’라는 사람이 없어지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고요.
그러나 그런 카야를 구원해준 사람은, 똑같은 신이 아닌 인간 중의 인간 약제사 에르킨이었습니다. 키랑 덩치만 좀 클 뿐, 에르킨은 숯기도 없고 싸움도 못 해요. 누군가를 죽이는 것보다 살리는 것에 능한 사람이죠. 요즘 같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힘든 순수하고 착한 청년입니다. 그런 주제에 무기를 가진 병사들 사이로 카야를 구하러 몸을 던지기도 합니다.
이렇듯 사람은, 인간은 생각보다 강합니다. 힘든 일이 있어도 결국 이겨내고 극복해 내니까요. 신이 아닌 인간인 우리는 모두 그렇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살아가려고 합니다. 작품 속 주인공들을 보면서 저도 이미 주어진 한정된 삶에서, 보다 더 내가 원하는 인생을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한국에서도 단군 신화가 내려오듯이, <저무는 해, 시린 눈> 작품 내에서도 태양신 '카리야' 신화가 존재합니다. 태양신이라고 하니 바로 느낌이 오죠? 바로 힐데가르가 가진 힘, 태양의 힘의 원천입니다. 초반에 태양신 카리야는 그 대단한 힘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전쟁신이라고도 불립니다. 마치 지금의 힐데가르처럼요.
하지만 우리 나라에서도 신화나 설화가 여러 갈래로 해석되듯, 카리야에게도 또 다른 이야기가 존재했습니다. 그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어째서 이 제목이 저무는 해이고 시린 눈인지도 알게 되고요. 이야기 내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신화가 두 주인공에게 어떤 식으로 반영되는지도 함께 보시면 웹툰을 정말 재밌게 감상하실 거라고 생각해요.
또, 평면적인 캐릭터가 없는 게 이 작품의 정말 큰 매력이라고 느꼈어요. 마녀를 죽이고 말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음에도 끝내는 그 착한 천성을 버릴 수 없었던 주인공. 의도치 않게 신의 힘을 얻게 되어 비참해진 삶이었으나, 한 건실한 청년을 만나 다시 삶의 의지를 갖게 된 태양의 마녀. 회생 불가 악역, 똑같이 악역이어도 시대상을 반영했을 때 정당성을 가진 매력적인 악역, 독자의 뒤통수를 얼얼하게 만드는 배신의 키워드를 담은 캐릭터 등등. 각자의 사상이나 신념에 기반하여 행동하는 주조연들이 모두 입체적이라서 마음에 들었어요. 그래서 더 작품의 완성도가 높았던 것 같고요. 모든 캐릭터가 매력적이라서 "최애 캐릭터는?"이라는 질문에 답을 내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래도 그중에서 ‘레나드’라는 캐릭터가 기억에 남습니다. 처음에 레나드는 워낙 헤벌레-한 모습이라, 소위 말하는 그냥 머리 꽃밭 캐릭터라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사실은 그렇게 살아가는 이유가 다 있었더라고요. 아무것도 모르는 온실 속 화초 왕자님인 줄 알았는데, 종국에는 현왕 모르모데스 뒤를 이을 왕권 싸움에서 고모와 대립까지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친구 한 명(힐데가르)과 수백 명의 국민들 사이에서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누가 보면 왕이 될 사람이 소를 위해 대를 희생해도 되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에 답답함을 느꼈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사람이라면, 내가 정말로 아꼈던 친구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싶지 않을까요? 내가 그 억울함을 풀어줄 수 있을 만한 힘을 가질 수 있는데도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레나드는 결국 결단을 내립니다. 친구를 소중히 여긴다는 ‘나’를 위한 선택이 아니라, 그 사람이 진정 원했을 ‘친구’를 위한 선택을요. 결국 역사에선 힐데가르는 왕을 살해하고 이 세계를 떠난 마녀로 남겠지만,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점차 그 존재가 옅어지게 될 거예요. 그렇게 마녀 힐데가르는 죽고, 인간 카야만 남을 겁니다.
OUTRO
저는 이 웹툰을 보면서 <강철의 연금술사>(이하 강연금) 생각이 많이 나더라고요. 연금술사도 (등가교환의 법칙이 필요하지만) 일반인과는 다른 신비한 힘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중에는 호문클루스(인조인간)와 같이 정말로 인간이 아닌 자들도 있었고요. 강연금의 주인공 에드워드 엘릭은 이 힘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뛰어난 연금술사였지만, 이야기의 마지막에는 육신을 잃고 혼만 남아버린 동생을 위해 연금술의 힘을 포기합니다. 머리는 누구보다 비상하지만 결국 연금술이라는 능력을 잃은 평범한 사람이 된 거죠. 그래도 후회는 하지 않아요. 신에 가까운 힘을 힘을 포기하더라고, 멈추지 않고 자신의 미래를 살아가는 강연금의 주인공이 힐데가르와 겹쳐 보였습니다.
한 회차도 빠트리지 않고 완결까지 쿠키를 구워가며 보던 작품이었는데, 결국에는 끝이 나서 아쉬움이 큽니다. 영화가 아닌 드라마나 애니메이션, 웹툰과 같이 시리즈가 긴 작품들 같은 경우에는 이야기의 마지막까지 오랜 날을 함께하다 보니, 떠나보내기가 너무 어려운 것 같아요. 내가 애정을 주었던 아이들의 이야기를 더는 볼 수 없으니까요.
이 작품을 평생 간직할 수 있도록 꼭 단행본으로 나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