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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S] 기대작 톺아보기 - 제27회 전주국제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가장 먼저 만나볼 수 있는: 사건 이후의 삶들

by 노현정 에디터
2026.04.29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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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7회 전주국제영화제가 오늘 4월 29일 개막했다. 이번 영화제는 2026년 4월 29일(수)부터 5월 8일(금)까지 10일간 개최한다. 54개국에서 출품된 237편 (국내 97편, 해외 140편)을 상영한다. ‘우리는 늘 선을 넘지’라는 슬로건 아래, 기존의 경계를 확장하는 다양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지난해 7만명의 관객을 돌파하며 꾸준한 성장세를 이끌어 오는 전주국제영화제는 올해도 치열한 티켓 경쟁이 벌어졌다. 개막식을 앞둔 지금, 어떤 관심작이 있는지 함께 톺아보려 한다.

 

영화제를 찾을 때마다 나름의 기준이 있다. 개봉 예정이 없는 작품일 것, 러닝타임은 120분 이내일 것. 며칠 동안 여러 편의 영화를 연달아 봐야 하는 영화제에서는 체력을 아끼는 것도 중요한 감상 조건이 된다. 그러나 결국 크게 작용하는 건 시놉시스 한 줄이 끌리느냐이다. 아직 보지 못한 영화 앞에서 어느 정도 운이 따라야 한다면, 결국 믿을 건 시놉시스를 읽는 감각 뿐이다. 이번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유독 눈에 들어온 작품들은 공통적으로 ‘상실 이후’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가족의 죽음 이후를 살아가고, 누군가는 폭력 이후의 시간을 견디며, 누군가는 오래된 이름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찾으려 한다. 중요한 것은 사건 그 자체보다 그 뒤의 삶이다. 사건이 발생하는 순간보다, 그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는 일상을 더 오래 바라보는 영화들에 유독 매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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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스티븐 <팔림프세스트: 이름에 관한 이야기>


이름이라는 가장 사적인 출발점에서 역사를 되짚는 작품이다. 홍콩에서 태어났지만 ‘스티븐’이라는 서양식 성을 물려받은 감독은 자기 이름의 기원을 따라 가족사를 추적한다. 오래된 사진과 녹음 자료, 일기 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단순한 족보가 아니라 식민주의와 이민, 그리고 디아스포라가 한 가족에게 남긴 흔적이다. 이름은 개인의 것이지만 동시에 그들의 뿌리를 나타낸다. 한국 관객에게도 이 질문은 낯설지 않다. 식민과 분단, 이주와 정착의 역사는 늘 우리와 함께했기 때문이다. ‘어디에 속해 있는가’라는 정체성을 거대한 담론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이름 하나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가 기대된다. 내가 쓰는 이름이 어디서 왔는지를 묻는 일은 결국 내가 어떤 역사 위에 서 있는지를 묻는 일이 된다는 점에서 이 영화가 어디까지 나아갈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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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생> 김면우

 

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 인근의 작은 법무사 사무소에서, 빚 때문에 무너진 사람들과 그들을 돕는 법무사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이다. 흥미로운 것은 남의 회생을 돕는 아버지 역시 코인과 주식으로 파산을 겪었다는 사실이다. 시인을 꿈꾸던 아들은 아버지의 빚을 갚기 위해 사무실에 들어간다. 이 설정은 단순한 가족 서사를 넘어 지금 한국 사회의 구조를 그대로 보여준다. 청년의 꿈은 현실 앞에서 쉽게 유예되고, 가족의 문제는 곧 개인의 책임이 된다. ‘빚’은 숫자가 아니라 관계를 설명하는 방식이 된다. 부모에게 진 빚, 자식에게 남기는 빚, 살아남기 위해 감당해야 하는 빚. 이 영화가 기대되는 이유는 개인회생이라는 제도를 다루면서도 결국 인간이 서로를 어떻게 책임지는가를 묻기 때문이다. 지리멸렬한 가족과 자본주의, 두 가지의 맥락 속에서 이 다큐멘터리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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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순이> 유소영

 

<공순이> 역시 가족을 통해 사회를 바라보는 작품이다. “엄마는 공순이다. 나는 그게 창피해 오래 외면했다”라는 시놉시스 한 줄로도 궁금증이나 영화의 한 궤를 설명하는 듯하다. 공장에서 일하는 엄마를 부끄러워했던 딸이 서른이 넘어 카메라를 들고 다시 엄마의 노동을 바라본다. ‘공순이’라는 단어에는 한국 산업화의 역사와 여성 노동에 대한 오래된 멸시가 함께 담겨 있다. 딸이 외면했던 것은 단지 엄마의 직업이 아니라, 그 직업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었을 것이다. 이 영화는 노동의 기록이면서 동시에 계급 감각에 대한 고백이다. 특히 여성의 노동은 늘 가족을 위해 당연한 것으로 소비되면서도 제대로 기록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 영화는 단순한 가족 다큐가 아니라, 누군가의 생애를 다시 존중하는 방식처럼 느껴진다. 가장 사적인 후회가 가장 사회적인 질문으로 확장되는 순간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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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비: 시비레> 우치야마 다쿠야


<마비: 시비레> 폭력 이후의 성장에 대한 영화다. 가정폭력 속에서 말을 잃은 소년이 폭압적인 아버지와 무력한 어머니 사이에서 살아남는 이야기다. 물도 전기도 끊긴 집에서 끼니를 해결하고 빨래를 해야 하는 유년은 이미 생존 자체가 노동인 시간이다. 이 영화가 중요한 이유는 가정폭력을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반복되는 일상으로 보여준다는 점이다. 많은 폭력은 뉴스가 아니라 식탁 위에서, 밤마다 반복되는 소리 속에서 자란다. 그리고 그 흔적은 성인이 된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영화는 불행한 어린 시절을 소비하는 대신, 그 시간을 통과한 사람이 이후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끝까지 조망한다. 상처는 지나간 사건이 아니라 현재형의 감각이라는 사실을 이 영화는 정면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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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목소리들> 온드르제이 브로바즈니크

 

세계적으로 명성 높은 소녀 합창단에 들어간 열세 살 카롤리나는, 특별히 선택받았다는 기쁨 뒤에 숨은 폭력의 구조를 서서히 인식하게 된다. 재능을 인정받는다는 것은 언제든 권력에 종속되는 방식이 될 수 있다. 예술, 교육, 훈육이라는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폭력이 정당화되는가. 특히 어린 여성의 몸과 목소리가 통제되는 방식은 여전히 익숙하다. 이 영화는 단순히 학대의 충격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어떻게 ‘특별한 기회’의 얼굴을 하고 다가오는지를 보여줄 것 같아 더욱 궁금하다. 성범죄, 특히 아동 성범죄를 다루는 영화의 재현에 관해서는 갑론을박이 여전하다. 관객으로서 어떤 불쾌감과 고통을 느끼는 것이 얼마나 연대의 장벽을 낮출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정말로 유효한지, 수많은 질문이 떠오른다.


이번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기대하는 작품들은 대부분 거대한 사건보다 그 이후의 삶에 머문다. 죽음 이후의 가족, 폭력 이후의 성장, 이민 이후의 이름, 실패 이후의 일상. 이 영화들이 흥미로운 이유는 비극을 소비하지 않고, 그 비극을 안고 계속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삶은 언제나 사건 이후에 더 길게 이어진다. 최근 누군가 사고와 사건의 차이에 관해 물었다. 사건은 그 일이 있기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것이라 말했던가. 영화는 서사적으로 사건을 다룬다. 인물들은 어떤 일을 통해 망가지고 재기를 한다. 그 망가짐의 사건은 비교적 짧고 강렬하지만, 그 회복의 시간은 느리고 괴롭다. 그런 느릿한 것들을 ‘고구마’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좋아하지 않는 관객들도 요즘 많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영화는 우리가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것을 창조해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현실 우화성을 보이는 장치가 아닐까. 우리 삶과 전혀 밀접하지 않다고 생각한 세상을 가까이하기도 하면서 다른 세상을 마주하는 것이 영화이다.


영화제는 그런 시간을 맨 먼저 만나는 장소다. 개봉보다 먼저, 때로는 다시 보기 어려울지도 모르는 영화들 앞에서 관객은 조금 더 솔직해진다. 무엇이 재미있는가보다 무엇이 오래 남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올해 전주에서 가장 보고 싶은 것은 사건 이후를 살아내는 사람들의 얼굴이다. 상실 이후에도 사람은 계속 살아야 하고, 영화들은 바로 그 지점을 가장 집요하게 바라본다. 그래서 내게 영화제는 강렬한 엔딩 장면이 아니라,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5분 정도의 시간이 모인 기억으로 남는다. 이런 느린 기쁨을 27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누릴 수 있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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