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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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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지 않는 생명은 없다. 매일 신체와 정신을 마모시키며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여정이 생(生)이다. 늙는다는 건 어느 때를 뜻하는 걸까. 또한 젊음과 늙음을 나누는 명확한 기준은 뭘까.


흔히 물리적인 나이, 건강 상태, 외형을 두고 늙음과 젊음을 판가름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이는 적지만, 한 자리에서 시간만 흘려보내는 걸 젊다고 할 수 있을까. 혹은 나이가 많더라도 여전히 미래에 대한 꿈을 품고 사는 이에게 늙었다고, 끝났다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더 드레서>는 1942년, 전쟁 중인 영국의 한 지방 극장에서 일어나는 하루 동안의 일을 다룬 연극이다. 혹은 죽음 문턱까지 다녀온 노배우가 마지막 생을 붙들어 무대에 선 후, 평온히 눈을 감는 여정을 그린 작품일 수도 있다. 또는 평생 노배우를 보필하며 그의 업적이 제 것인 양 인정받으려 애쓰던 드레서에게 남는 건 없단 허무를 말하는 극일 수도 있겠다.


연극 <더 드레서>는 영화 <피아니스트>로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은 작가 ‘로널드 하우드’ 희곡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작가가 셰익스피어 전문 극단에서 5년간 드레서로 일하며 겪은 경험을 모티브로 창작된 작품은, 1983년과 2015년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서울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2025년 12월 27일에 개막해 2026년 3월 1일에 막을 내리는 연극 <더 드레서>는 네 번째 시즌을 맞아 여러 변화를 선보였다. 선생님·사모님·옥슨비 역에 새로운 얼굴들이 합류했으며(박근형·정동환·송옥숙·한기장), 국립극장에 입성하며 이전 시즌들보다 무대를 넓혔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2020년, 2021년, 2024년까지 세 시즌 동안 노배우 ‘선생님’으로 무대에 오르던 송승환이 드레서 ‘노먼’으로 역할을 바꿔 합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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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 전문 극단 주연 배우이자 극단주인 선생님은 227번째 <리어왕> 공연을 앞두고 있다.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던 그는 생의 ‘막공’ 만큼은 무사히 마치려는 듯 병원을 나와 무대 분장실로 회귀한다. 대사는 기억이 안 나고, 주름과 검버섯을 덧칠하는 손도 벌벌 떨려오며, 평생을 선 무대는 두렵기만 하다. 몸은 늙었지만, 정신은 어린아이인 선생님을 극진히 보필하며 기어코 무대에 서게 만드는 건 드레서 노먼이다.


노먼의 역할은 단순한 드레서가 아니다. 어떻게든 선생님 기분을 풀어주며 분장을 시키고, 무대에 올린다. 드레서이자 비서, 의사, 코미디언, 때론 아내 역할까지 수행하는 노먼은 수십 년 전 선생님의 작은 칭찬 한 마디에 드레서가 되며 인생을 바쳤다.


2026년 1월 30일 7시 30분 공연엔 박근형, 오만석, 송옥숙, 송영재, 이주원, 한기장이 무대에 올랐다. 최근 몇 년간 <고도를 기다리며>, <세일즈맨의 죽음>,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 등 활발한 무대 활동을 이어가는 박근형은 선생님 역할로 <더 드레서>에 새로 합류했다. 삶의 끝을 직감하고도 무대에 오르는 선생님은 마음도 정신도 온전치 않지만, 그럼에도 내일의 무대를 꿈꾸며 관객의 박수에 아이처럼 좋아한다. 80대에도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며, 연이어 새로운 무대에 도전하는 박근형과 <더 드레서> 선생님의 생을 바친 집념은 닮았다.


초연부터 전 시즌을 드레서 노먼으로 무대에 오른 오만석은 이번 시즌에도 입체적인 캐릭터 구현을 통해 노먼의 다양한 얼굴을 그려냈다. 노먼의 불안정한 마음에 뿌리내린 지독한 우울과 인정 욕구를 쏟아내는 오만석의 폭발적인 엔딩 장면은 <더 드레서>의 백미다.


사모님 역할로 새롭게 합류한 송옥숙 또한 권태에 찌들었지만 우아함과 냉철함을 잃지 않는 연기로 객석을 사로잡았다. 한기장 또한 패기 있고 냉소적이지만 따뜻한 옥슨비를 연기했으며, 전 시즌을 참여한 송영재와 이주원도 깊이 있는 감정을 선보이며 극을 이끌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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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드레서>는 인간의 인정 욕구를 묘사한 작품이기도 하다. 노먼은 선생님 칭찬에 드레서가 돼 평생 인정을 갈구했고, 생을 회고하는 그의 자서전에 자신 이름이 빠진 걸 알고는 배신감과 허무에 휩싸인다.


젊을 땐 영화배우를 꿈꿨지만, 지방 무대를 돌며 스타킹을 꿰매는 연극배우로 사는 사모님은 기사 작위가 있는 선생님의 정식 아내 자리도 욕심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남은 건 애인도 부인도 아닌 사모님이란 애매모호한 호칭, 늙어버린 삶이었다. 노먼은 영원히 남을 인정과 칭찬을, 사모님은 화려한 타이틀을 꿈꿨지만 그들은 결국 원하는 걸 얻지 못했다.


무대감독 맷지는 선생님을 향한 마음을 품곤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그 연정을 알았던 선생님은 고마웠단 말과 함께 반지를 준다. 남자가 여자에게 반지를 주는 걸 그녀가 오해하지 않을 나이가 돼서야 말이다. 순정을 바친 맷지가 인정받은 건 커리어보다 마음이었을 것이다.


노년에 가까운 나이지만, 전쟁으로 젊은이들이 군에 징집되는 바람에 얼떨결에 배우로 무대에 서는 제프리. 중년·노년의 구성원들 사이에선 젊지만, 다리가 불편해 전쟁에 못 나간 옥슨비. 이들에게서도 인정 욕구를 읽어낼 수 있다.


광대 역할로 무대에 선 제프리는 배우의 꿈을 이루며 ‘이 나이에도 놀라운 일이 생긴다’고 기뻐한다. 옥슨비는 선생님이 자신이 쓴 대본을 일부러 읽지 않았단 사실에 억눌렀던 분노와 냉소를 폭발시킨다. 모두가 극단에 남을 때, 홀로 문을 박차고 나간 옥슨비는 자신만의 극단을 만들며 선생님에게서 해방된다. 제프리와 옥슨비 모두 타인보단 스스로에게 인정받으려 했기에, 물리적 나이와 상관없이 그들의 마음은 젊다.


동료이자 남편인 선생님과의 삶에 지쳐 인간적 연민마저 잃어버린 사모님. 인정 욕구 하나로 선생님 곁에서 버티고 살아남은 노먼. 두 사람은 닮았다. 떠나거나 변화를 꾀할 타이밍을 놓친 채 주저앉아 몸도 마음도 늙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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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적으로 불만을 쏟아내는 사모님과 달리, 노먼 대사들은 간접적이다. 여리고 우울했던, 정신병원에 갈 뻔했던, 배우를 꿈꿨던 어릴 적 일화를 친구 이야기라 포장할 정도다. 하지만 선생님이 떠나자마자 노먼의 말들은 직설적으로 변한다. 뒤늦게 솔직해진 그의 처절한 절규는 더 비극적이다. 아버지 리어왕에게 쫓겨났지만, 그를 지키려다 희생되는 막내딸 코딜리어와 노먼의 덧없는 ‘버티고 살아남기’가 닮아 보이는 건 우연은 아닐 것이다.


<더 드레서>의 무대는 선생님 분장실·<리어왕> 연극 백스테이지와 무대·분장실 복도가 되기도 하고 길거리, 침실이 되기도 하는 가장자리 공간으로 나뉜다. <리어왕> 공연 장면에서 백스테이지와 본 무대가 역전된 무대 연출은 인상 깊은 장면 중 하나다. 관객 앞에 나서기 두려워하는 선생님을 내보내려는 백스테이지를 뒤로 한 채, 무대를 어떻게든 지켜내는 배우들의 모습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서글프다. 우리 인생과 닮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상처를 안고 있지만, 겉으론 웃으며 버티고 살아남는 것이 삶이다.


<더 드레서>는 여러 형태의 늙음과 젊음을 담담히 보여주며 관객에게 묻는다. 나이 들고 몸이 늙는 건 막을 수 없지만, 마음과 정신의 나이는 어떤 속도로 흐르게 둘 거냐고.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버티고 살아남는 게 인생인 걸까. 한 번뿐인 삶이란 연극의 희곡 또한 스스로 써 내려가야 한다는 걸, 작품은 말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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